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 통상임금 소송, “경영상 어려움 모호해, 신의칙 위반 아냐”

통상임금 혼란 일으킨 주범은 정치권-재계-법조계

법원이 기아차노조가 제기한 통상임금청구 소송에서, 정기상여금 등은 통상임금에 해당하며, 노조가 제기한 소송이 ‘신의칙(신의성실의 원칙)’ 위반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내세운 신의성실의 원칙으로 번번이 소송을 제한 당해 온 통상임금 소송 사업장에 의미 있는 영향이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신의칙 적용 여부와 통상임금 범위 등을 둘러싼 논란을 이어질 것이어서, 노동부가 왜곡한 행정지침 개선을 비롯해 정부 차원의 법적 제도적 대책을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기업의 중대한 어려움은 엄격히 적용해야...신의칙 위반 아냐”

앞서 2011년, 기아차 전 현직 노동자 2만 7,500명은 2008년 8월부터 2011년 10월까지 받았던 연간 700%의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야 한다며 회사를 상대로 임금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서울중앙지법 민사 41부(부장판사 권혁중)는 31일,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밀린 임금 4,223억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특히 재판부는 상여금과 중식대는 소정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금품으로서 정기적, 일률적, 고정적으로 지급되는 임금이기 때문에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아울러 노동자들의 통상임금 소송이 기업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할 것이라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신의칙’ 위반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앞서 법원과 정부, 재계는 ‘신의칙’을 내세워 번번이 통상임금 소송의 발목을 잡아 왔다. 2013년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노사합의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했다면, ’신의칙‘에 따라 추가 임금소송은 인정할 수 없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면서부터다. 이듬해 한국GM노동자들이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대법원은 ‘신의칙’을 내세워 사실상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신의칙’ 원칙의 핵심은 소송을 통한 노동자 임금 소급이 ‘기업 경영에 부담을 준다’는 것이다. 당시 재판부는 노사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와 다른 법리적 사유로 사용자에게 과거 임금까지 소급지급 할 의무를 부과하면 기업 경영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는 판결을 내 놨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는 ‘기업의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은 보다 엄격하게 해석,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노동자들은 강행규정인 근로기준법에서 인정되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고, 노동자들이 노사가 합의한 임금수준을 훨씬 초과하는 예상외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회사의 재정 및 경영 상태, 매출 실적 등이 나쁘지 않다는 점과, 영업이익 감소에 대한 명확한 증거자료가 없다는 점 등 구체적인 경영 상태를 근거로 이번 소송이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 단정하기 어려워 ‘신의칙’에 위반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그동안 기아차 사측은 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고, 통상임금에 포함된다 하더라도 ‘신의칙’에 위반된다고 주장해 왔다.

한편 재판부는 주 40시간을 초과한 휴일근로에서 휴일근로수당 외에 연장근로수당을 청구한 것은 인정할 수 없으며, 단체협약에 근거해 미지급임금을 청구한 것 역시 근로기준법상 기준에 의한 청구만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신의칙’ 등으로 통상임금 혼란 일으켜 온 노동부-재계-법조계

이번 판결에 대해 노동계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동안 통상임금 소송을 가로막았던 신의칙을 불인정하고, 근로기준법에 따라 사용자에 지급의무를 부여했다는 평가다. 사실 통상임금을 둘러싼 혼란은 노동부의 잘못된 행정해석과 정치권 및 재계의 통상임금 범위 축소, 법원의 ‘신의칙’ 적용에 의해 가중 돼 왔다. 애초 근로기준법 시행령 6조에는 ‘소정근로 또는 총 근로에 대해 지급하는 정기적이고 일률적인 금품은 모두 통상임금에 포함 된다’고 규정 돼 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1988년, ‘통상임금 산정지침’을 통해 대부분의 수당 및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했다.

반면 199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임금이분설을 폐기하고, 모든 임금을 근로제공의 대가로 규정했다. 그럼에도 고용노동부는 2009년부터 재계를 상대로 임금컨설팅을 진행하며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는 방법과 성과주의 임금체계로의 개편을 주문해 왔다. 2013년에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신의칙’ 해석으로 경영계의 손을 들어주면서, 통상임금을 둘러싼 혼란은 더욱 증폭 돼 왔다. 이듬해 철강재 포장회사 누벨 노동자들이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을 비롯해 한국GM, 금호타이어, 현대중공업 등의 소송은 모두 ‘신의칙’이 적용됐다. 또한 ‘신의칙’ 인정 여부를 놓고 1심과 2심 판결이 뒤바뀌는 등의 혼란도 이어졌다. 이번 판결에 대해 기아차는 항소한다는 입장이어서, 향후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도 어떻게 결론이 날지 예측하기 어렵다. 때문에 정부가 과거 통상임금을 왜곡해왔던 지침을 바로잡고, 명확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아차지부는 판결 직후 입장을 발표하고 “통상임금은 안정된 임금체계로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실질임금을 확보하여 노동자의 삶을 향상시키는 취지”라며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의 법판례를 무시한 통상임금 행정지침을 바로 잡아, 통상임금 문제로 노사간 갈등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편 기아차 노동자들을 대리해 온 법률사무소 새날 김기덕 변호사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판결은 회사의 구체적인 경영상태를 고려해 신의칙 위반 여부를 판단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라며 “현재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사업장들의 통상임금소송에 의미있는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다”고 밝혔다. 현재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사업장은 115곳이다.

민주노총도 논평을 발표하고 “오늘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경총 등 사용자단체의 선동과 협박은 계속되고 있다”며 “사용자단체들은 재판부가 적시한 ‘노동자들이 마땅히 받았어야 할 임금을 이제야 지급하는 것을 두고 비용이 추가적으로 지출된다는 점에만 주목해 이를 경제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한 판결문을 새겨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상임금 왜곡의 역사

1988년
노동부, 통상임금 산정 지침 마련
‘기본급은 통상임금이지만 상여금·가족수당 등 생활보조적·복리후생적 급여는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

1990년 12월 26일
대법원, 통상임금 기본개념 정립
“정기적, 일률적으로 임금 산정기간마다 모든 근로자에 대해 나오는 고정급”


1996년 2월 9일
대법원, ‘정기성’ 개념 확대
“1개월을 초과하는 기간마다 지급되는 것이라도 그것이 정기적, 일률적으로 지급되는 것이면 통상임금에 포함될 수 있다”(예: 명절귀향비 등)


1996년 2월 27일
대법원, 복리후생비 등 인정
“식대, 체력단련비, 월동보조비, 개인연금지원금 등도 고정적으로 나오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


2009년
노동부, ‘성과연동 임금체계로 경쟁력 있는 회사 만들기’ 발간
“고정상여 700% 중에서 400%는 고정상여로 두고, 나머지는 변동상여 기초액으로 전환하라”

2012년 3월 29일
대법원,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금아리무진 판결)
“정기상여금도 일률성·고정성을 갖추면 통상임금이다.”
대법원의 금아리무진 사건 판결이 내려진 이후 대규모 사업장의 통상임금 소송 급증


2013년 12월 18일
대법원, 통상임금 소송에 ‘신의성실의 원칙’ 법리 적용(갑을오토텍)
“사용자에게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워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면 신의칙에 위배되어 받아들일 수 없다.”

2013년 5월 9일
박근혜 대통령 방미 일정 중 대니얼 애커슨 지엠회장 만나 통상임금 논의
“통상임금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주면 8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
“지엠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대한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보겠다.”

2014년 1월
노동부, ‘통상임금 노사지도지침’ 발표
특정 시점에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만 지급되는 임금은 고정성이 없어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과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추가임금을 청구하는 것을 신의칙에 의해 제한한다는 것이 지침의 주요 내용

2014년 4월
은수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노동부가 사용자를 상대로 통상임금 축소를 유도하는 교육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폭로
노동부, 위탁 교육 사업 교재에 노동부의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을 골간으로 직능급, 직무급, 성과급제 등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 설명. ‘임금간소화’ 방안이라며 통상임금에 편입될 수 있는 수당은 기본급으로 편입하되, 통상임금에 편입되기 어려운 제수당을 신설하고 나머지는 성과급으로 구성하는 방안 제시

2014년 5월 29일
대법원, 한국지엠 노동자 5명이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 원심 깨고 서울 고법으로 파기 환송
노사합의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했다면, 이후 노동자들의 추가 임금 소송은 ‘신의칙’에 위배된다는 취지로 사실상 원고 패소 판결

2015년 9월 16일
새누리당, ‘노동시장 선진화법’ 당론 발의
통상임금 개념에 ‘고정성(재직자 요건)’ 추가. 통상임금 산입범위를 축소해 결과적으로 임금 삭감 효과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박다솔, 윤지연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