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시평] 7.8.9 노동자 ‘인간선언’과 사회적 총파업

87년 6월 항쟁과 7.8.9노동자대투쟁이 30주년을 맞는다. 30년 전 6월은 3저 호황과 유화기 국면이었다. 평화적 권력승계를 약속했던 전두환은 돌변하여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고, 이에 맞서 야당과 민중진영은 직선제 개헌을 당면 목표로 하는 반정부 투쟁을 본격화 하였다. 전두환은 권력의 재생산을 위해 대통령직선제보다 내각제 특히 이원집정부제를 선호하였다. 이 전략은 야당에 대한 분할지배전략이었다. 내각제라는 당근을 통해 야당 내부의 세력을 분리시키는 전술을 구사하면서 재야로 불리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4.13조치 이후 군부독재세력과 반독재연합간의 민주주의 쟁점은 전면적 대결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6월 9일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살해되고, 6.10대회를 경과하며 거리로 뛰쳐나온 노동자 민중은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시위를 강경 진압하는 경찰에 맞서 짱돌과 화염병으로 공권력을 무력화시키고 경찰서까지 공격하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6월 항쟁’에서 노동자들의 투쟁도 빼놓을 수 없다. 넥타이부대로 상징되는 사무직 노동자들과는 달리 생산직 노동자들의 참여는 지체되었는데, 그 이유는 80년대 중반까지 노동자투쟁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쟁이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공단지역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노동자 참여가 나타났고 지역에 따라서는 노동자들이 항쟁을 주도하는 모습도 보였다. 6월 10일과 26일에는 인천, 성남, 안양, 부산, 목포, 포항, 광주, 이리, 마산 등의 지역에서는 공단지역을 중심으로 퇴근시간에 노동자들이 참가하며 파출소, 경찰서, 노동부사무소가 화염병과 투석으로 부서졌으며, 노동자들은 노동3권 보장, 저임금 박살의 구호를 외치며 투쟁에 참여하였다.

[출처: 민주노총]

노동자계급 배제한 6.29 협약

6월 26일까지 500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되는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밀린 전두환정권은 4.13조치를 철회하고 대통령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에는 △대통령직선제 △시국관련 사범 석방과 사면복권 △언론의 자율성보장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보장으로 요약된다. 이 조치는 신군부의 정치적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6월 항쟁’의 투쟁동력을 소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야당과 합의한 6.29협약에는 직선제로 부각되는 정치적 자유와 선거법개정, 언론의 자율성은 담겨있으나 직접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민주적 권리를 규정하는 어떠한 의미 있는 조처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7월부터 시작되는 노동자 대투쟁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6월 항쟁을 통해 자각된 노동자계급의 민주화의식이 ‘6․29선언’이라는 정부여당의 전술후퇴 정세를 타고 노동자계급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6.29선언’ 직후부터 시작된 노동자투쟁은 울산에서 점화되어 거대한 들불이 되어 전국을 휩쓸었다.

7.8.9노동자대투쟁은 그동안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 및 ‘폭력적 노동통제’ 속에서 고통 받은 노동자들이 현장으로부터 일어난 자주적이며 자발적 투쟁이었다. 대부분의 투쟁사업장에서는 ‘노동력의 대가(임금인상)와 인간적 대우’를 요구하며 권위주의적 관리체계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이라는 생존권 투쟁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들의 조직인 노동조합 결성, 어용노조 민주화를 포함한 노동3권을 쟁취해야 한다고 자각하며 담장을 넘어 지역연대투쟁을 확장해 나갔다. 이는 이익갈등의 측면을 넘어서 노·자간 역학관계를 재편시키는 것이기도 하였다.

7.8.9. 노동자들의 ‘인간선언’

1987년 7.8.9노동자대투쟁은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이 형성된 이후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진 노동자들의 ‘대중적, 계급적 진출’이었다. 노동자대투쟁은 3개월 만에 끝난 투쟁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을 예고하는 장엄한 역사이며 출발이었다. 1987년 여름, 전국을 뒤흔든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의 외침은 그동안 한낱 기계의 부속품으로밖에 취급되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이었고 1970년 전태일 열사정신의 부활이었다. 노동자대투쟁은 민주노조를 구축했고, 민주노조는 천만 노동자의 ‘희망’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운동의 자생적인 동력을 복원하여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어용 한국노총에 의해 지배되어오던 노사관계를 변화시켰고,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이나 재야세력, 그리고 학생운동이 주도해오던 사회운동에서 노동운동이 주도하는 변혁운동으로 변화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노동자대투쟁은 전지역·전 산업에 걸쳐 일어난 최대 규모의 노동자 대중투쟁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투쟁이 노동법의 울타리를 넘어 ‘선파업 후협상’이라는 법을 무시한 투쟁이었으며, 격렬함에 있어서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투쟁이었다. 노동자 대투쟁은 숱한 성과를 남겼지만, 그에 상응하는 한계와 과제도 남겼고, 그 과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30년을 경과한 지난 해, 국정농단을 심판하는 광장투쟁의 역사가 재현되었다. 그 투쟁의 정치적 성과는 박근혜 탄핵과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집권하는 양상으로 변화됐으나 노동자계급의 처지는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경과하며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 공세는 그 강도를 갈수록 높여 노동자계급을 벼랑 끝으로 내 몰았다. 자본의 변화된 통제기법은 노동자계급 내부의 위계화와 대립구도를 만들었다. 나아가 같은 노동자를 정규, 비정규라는 이분법적 고용형태로 불안정노동을 가속화시키며 노동자를 포섭과 배제의 대상으로 구분관리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노동자계급의 빈곤화로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계급 몫으로 남은 촛불투쟁의 계승

87년 노동자대투쟁은 ‘6월 항쟁’의 계승인 동시에 연장이었듯이 2017년 광장 촛불투쟁의 계승은 노동자계급의 몫으로 남아있으며 그 첫 번째 몫은 당면한 ‘사회적 파업’이다.

민주노총이 확정한 사회적 파업의 5대 요구는 △최저임금 1만원 쟁취 △비정규직철폐·저임금타파 △재벌체제 해체 △사회공공성강화 △노조 할 권리쟁취가 핵심 요지이다. 당연한 요구와 투쟁계획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파업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긍정적이지는 않다. 비판의 근거들은 ‘최저임금1만원으로 올리면 나라가 망한다’, ‘문재인정부가 비정규직을 없애겠다는데 왜 투쟁을 하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벌을 해체할 수 있는가’ 등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노동자들의 처지와 상황에 대한 내면을 애써 안 보려는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의 최저임금 수준은 OECD 회원국 중에서 최하위 그룹에 속한다. 평균임금과 대비한 최저임금의 상대적 수준도 OECD 회원국 중 최하위 그룹이다. 한국의 최저임금은 빈곤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에는 매우 형편없는 수준이다. 따라서 최저임금을 미래의 과제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나아가 비정규를 정규직화 한다는 조치도 완전한 정규직이 아니라 무기계약직으로서 허울만 정규직일 뿐, 결코 노동자의 빈곤을 해결할 대안은 아니다.

민주노총의 이번 총파업은 조직노동자들의 과제라기보다는 비정규, 미조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렴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때문에 사회적 총파업은 당면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고 노동자계급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계기로 만들어 내야한다. 그리하여 위기의 민주노총이 천오백만 노동자들의 ‘희망’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87노동자대투쟁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총파업을 조직할 책임은 민주노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정치조직과 사회단체들이 함께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적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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