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흔해 빠진 먹는 이야기

[워커스] 아무말 큰잔치

[출처: 자료사진]

1.

며칠 전, 집에 동료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해먹었다. 메뉴는 조개 술찜과 토마토 파스타였다. 시장에서 조개를 한 봉지 샀다. 소금물에 담가 해감을 하고 조개껍데기에 묻은 펄을 칫솔로 일일이 닦아냈다. 마트에 가면 세척은 물론 해감까지 완벽히 해서 포장해 놓은 ‘상품’들이 널렸지만 굳이 펄이 묻은 조개를 샀다. 우리 고장에서 나는 토마토를 골라 몇 시간 동안 졸여 소스를 만들었다. 냄비 앞에 서 있는 몇 시간 동안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먹는 사람들은 내 이런 고생을 몰랐겠지.

가급적이면 패스트푸드나 외식 대신 집에서 직접 음식을 해 먹으려 노력한다. 직접 재배한 풀을 뜯어 밥상에 올리진 못하지만 되도록 가까운 곳에서 자란, 누가 어떻게 키웠는지 알 수 있는 풀과 고기를 쓴다.

회사 구내식당 벽에는 동학 교주 최시형이 남겼다는 경구가 붙어있다. ‘밥 한 그릇을 잘 먹으면 만 가지 일을 알게 된다.’ 먹는 일이란 결국 내가 자연에 의탁하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라는, 밥 한 그릇은 결국 내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는 일이라는, 그러니까 일종의 생태주의 철학이다. 먹는 것을 생각하다 보면 공장에서 눈만 껌벅이다 죽어간 동물들에 생각이 미치게 되고, 산에서 채취한 나물의 성기고 거친 뿌리에 담긴 시간을 귀히 여기게 된다.

자본주의는 과정을 소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철저한 분업. 무엇이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를 감춰두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노동이 어디에 어떻게 투여되고 어떤 결과물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온전히 자신을 이루던 삶을 쪼개, 삶을 이루는 많은 것들이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 배달된다.

밥상도 마찬가지다. 어디에서 자란 풀이 누구의 손에서 가공돼 어떤 곳을 거쳐 판매되고 어떤 방식으로 조리돼 지금 내 앞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음식을 해 먹는 노력은 소외된 과정에 다시 집중하려는 노력이다. 내가 먹는 것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내 몸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 사실 돌이켜보면 어릴 적 어른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밥상머리 교육’도 그런 의미였다. 농부가 여든여덟 번은 손길을 줘야 만들어진다는 쌀 한 톨의 이야기. ‘네가 먹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먹으렴.’

2.

수제 과자와 케이크를 파는 친구가 있다. 하루는 작업실에 놀러 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파티셰들은 죄다 우아하고 세련됐길래 걔도 그럴 줄 알았더니 밀가루 범벅에 손에는 화상 자국이 그득했다. 땀도 뻘뻘 흘리고. 가공된 이야기라는 것이 밝혀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화 중 전설의 레전드는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민중에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대꾸한 일이다. 사실 이 일화에서 팩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계급이 부여한 삶의 조건이다. 딱히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어도 귀족들은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민중에게 ‘그럼 과자를 먹으라’고 말했을 테다. 그들에게 빵과 과자는 그저 하인들이 주방에서 들고 오는 것일 테니까.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 어느 집에서 어떻게 태어나 무엇을 보고 배우며 자랐냐에 따라 사람의 의식이 달라진다. 교과서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자유 의지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삶의 조건이 의식과 언어를 집어삼킨다. 밥상머리는 그런 의미다. 삶의 결을 만들어 주는 일. 매일 마주하는 것들, 삶의 가장 근본인 ‘밥’ 앞에서 건져 올리는 의식과 언어.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권력자들이 뭔가 특별히 의도해서 ‘빵이 없으면 과자를’이라고 말한 게 아니라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자라났던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밥상머리엔 빵과 과자가 만들어지는 과정, 땀을 흘리며 밀가루를 반죽하고 오븐에 손을 데는 과정, 노동이 생략되기 때문이다.

3.

‘밥하는 동네 아줌마’를 운운했던 국회의원이 있다. 삼성의 법무팀에서 일하던 변호사 출신인 그녀에게 밥 짓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먹을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소외했고 먹을 것을 만드는 이들을 소외했다. 결국, 공산품처럼 예쁘게 플레이팅 된 파편만을 먹거리 전체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밥상머리엔 과정을 소외한 파편화된 세계만이 있다. 삼성 법무팀만 중요해 보이는, 어쩌면 21세기 대한민국의 마리 앙투아네트. 하여 그녀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실은 삶의 본질이고 그가 의존하고 있는 세계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밥은 만든다고 하지 않는다. 밥은 ‘짓는다’고 한다. 짓는다는 건 삶을 이루는 바탕이 되도록 새롭게 일으키는 몸짓이나 모습이다. ‘먹고살다’는 말은 한 단어다. 띄어 쓰지 않는다. 삶이란 먹는 일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의미다. 살기 위해선 어떻게든 입을 벌려야 하고 무엇이든 입안에 채워 넣어야 한다는 말이다. 먹는 이야기는 결국 가장 흔해빠진 이야기지만 그만큼 삶의 근원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야기다.[워커스 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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