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은 평생 쌓는 거란다

[워커스 이슈] 1997.1121.20000.982



부동산 중개업자 송윤숙

부동산 불패신화에 힘입어 공인중개사가 됐다. 부동산 개업 후 그럭저럭 먹고 살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거쳤던 업종과 직종을 통틀어 가장 나았다. 재정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송윤숙(58) 씨에게 부동산을 추천한 사람은 친언니였다. 처음에는 영 탐탁지 않았다. 남의 돈 해 먹는 것 같잖아. 송 씨의 반응에 친언니는 면박을 줬다. 지금 찬 밥 더운 밥 따질 때냐고. 맞는 말이었다. 억척스럽게 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송 씨의 삶은 늘 외줄타기 하듯 불안하기만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커가는 세 아이도 눈에 밟혔다. 마음을 다잡고 학원과 집을 오가며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 했다. 그 때 그녀의 나이 마흔 일곱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 못할 짓 하는 것 같아 괴로웠다. 책과의 싸움보다 죄책감과의 싸움이 더 힘들었다. 시간을 빨리 단축시켜야 했다.

결국 일 년 만에 자격증 시험에 붙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사실 송 씨가 성인이 된 후 가장 긴 세월 몸담은 곳은 한국 통신(현 KT)이었다. 그는 원래 목소리로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20대 초반부터 40대 중반까지, 꼬박 23년 간 한국통신에서 교환원 일을 했다. 처음에는 평생 이 곳에서 먹고살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회사는 그의 소박한 바람을 ‘욕심’이라 비난했다.

잔잔했던 송 씨의 삶을 뒤흔든 건 IMF 외환위기가 불어 닥치면서였다. 경제위기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던 1998년. 한국통신은 악랄한 구조조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 해 1천 명을 감축했고, 3년 만에 노동자 1만 명을 퇴출시켰다. 송 씨는 사내 커플이었다. 회사에서 남편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했다. 부부사원은 퇴출의 표적이었다. 특히 회사는 부부사원 중 여성노동자를 내쫓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둘 중 한 명은 그만둬야 한다’는 협박이 시작됐고, 그래도 안 되면 남편의 승진을 미끼로 여 사원의 퇴직을 종용했다.

송 씨는 버티기로 했다. 회사에 굴복한 사람들은 마음 약한 사람들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독해져야 했다. 이런저런 회사의 괴롭힘에 치고 박고 싸우며 날을 세웠다. 갈등이 반복되니 괴롭힘도 잦아들었다. 처음에는 회사가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회사는 조금 더 세련되고 체계적인 괴롭힘을 준비하고 있었다. 회사는 송 씨의 업무를 아웃소싱하기 시작했다. 교환원으로 있던 동료들이 아웃소싱 업체로 각출됐다. 송 씨는 이번에도 버텼다.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만큼 배제되고 소외되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남은 사람들은 외롭게 밥을 먹었고, 다른 사람들과 말도 섞을 수 없었다.

송 씨의 업무는 매번 바뀌었다. 정해진 업무 없이 주어진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구조조정 3년째인 2003년. 송 씨는 회사에서 버티는 게 지겨워졌다. 민영화 이후, 사람 자르는 데만 혈안이 돼 있는 회사가 무슨 비전이 있을까 싶었다. 결국 회사가 이겼다. “당신은 끝까지 버텨.” 남편을 남겨두고 송 씨는 회사를 나왔다.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은 채였다.

세 아이를 키우려면 어떻게는 맞벌이를 해야 했다. 하지만 재취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장사를 해 보자 마음을 먹었다. 곱창전골 식당을 차렸다. 자영업자는 넘쳐났고, 덩달아 거리에는 식당들이 넘쳐났다. 그저 그런 노하우로는 자리 잡기가 힘들었다. 파는 음식보다 버리는 음식이 많았다. 쓰레기통에 음식을 쏟아버릴 때 마다 독하게 버텼던 지난 23년의 세월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적자폭이 늘어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손해를 떠안은 채 2년 만에 식당을 접었다.

송 씨는 그래도 자신이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생각했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고, 포기한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같이 일했던 교환원 중에는 여성 가장도 있었고, 남편 사업 빚을 갚기 위해 퇴직금을 받아가던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생각하면 그저 까마득하기만 하다.

남편은 여러 수모를 겪으면서도 회사에서 버텼다. 기술직이 었던 그의 업무도 여러 번 바뀌었고, 생전 처음 영업이라는 걸 하기도 했다. 힘들어하는 그에게 ‘나도 고군분투 하고 있어’라며 모진 소리를 했다. 얼마 전 퇴직을 한 남편에게 ‘고생했어, 이제 그만 쉬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모질고 위태로웠다. 그리고 아직 버텨내야 할 시간은 너무도 길다.


대기업 대외활동 도전자 신형민

벌써 세 번째 낙방이었다. 대학교 4학년 신형민(26, 가명) 씨의 한숨이 깊어졌다. 3인 1조로 진행되던 최종 면접에서 서럽게 울던 한 지원자가 자꾸 떠올랐다. 그는 저번에도 떨어졌는데, 이번엔 꼭 붙어야 한다며 면접관들에게 울며불며 매달렸다. 나도 그렇게 해 볼걸 그랬나. 삼 세 번 도전에 실패한 신 씨 역시 여유로운 상황은 분명 아니었다. 신 씨의 눈물겨운 도전기는 대기업이나 공기업 채용 같은 것이 아니었다. 기업 대외활동 응시가 매번 신 씨의 발목을 잡았다.

대외활동이라 함은, 취미나 취업 활동 등을 위해 사람들과 여러 분야에서 모임을 갖는 것을 일컫는다. 일례로 대학생 기자단이나 서포터즈, 마케터, 홍보대사 등의 활동이 주축을 이룬다. 취지나 내용만 놓고 보면 그저 그런 ‘취미활동’의 일환 같지만, 신 씨를 비롯한 일명 ‘취준생’들은 대외활동에 목숨을 건다. 이력서에 한 줄 채워 넣기 위해서다. 이런 식의 ‘이력서 한 줄’ 싸움은 꽤나 치열하다. “무슨 대외활동 경쟁률이 대기업 입사 경쟁률만해요.” 신형민 씨가 헛웃음을 쳤다.

사실 신 씨는 기업 대외활동에 별 흥미가 없다. 쥐꼬리만 한 간식비로 과자부스러기를 사 먹으며 열정을 갖다 바치는 짓이 영 못마땅했다. 하지만 대외활동이 하나의 취업 코스가 돼 버린 이상 무작정 무시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가 최근 떨어진 대외활동은 유명 공기업 대외활동이었다. 유통업계에 취업하고 싶은 그로서는 내키지 않은 활동이었다. 하지만 기업은 경력직만 뽑았고, 신입은 어떻게든 경력을 쌓아야 했고, 경력을 쌓을 곳은 대외활동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외활동 이력이 있는 사람만 또 다시 대외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신 씨는 대학에서 경영학과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학점도 꽤 높은 편이다. 지난 학기엔 성적우수장학금도 받았다. 하지만 이 정도 스펙으로 어림도 없다는 건 하늘도 알고 땅도 안다. 유통업계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토익, 토플이나 HSK(중국어수평고시) 정도는 마스터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시험은 ‘정보력’에서 승부가 났다. 월 30만 원이 넘는 학원에서는 수강생들에게 출제 경향 분석을 통한 체계적인 데이터를 제공했다.

신 씨는 남들보다 기회가 적었다. 그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외활동을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고, 어학 능력 시험을 보기엔 돈이 부족했다. 학점도, 대외활동도, 어학 능력 시험 성적도 모두 돈과 시간에 비례했다.

신 씨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인생이 남들보다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집안 사정이 급격하게 기울었다. 자가 소유였던 행신동 집도,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자동차도 사라졌다.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어머니는 옷을 떼어 파는 일을 하다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어머니의 옷가게는 점점 대형 마트와 백화점에 밀렸다. 결국 어머니는 홈플러스와 백화점 일자리를 전전했다.

신 씨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등록금을 벌어야 했다.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백화점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현재 그가 백화점 아르바이트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월 47만 원 정도다. 높은 등록금과 낮은 취업률, 그보다 더 낮은 최저임금. 곤궁함은 여간해선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진 삶의 기울기는 언제나 버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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