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의 바보같은사랑](94) 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 비정규직 이성호·전영수 씨 고공농성투쟁 ④ 82일 차 이야기

[필자 주] 지난 4월 11일, 현대미포조선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노동조합(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고용승계에서 제외되어 해고를 당한 이성호․전영수 씨가 울산 북구 염포동 현대중공업 출근길에 있는 성내삼거리 인근 20M 교각에 올랐습니다. 이들이 블랙리스트 철폐와 하청노동자 노동기본권 보장, 대량해고 중단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시작한지 7월 10일로 91일 차가 됩니다. 여름 무더위와 장마 속에 힘겨운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많은 관심과 연대를 부탁드립니다.

  [출처]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정말 반가운 분들이 오셨어요

“울산에는 비가 오나요?”

7월 첫날, 저녁이 되자 비가 내린다. 일주일 만에 다시 울산 고공농성장에 안부를 묻는다.

“비가 왔으면 좋겠는데, 안 오네요.”

전영수 씨가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요즘도 뻐근한 허리 통증이 계속 있어 스마트폰으로 찾은 허리근력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80여 일 고공농성 중에 의사 진료는 한 번 있었다. 기계를 들고 올라올 수 없어 간단한 혈압 측정이나 청진기 진료만 했는데, 진료보다 땅에서 온 사람과 대화를 하고 마음의 위로를 받는 게 더 기억에 남는 일이다.

“늘 비슷합니다. 일어나서 운동하고 밥 먹고 선전전 하고... 이번 주에는 보고 싶었던 반가운 분들이 오셨어요.”

“아... 그랬어요? 누가 오셨는데요?”

“비밀입니다. 다음에 얘기할 걸 남겨두어야죠. 정말 반가운 분들이 오셨어요.”

누가 왔는지 궁금했지만, 참기로 한다. 영수 씨가 처음 교각에 올라올 때, 달력 3장이 넘어갈 때까지 이곳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또, 하청노동자들이 일하는 현장이 이렇게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밑에서 손 흔들어주는 분들 많아요. 경적을 울려주고 가기도 하고요.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현장은 점점 죽어가요. 우리가 하는 일(노동조합)이 이상한 건가요?”

영수 씨는 열악한 하청 노동자들의 현실에도 하청노동자들 스스로 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을 많이 이야기했다.

  이성호.전영수 씨 고공농성 82일 차 장면 [출처] 금속노조 울산지부 이한별 조직부장

소주 원 샷에 왕소금 안주를 먹던 노동자들

고향이 부산인 전영수 씨는 학교 공부를 마치고 넥센타이어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그가 졸업할 즈음 시작된 IMF 외환위기로 인해 한동안 실직자로 살다가 2000년에 어렵게 구한 일자리였다. 일을 하면서 병행하던 사업에 실패하고 3년 만에 다시 실직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2003년 말, 부산 신평 염색공단에 있는 염색공장에 입사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실 염색하는 일을 했다. 주야 2교대 근무를 하는 사업장인데, 첫 월급이 70만원이었다. 최저임금 사업장이었다. 보너스 200%가 있었지만, 주고 싶으면 주고 주기 싫으면 안주는 곳이었다. 20년 된 숙련공이나 부장급 이상의 급여가 200만 원 정도 되었던 기억도 있다. 몸에 해로운 염료를 사용했지만, 마스크와 안전화를 주지 않았고, 작업복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8시에 출근해서 5시에 8시간 근무를 마치고 두 시간 동안 의무 잔업을 했는데, 5시에 퇴근하려면 조퇴계를 내야했다. 노동자들은 시키는 대로 일만 했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공장 근처 작은 가게에 거기서 일하시는 분 두 분이 앉아 계신 걸 봤습니다. 소주 한 병을 절반씩 잔에 나누어서 원 샷을 하고 왕소금 찍어먹고 가시더라고요. 제 부모님 연배이신데, 그렇게 해서 자식들을 키우셨겠죠. 그리고 그 자식들은 지금 비정규직으로 살고 있을 테고요. 지금도 그렇게 생활하실 지도 몰라요. 어쩌면 회사가 없어졌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어디서 생활하실까? 가끔 생각이 납니다. 계란 한 개 소주 안주 한 번 못 사드린 게 지금도 마음 아픕니다.”

영수 씨는 그 당시에 염색 기술자라고 그분들을 무시했던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더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염색공장에서 일하던 전영수 씨는 2005년 STX에서 물량팀장을 하던 큰 형이 “1년만 하면 한 달에 300만원 벌 수 있다”고 하는 말에 솔깃해서 STX 하청업체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조선소와의 질긴 인연이 시작되었고, 그는 도장 전 마지막 공정인 물량팀 건조 공정에서 일을 했다.

“8시에 출근해서 7시까지 일 했어요. 어떨 때는 점심을 못 먹고 일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처음 6~7년 동안은 주말에 거의 쉬어본 적이 없어요. 일요일 날 쉬면 그게 더 이상하더라고요. 그렇게 일하면서 1년을 보냈더니 300만원 주더라고요. 그땐 뭐가 좋다고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돈은 벌었지만, 몸은 많이 망가졌거든요.”

사람이 죽어도 10분 만에 일 시키는 미친 회사

전영수 씨는 2011년에 울산 미포조선으로 일터를 옮겼다. 역시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이었고, 이곳에서 그는 퇴직금과 연차가 있는 본공으로 일하게 된다. 기존 물량팀에서는 퇴직금 없이 오로지 일당만 받았었다. 미포조선이 단가가 세다는 소문에 기대감을 갖고 갔는데, 이곳 역시 만만치 않게 일이 많았다. 한 달에 평균 300~320시간 정도 일했다. 일하다가 위에서 12.5kg 공구가 떨어져 허벅지와 어깨를 다친 적도 있다. 산재는 생각도 못했고, 업체관리자가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를 받았다. 업체는 치료비는 주지 않고, 일당만 70% 정도 주었다.

“STX에 있을 때, 2주일 동안 7명이 죽은 적도 있었어요. 그런 거 보고 미포에 온 겁니다. STX는 그래도 사람이 죽으면 일은 안 시켰어요. 다른 공정 사고라고 해도 올 스톱 하고 안전교육을 받거나 퇴근을 시켰습니다. 정규직이 죽으면 종일 교육받고, 하청업체 노동자가 죽으면 몇 시간 교육을 받을 때도 있었죠. 근데 미포조선이나 현대중공업은 사람이 죽어도 일을 시킵니다. 작년에 정규직 한명이 돌아가셨는데, 10분 안전교육을 하고 다시 일 시킨 적도 있어요. 미친 회사입니다. 어떻게 1시간도 아니고 10분 만에... ‘내가 안 죽어서 다행이다’ 그 생각만 하는 거죠. 그런 현장이 너무 싫었습니다.”

영수 씨는 조선소 일은 사람 인력이 좌우한다고 이야기했다. 조선소는 자동차 제조 회사처럼 기계화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사람이 공구를 이용해서 작업해야 한다. 조선소 일은 기계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오직 몸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현장보다 사람 대 사람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인데, 지금은 조선소 노동자들이 사람으로 인정을 못 받고 있잖아요. 일하는 사람의 숙련도가 필요한 곳인데, 기술자를 해고하고 새로운 사람이 그 일을 하게 하니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겁니다.”

일이 힘들고 위험하다 보니 한국인들은 기피하는 노동 현장이 되었고, 그 자리를 이주노동자들이 채워가고 있다. 방글라데시, 미얀마, 라오스, 스리랑카, 중국, 베트남,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등 국적도 다양해지고 있다.

“조선소가 글로벌화 되고 다양화 되고 있어요. 최근에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하청업체 물량팀장을 하기도 합니다.”

관리자로 승진하는 일부 이주노동자들도 있지만, 불법체류나 산업연수 등의 조건을 이용한 차별도 분명 있을 거라고 했다.

비정규직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조선소

“그렇게 힘들게 일했던 조선소에 다시 복직해서 일하고 싶으세요?”

“해야죠... 열심히 일 하다가 죽는 현장이 아니라 비정규직이 안전하게 일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조선소 현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안전해도 힘든 곳이 조선소에요. 저는 여기서 일하면서 직접적으로 피해본 적이 없어요. 정말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최고 단가도 받아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그것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족쇄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었다. 아무 때고 나가라면 나갈 수밖에 없는 하청노동자의 삶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 그도 법에서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인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해고가 되었다. 해고라는 낭떠러지에서 그는 울산 성내삼거리 20미터 교각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청노동자들은 회사를 믿지 않아요. 고의로 4대보험을 체납하고, 소득신고도 정확하게 하지 않아요. 연말정산 하는 것 갖고도 장난을 칩니다.”

전영수 씨는 연말정산과 관련하여 동일한 서류를 제출하였음에도 회사에서 한 것과 개인적으로 한 것에 20여 만 원 차이가 났던 경험을 들려준다. 영수 씨는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하청노동자들 자신의 힘과 이들의 단결이라고 했다.

  이성호 씨의 글을 읽고 밑에 있던 조합원들이 올려준 식물 [출처]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하청 동료들 쪽 안 팔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마무리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물으니 밑에서 고생하는 조합원들과 연대 동지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 같이 잘 싸워서 성과가 나면 좋겠지만, 쉽게 바뀌진 않을 것 같아요. 밑에서 너무 큰 기대는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영수 씨가 정말 간절하게 바라는 건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하청 동료들 쪽 안 팔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대로 목소리 내고 자기 생각 제대로 펼쳐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스스로 힘없다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하청노동자 한분 한분의 힘이 엄청나게 큰데 과소평가 하고 있는 겁니다. 노동조합 대단한 거 아닙니다. ‘나는 사람입니다. 나는 안전하게 일하고 일한만큼 대우받고 싶은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입니다.’ 그 얘기를 하는 거죠. 그 당연한 걸 함께 하고 싶습니다.”

땅에서 생활하지 못하는 답답한 점을 물으니 밑에서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는 게 많이 답답하다고 한다.

“쉬는 날엔 2~3시간 정도 등산이나 걷기 같은 운동을 했는데, 그걸 못하고 있네요. 스포츠 보는 걸 좋아해서 퇴근하고 집에서 술 한 잔 하면서 TV 보는 것도 즐거움이었는데...”

그 외 좋아하는 음악을 자유롭게 듣지 못하는 것, 텔레비전 큰 화면으로 생방송을 보지 못하는 불편함도 이야기한다. 지극히 소박한 일상에 관한 답답함들이다.

전영수 씨와 함께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이성호 씨가 “흙과 식물이 기억에서 멀어져 간다”는 글을 올리자 밑에 있던 조합원들이 땅에서 자라는 식물을 선물로 올려주었다. 이성호․전영수 씨가 기쁜 마음으로 그리운 땅을 밟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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