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의 복지는 안녕한가요?

[워커스 이슈] 1997.1121.20000.982



요양보호사 권옥자

이번에는 적성에 꼭 맞는 일이지 싶었다. 자신처럼 늙어가는 노인을 돌보는 일은 꽤 의미 있었다. 돈만 밝히는 회사를 위해 충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오랜 시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으니, 과거의 상처와 분노를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 2010년, 청주시노인전문병원에 입사한 권옥자(63) 씨는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으로 인생 2막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로부터 6년 뒤. 권 씨는 청주시청 앞마당에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28일째 단식을 하는 통에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분신을 시도한 권 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됐다. 당시 그의 나이 62세. 청주시노인전문병원에서 해고된 상태였다. 오랜 시간 돌고 돌아, 권 씨는 또다시 같은 자리를 서성이고 있었다.

온 사회가 외환위기로 얼어붙었던 90년대 후반. 권 씨는 미국 자본 한국아프라이드 매그네틱스(AMK)에서 생산직 노동자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컴퓨터 헤드를 조립 하는 일을 했다. 직원 350명 규모의 공장에서 남성 직원은 모두 관리자였고, 여성 직원은 모두 생산직이었다. AMK는 1934년 부터 한국에 진출한 꽤 유서 깊은 회사로, 서울과 춘천, 청주 등 3곳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외환위기가 찾아오자 공장에 일감이 늘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 분위기는 이상했다. 무리한다 싶을 정도로 신입사원들을 뽑아댔다. 그런 뒤 무급휴가를 보냈다. 회사가 미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회사는 또 다시 신입사원을 뽑아놓고, 무급휴가를 보내는 이상한 행동을 반복했다. 권 씨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당시 정부는 외환위기로 급증한 실업률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노동자를 신규채용한 중소기업에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었다.

외환위기의 여파 속에서도 회사는 그럭저럭 운영됐다. 하지만 2000년, 설을 쇠고 회사에 복귀한 노동자들은 회사가 망했다는 뜬금없는 통보를 받았다. AMK는 미국 내 모기업이 부도가 났다며 회사를 부도내버렸다. 노동자들에게는 퇴직금의 50%정도 밖에 지급하지 않겠노라 통보했다. 공장을 폐쇄하고 춘천공장을 시작으로, 서울과 청주 공장을 차례로 철수시켰다. 직장폐쇄를 단행하는 과정에서 회사는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 세금 반환 정책을 이용해 총 56억 원을 정부로부터 돌려받았다. 그리고 공장은 인도네시아로 이전했다. 5년 3개월간 몸담았던 권 씨의 일터는 그렇게 사라졌다.

권 씨를 비롯한 노동자들은 고용승계와 퇴직위로금 지급을 요구하며 132일 동안 천막농성을 벌였다. 네 달 넘게 길 위에서 생활을 하고 나니 온 몸에 골병이 들었다. 하지만 누워만 있을 순 없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남편은 일감이 없어 허덕이고 있었다. 고등학생, 대학생이 된 자녀한테 들어갈 돈도 만만치 않았다. 권 씨는 또 다른 회사를 찾아 들어갔다. 이번에는 스위스 자본인 네슬레의 하청 업체였다. 웃기는 일이었다. AMK에서 겪었던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네슬레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람을 뽑아놓고 일거리가 있는데도 무급휴직을 돌렸다. 울분이 치솟았다. 또 다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악몽 같았던 기억들을 떠올리다 결국 싸움을 포기했다. 권 씨는 제 발로 회사를 나왔다.

그 후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여러 일을 전전하던 권 씨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일은 요양 보호사다. 그것은 권 씨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 하지만 24시간 맞교대 근무와 쥐꼬리만 한 임금, 휴식시간조차 보장 되지 않는 열악한 노동환경은 권 씨와 동료들의 삶을 갉아 먹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결성해 근무형태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자 병원은 용역을 투입하고, 노조파괴 전문가를 고용해 노동자들을 징계, 해고했다. 과거의 상처와 분노가 여지없이 되돌아와 가슴에 피멍을 만들었다. 지난해, 권 씨는 30일 넘게 곡기를 끊었고, 1년 가까이 농성 투쟁을 했다. 이제야 그녀는 끊어내지 못한 고통은 언젠간 되돌아온다는 걸 깨닫게 됐다. 권 씨는 이제 지난 20년의 시간을 다시 되돌려 놓기 위한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사회복지사 지망생 강은주

강은주(25) 씨의 꿈은 사회복지사다. 대학 진학에서도 망설임 없이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다. 어쩌면 필연 적인 선택이었다. 부모님의 고된 삶과 오랜 가난을 경험한 그녀는, 타인의 곤궁한 삶에도 시선을 빼앗겼다.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강 씨의 아버지는 20년간 중고 자동차 매매 사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마이카 시대’라는 호황기가 지속돼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자동차를 사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업도 끝이 났다. 아버지는 공인중개사에 도전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 후로는 집안에 파란 알약들이 쌓였다. 무슨 약이냐고 엄마에게 물었다가 넌 보면 안 돼, 라며 호되게 야단맞았던 기억난다. 아버지는 그 당시 비아그라를 밀반입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해도 안 되는 시대였다. 아버지는 건설현장 일을 시작했고, 현재까지도 일용직 노동자로 살고 있다.

어머니는 30년간 미싱을 돌렸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오는 어머니의 속눈썹 위에는 하얀 먼지가 수북했다. 엄마가 일하는 공장에 따라 나선 적도 있다. 건물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공장으로 내려가며 “왜 이렇게 계속 내려가?”라고 엄마에게 물은 기억이 난다. 한참을 내려가 도착한 공장은 좁고, 창문도 없고, 이불 실밥이 둥둥 떠다니는 곳이었다. 엄마는 그 곳에서 하루 12시간 넘게 일을 했다. 부모님의 치열한 삶과는 별개로 집안 사정은 점점 기울어 지기만 했다. 강 씨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는 방 세 개짜리 집을 떠나 원룸으로 이사했다. 10살 터울의 언니는 집을 떠났고, 세 명의 가족이 한 방에서 생활 했다.

2012년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인생의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겠구나 싶었다. 강 씨는 국가장학금 소득분위 심사에서 1분위로 분류 돼 장학금을 지원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2천 만 원에 달하는 학자금 대출 빚이 남아 있었다. 아르바이트가 필수적이었다. 전공을 살려 유명 구호 단체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왠지 꿈에 한 발자국 가까워진 것 같아 기뻤다.

강 씨는 구호단체 모금 전화 상담 업무를 반 년 간 했다. 2년 동안은 길거리 모금 활동을 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뭔가 조금 뒤틀려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강 씨 같은 모금 활동은 구호단체가 아닌 하청업체가 관리했다. 하청 관리자는 매일 아침 8시, 강 씨 같은 청년들은 사무실로 불러 모았다. 한 시간 가량 이어진 미팅에서 관리자는 “여러분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들의 관심은 ‘구호 활동’이 아닌, ‘할당액 채우기’에 쏠려 있었다. 강 씨가 원했던 사회복지 활동은 다단계 하청업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궁금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왜 우리 집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 걸까. 스무 살이 넘어서야 어렴풋이 알게 됐다. 단순히 그의 부모님 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사회 구조적 문제가 그의 부모님을, 그리고 그를 계속 가난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사실을. 강 씨는 현재 통신판매업에서 단기계약직으로 일을 하고 있다. 월 150만 원 가량의 최저임금을 받으며 자취를 한다. 고시원과 원룸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월세 35만 원 짜리 방에 산다. 공과금, 통신비, 교통비를 빼고 나면 생활비는 빠듯하다. 그래도 간간히 돈을 모아 부모님을 챙겨드리곤 한다.

지금까지 쭉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왔고, 여전히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을지 모른다. 하지만 강 씨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건 분명 강 씨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래서 그는 여전히 사회복지사를 꿈꾼다. 지금까지 뒤틀려 왔던 사회를 반듯하게 펼 수 있는, 조금 더 적극적인 사회 운동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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