‘강한’ 트럼프 중동 정책의 거짓과 현실

[워커스] 인터내셔널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졌지만,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의도치 않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정치인이 선거 때는 무슨 말인들 못하나.” 물론 이는 전혀 새삼스러운 주장이 아니다. 나라를 불문하고 정치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사람들 각자의 경험과 학습효과를 통해 암암리에 공유되던 비밀 아닌 비밀이, 실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중 정치인의 입을 통해 기정사실화됐다는 점에서 그의 발언은 기억할 만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뻔히 속을 줄 알면서도 정치인이 선거 때 쏟아내는 말과 공약에 귀를 기울인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그의 중동 정책이 전임 오바마 시절과는 확연히 달라질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던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중동 정책이 낙제점이었다고, 자신은 그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 입으로 떠벌리고 다녔으니까.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명박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릴 필요가 있다. “선거 때는 무슨 말인들 못하나.”

그간 주류 언론이 분석해 내놓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을 간단히 정리하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고립주의’로 요약된다. 한 마디로 말해 미국의 국익을 가장 최우선에 놓고, 불필요한 대외 군사 정치적 개입을 최소화해 거기서 절감되는 재정을 일자리 늘리기와 국내 안보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동 정책만 놓고 보더라도, 이는 현실에 기초한 정책적 입장이라기보다는 선거용 레토릭에 훨씬 가깝다. 역대 미국 정부 가운데 국익을 최우선에 놓지 않은 정부가 어디 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날까지 미국의 중동 개입이 자신들의 국익과 무관하게 이뤄진 적이 과연 언제 있었단 말인가. 석유라는 자원의 확보와 지역에서의 패권 유지라는 자국의 핵심 이익을 위해 수시로 전쟁과 분쟁을 일으키고 친미 독재정권을 지원해온 게 사실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어느 날 갑자기 중동에서의 ‘개입(intervention)’을 중단하고 스스로 ‘고립(isolation)’을 택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보다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더 어리석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출처: 데모크라시나우]

중동의 현실

다들 알다시피, 오늘날 중동의 현실은 말 그대로 얽히고설킨 난맥상 그 자체다.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예멘, 이렇게 4개의 국가가 내전으로 사실상 붕괴했거나 붕괴 직전에 있고, 그 중 시리아에서는 인구의 절반이 난민이 되고 5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급진적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라 불리는 이슬람국가(IS)와 알카에다 추종세력이 상당한 영토와 군사 능력을 갖추고 테러와 잔학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 지역에서 중요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이제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와 이란이다. 거기에 불안감을 느낀 이스라엘은 거친 언사까지 동원하며 오바마 전 행정부에 이란의 위협을 제거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해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착촌 건설을 늘리며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병합을 서두르고 있다. 그에 비례해 팔레스타인 주민들 저항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건 당연한 결과다.

그래서 트럼프가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재앙적인’ 오바마의 중동 정책을 바로 잡겠다고 공언한 건 그러한 암울한 현실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그는, 취임 첫 날 오바마 정부의 업적이었던 이란과의 핵 합의를 파기하겠다고 약속했고, 한 달 내 이슬람국가(IS)를 뿌리 뽑을 비밀 계획을 내놓겠다고 공언했으며, 시리아 아사드 정부의 운명은 시리아 국민들 손에 맡기겠다고 했다. 그리고 텔아비브에 있던 이스라엘 주재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허나 석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트럼프의 ‘새로운’ 중동 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위의 정책들은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성격과 지역의 역학관계를 고려치 않은 한계 때문에 현실화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즉 오바마 정부의 중동 정책과 큰 틀에서는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고, 그보다 조금 더 호전적이고 좌충우돌할 거라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트럼프의 모순들

하나하나 따져 보자. 먼저 이란이 15년 동안 우라늄 농축시설 신설을 중단하는 대신 국제사회가 경제 제재를 해제하기로 한 2015년 핵 합의는 오바마 전 행정부가 내세우는 가장 큰 외교적 업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핵 개발을 동원한 이란의 위협에 너무 유화적으로 대처하며 북한을 비롯한 적대 국가들에 잘못된 신호를 줬다는 비판과, 이란을 지역 내 가장 큰 위협으로 여기는 이스라엘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런 비판에는 공화당뿐 아니라 찰스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같은 민주당 일부 세력, 그 중에서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까지 가세했다. 따라서 얼핏 보기엔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스스로 “역사상 최악의 거래”라 불렀던 이란과의 핵 합의를 실제로 파기하는 데는 별다른 걸림돌이 없게 느껴진다. 그러나 원래 대외 정책이란 게 국내 정치 상황이 우호적이라고 해서 그냥 수월하게 술술 풀리는 건 아닌 법. 당장 이란과의 핵 합의는 미국과 이란 정부의 양자 간 합의가 아니다.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 나라와 독일, 그리고 유럽연합이 이란 정부와 체결한 합의였다. 즉 트럼프의 절친인 푸틴의 러시아와 유럽 국가들의 반대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건데, 이란이 합의를 위반한 것도 아닌 다음에야 그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게다가 누구보다 기업 친화적인 사업가 출신의 대통령 트럼프가 이미 핵 합의를 믿고 이란에 거액을 투자하기 시작한 미국과 유럽 기업들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정적으로, 이란과의 핵 합의 파기는 중동 지역에서 이슬람국가를 뿌리 뽑겠다는 두 번째 정책과도 서로 충돌된다. 현재 미국이 이슬람국가를 상대로 군사공격을 벌이는 주요 무대는 이라크 북부의 모술과 시리아의 라카, 이렇게 두 곳이다. 그 중 2016년 10월부터 시작된 모술 탈환 작전은 이라크 정부군과 쿠르드 민병대, 그리고 이란이 파견하거나 지원한 시아파 민병대가 지상전의 주력을 담당하고, 미국과 프랑스가 공중에서 공습으로 뒷받침하는 연합 작전이다. 그런데 핵 합의 파기로 이란과의 관계가 악화 일로로 치닫게 되면, 이란뿐 아니라 같은 시아파인 이라크 정부와의 공동 전선에까지 심각한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시리아 전선 역시 꼬여 있긴 마찬가지다. 오바마 정부 시절, 미국의 대 시리아 군사작전은 크게 두 가지 목표로 진행됐다. 하나는 시리아 아사드 정부의 축출, 다른 하나는 이슬람국가를 비롯한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전자의 경우, 2015년 9월부터 러시아가 아사드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내전에 개입하면서 러시아와의 전면적인 충돌을 감수하지 않는 이상 직접적인 군사 개입으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바마 정부도 점점 깨닫고 있었고, 트럼프도 잘 알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트럼프 행정부는 선거 과정은 물론이거니와 불과 3월 말까지만 해도 시리아에서의 정권 교체를 “테이블에서 내려놓았다(off the table)”고 고백해왔다.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이나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 대사 모두가 하나같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러다 4월 4일 북서부 이들립 주의 칸샤이쿤에서 시리아 정부군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화학 무기 공격이 있자, “이 야만적인 공격에서 잔인하게 살해된 어여쁜 아기들”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다시 아사드 정부의 축출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칸샤이쿤 학살 이틀 뒤 트럼프는 동지중해에 정박 중이던 2대의 미 해군 구축함에 명령을 내려 개당 100만 달러짜리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59발을 시리아 정부군의 샤이라트 공군 기지에다 쏟아 부었다. 하지만 그 미사일 공격은 전선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미군 당국이 혹시 있을지 모를 양국 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열어놓은 채널을 통해 사전에 공습 사실을 러시아 군 당국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트럼프 미 행정부는 오바마 전임 행정부가 그랬듯 러시아가 지원하는 아사드 정부를 축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다만 ‘나는 오바마 보다 더 거칠고 강해’라는 과시욕만 충만할 뿐이다.

시리아 전선의 또 다른 축인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과의 전쟁은 또 어떤가. 여기에서 오바마 전 대통령이 취했던 방식은 미군 특수부대원들을 보내 ‘시리아 민주군(Syrian Democratic Forces)’과 ‘자유시리아군(Free Syrian Army)’을 훈련시킨 다음 무기를 쥐어줘 전선에 앞세우고, 미군은 공습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시리아 내에서 가장 실질적인 군사 능력을 갖춘 시리아 민주군의 주축은 약 3만5000명에 달하는 북동부 쿠르드족 민병대(YPG)로, 이들을 지원한다는 건 미국의 지역 동맹인 터키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다. 터키 정부는 자신들이 테러 단체로 지정한 쿠르드노동자당(PKK)과 연계된 시리아 쿠르드족이 터키와 시리아 국경 지역에서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받아 독립국가에 준하는 실체를 얻게 되는 걸 가장 경계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터키는 작년 하반기부터 시리아 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거리를 둔 채 러시아와 손을 잡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프라테스 방패 작전’이란 명칭 하에 직접 시리아 영토 안에 군홧발을 들여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유시리아군(FSA)의 경우는 6년간의 내전 과정에서 정부군과 이슬람주의 세력 양쪽으로부터 공격에 시달리며 세력이 급속히 약화해, 오늘날은 ‘레반트 이슬람 자유인 운동(Harakat Ahrar al-Sham)’ 같은 또 다른 급진 수니파 이슬람주의 세력과 손을 잡지 않고서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내몰렸다. 다시 말해, 자유시리아군을 지원하면 할수록 트럼프가 “급진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라고 말한 이들이 더욱더 힘을 키우는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주재 미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문제를 살펴보자. 사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는 따로 지면을 할애해야 할 정도로 복잡한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대사관을 이전하는 문제는 전혀 간단치 않은 폭발력 있는 이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에 가장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수립될 경우 예루살렘의 지위를 어떻게 하느냐는 점이다. 둘 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기를 원한다. 그런데 미국이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긴다는 건 이슬람을 믿는 아랍권 전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랍권 민중 전체의 커다란 반발과 봉기가 일어나게 되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같은 친미 독재 왕정들조차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다. 빌 클린턴부터 시작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하나 같이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 이전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가 그 누구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럼에도 만약 트럼프가 실제 이를 감행한다면, 그건 중동의 화약고에 다시 불을 지르는 격이 될 것이다.

위험들

정리하자면, 트럼프의 중동 정책은 큰 틀에서 오바마가 걸어왔던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차별화를 시도하려고 해도 당장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지니지 못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그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법, 트럼프는 제대로 된 정책 목표와 일관성도 갖추지 못한 채 국방 예산을 540억 달러나 더 늘리고, 기존에 500여 명이던 시리아 전장의 미 특수부대원의 수를 950여 명으로 증가시킨 뒤 향후 2천 명 까지 그 수를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오바마와 다르지 않으면서도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더욱 무모하고 호전적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중동 정책에 있어서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가 두렵고 우려스러운 이유다.[워커스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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