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없는 봄, 다시 벽돌 쌓는 ‘꿀잠’

[워커스] 노동의 추억

점심시간이 지나 도착한 현장. 오늘은 벽과 천장에 붙은 벽지를 떼야 한다. 오래된 벽지가 몇 겹씩 붙어 있으니 잘 떼지지도 않는다.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칼과 헤라, 쇠솔 등을 들고 벽에 붙어 끙끙거린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콜트콜텍 해고자, 지하철 노동자, 동양시멘트 비정규직, 기륭전자분회, 파인텍지회 등 십여 년을 거리에서 싸워온 노동자들이다. 광장을 누빈 박근혜와 재벌총수 흉상을 만든 파견미술팀, 사진가와 작가, 시인, 비없세 활동가들까지 농성장과 거리에서 만나던 이들이다. 농성장과 거리에서 만나던 이들이 오늘은 철거현장에서 공구를 들고 만났다.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 리모델링에 몸과 마음으로 연대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비정규노동자의 쉼터 건립 제안은 2015년 7월, 기륭전자 10년 투쟁 평가 자리에서 나왔다. 기륭투쟁 10년을 마무리하면서 제출된 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비정규직 보호법이 아니라 비정규법제도 자체를 폐기하기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정규노동자들의 쉼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마음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공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새 투쟁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랑방, 기반도 연대도 부족한 비정규운동의 틈새를 메우는 기지, 비정규노동자들의 연대 투쟁의 고리가 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결국 사회적 모금을 통해 2016년 상반기에 쉼터를 개소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출처: 자료사진]

박근혜만 없었어도

생각보다 일은 더뎠다. 박근혜 때문이다. 평가 토론회가 끝나자마자 기륭분회와 토론회에 함께한 이들 대부분이 박근혜 정부의 노동시장구조개혁에 맞선 투쟁에 ‘올인’했다. 기륭분회 조합원들은 노동개혁이 개혁인지 재앙인지를 국민들에게 직접 묻는 ‘을들의 국민투표’ 실무자로 결합했다. 매일같이 민주노총 건물로 출근해 투표함을 포장하고, 사회단체들을 만나 투표에 함께해줄 것을 제안하고, 공단과 거리로 투표를 독려하러 다녔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쉼터 건립은 뒷전이었다. 국민투표가 끝난 2015년 12월이 돼서야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시민사회단체가 함께하는 ‘비정규노동자의 집 추진위원회’를 발족할 수 있었다.

개소일정은 수정됐지만 비정규노동자의 집 건립을 사회적으로 알리자 곳곳에서 따뜻한 마음들이 모였다. 첫 세례 봉헌금을 모아 보내 준 중학생, 한 달 치 아르바이트 월급과 연말보너스 전액을 보내준 노동자, 쉼터 주춧돌 기금 영수증을 딸 결혼 선물로 주시는 어머니 등 상상도 못했던 후원이었다. 백기완 선생님과 문정현 신부님도 쉼터 건립에 힘을 보태겠다며 소중한 서각과 붓글씨를 내주셨고, 기자들은 비정규직특별잡지 ‘꿀잠’을 발행했다. 열 달 남짓한 기간 동안 5억 원에 가까운 기금이 모이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건물을 알아보러 동분서주 하던 중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됐다. 한 장 한 장 쌓던 벽돌을 쌓으며, 집터를 닦던 때였기에 고민이 깊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꿈과 소망이 담길 집을 만들자고 하면서 박근혜의 국정농단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11월 4일, ‘꿀잠’을 준비하던 마음으로 광화문광장에 텐트 하나씩을 들고 나왔다. 박근혜가 퇴진할 때까지 광장을 지키고, 시민들과 함께하겠다며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을 꾸렸다. 말이 텐트촌이었지 작은 텐트 하나에 기대어 잠을 청하는 노숙이었다. 매서운 겨울. 폭설에 무너진 텐트를 일으켜 세우며, 비바람이 들이쳐 온 몸이 젖어도, 백색테러의 위협으로 잠 못 이루면서도 박근혜가 없는 봄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142일을 버텼다.

‘꿀잠’ 함께 만들어요

박근혜가 물러난 후에야 ‘꿀잠’건립은 재개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4층 건물 하나 매입했다. 매입비용만 11억. 전세 계약이 끝나지 않은 2~3층 보증금을 빼도 돈은 턱없이 부족하다. 대출을 받아 어찌어찌 건물을 매입했지만, 리모델링과 필요한 물품을 구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2억5000만 원 남짓한 비용이 든다. 이에 쉼터 제안 초기부터 함께 해주셨던 건축가들이 사회적 구축방식으로 건물을 짓는 방식을 제안했다. 기금을 마련해 전문건설회사에 맡기는 방식에서 벗어나, 여럿이 함께 모여 “우리 집을 우리 손으로(Self-Helf)”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이제 막 철거를 마친 ‘꿀잠’은 6월 중순까지 리모델링을 거쳐 문을 연다. 개소한 쉼터의 옥탑에는 텃밭과 함께 4인실 쉼터와 샤워실이 있다.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보니 벤치를 설치해 야경을 구경하며 쉴 수도 있고, 편안하게 간담회를 갖거나 사랑방처럼 담소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4층에는 4인실 쉼터 3개가 있다. 장기노숙투쟁 중이거나 하루 종일 밖에서 땀 흘리고 들어오는 이들을 고려해 신발장은 밖에 설치할 것이다. 샤워실과 거실은 물론이요, 빨래 등을 널 수 있는 긴 발코니도 있다.

‘꿀잠’은 쉼터임과 동시에 비정규운동을 단단하게 다지고, 힘을 응집하는 기지가 될 것이다. 국민투표를 제안하던 마음으로, 광화문에 텐트를 쳤던 각오로 만드는 집이다. 작지만 아담하고 아름다운 집, 비좁더라도 웃음과 사랑이 충만한 집.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문턱과 이 세상에서 가장 멀리 있는 별을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을 함께 가진 집. 쓰러지기 위해 들어오는 집이 아닌, 일어서기 위해 들어오는 집. 열차에 치어 죽고, 바다에 빠져 죽고, 건물에서 떨어져 죽고, ‘욕받이’ 부서에 배치돼 고통 받다 죽는 이들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집이 바로 ‘꿀잠’이다.[워커스 31호]

* ‘꿀잠’의 리모델링에 함께해주세요. 기술연대, 시간연대, 기금후원 등으로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기술・시간 연대 신청 : cool-jam.kr, 꿀잠 후원 : 우리은행 1006-701-442424 사단법인 꿀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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