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 19차 당대회, 덩샤오핑의 유산을 본다

[워커스 인터]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의 함의

세계의 관심을 모았던 중국 공산당 19차 당대회. 이번 당대회는 10월 18일 무려 3시간 반에 이르는 시진핑의 연설을 시작으로 개막해 그 연설에 바탕을 둔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을 당장(黨章)에 지도 이념으로 포함시키는 것으로 24일 폐막했다. 바로 뒤이어 25일 열린 19차 1중전회에선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부인 상무위원회의 인선을 시작으로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이 글에서는 간단하게 이번 19차 당대회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19차 당대회) 개막회 현장 [출처: 인민망]

집단지도체제의 관행은 완전히 깨졌는가?

중국 공산당은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덩샤오핑의 지지 하에 지도부의 승계 규범을 확립하는 동시에 집단지도체제를 정착시켜 1인으로의 권력 집중을 방지하고, 권력 엘리트들의 교체와 세대별 순환을 제도화해왔다. 그렇기에 이번 19차 당대회에서 가장 큰 이슈는 바로 중국 공산당의 권력 최상층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였다. 특히 외신을 중심으로 예상 명단과 제도 변화에 대한 예측들이 난무했다. 그 중 당 주석직 부활이나 상무위원 수 축소 같은 과감한 예측을 제외하면, 무엇보다 시진핑에 이어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는 6세대 정치인(후춘화, 천민얼 등)이 진입할 수 있는가와 시진핑 1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인 反부패 사정작업을 주도했던 왕치산 기율검사위원회 서기가 연임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후자는 그동안의 관행인 연령제한 규칙 ‘칠상팔하(七上八下: 당대회 시점에서 67세는 상무위원회 진입이 가능하고 68세 이상은 은퇴해야한다는 내규)’를 깨는 것이기에 시진핑의 집권 연장 신호로 여겨졌다. 전자는 관행대로 새로운 후속 세대가 진입하는 것이기에 시진핑이 이번 임기 후 물러난다는 예측이 가능했다.

하지만 25일 밝혀진 인적 구성에 따르면 그 두 가지 모두 이뤄지지 않았다. 즉, 왕치산은 상무위원을 연임하지 않게 됐으며, 차기로 여겨질 후속 세대도 상무위원에 진입하지 못했다. 하나의 관행은 지켜졌지만 다른 하나의 관행은 깨졌다는 모순되고 복잡한 결정들로 중국 정치 예측이 불확실해졌다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새로 진입한 상무위원들과 그 바로 아래 단계인 25명의 중앙정치국 인선에 시진핑의 핵심 측근들이 많아졌고, (뒤에 그 의미에 대해서 부연하겠지만) 당장에 ‘시진핑 사상’을 삽입했다는 면에서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이 강화되었다는 분석은 대부분 동일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시진핑으로의 권력집중이라는 현상에 대해서는 얘기했지만 왜 권력집중이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은 부족했다. 작년 18기 6중전회와 관련해서 《워커스》에 기고한 글(시진핑 권력 집중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25호)에서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간략하게나마 의미를 짚어봤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의 함의

많은 분석가들은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을 개인의 권력욕으로 인해 벌어진 현상이며 일인 독재의 강화나 전체주의로의 회귀로 판단한다. 하지만 시진핑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당 전체로 보면 조금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1949년 건국 이후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보면 당이 문화대혁명 이후 권력 엘리트들의 합의를 중시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었는데 이는 이후 당 내에 큰 분열이 생겨 집권당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이후 다시 당으로 복귀한 권력 엘리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당내 지배적 통치의 안정성이 깨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오쩌둥 같이 한 사람에게 많은 권력이 집중되는 방식을 피하는 동시에, 체제에 불만을 느낀 대중운동과 당 내부의 분파가 결합하는 위협을 최대한 방지하고자 했다.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에도 계엄령이나 진압을 놓고 상무위원회가 팽팽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이 개입하여 자오쯔양의 해임과 무력 진압을 결정하며 신속하게 당 내의 분열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 이후로도 당 내부에서 때로는 계파 간 갈등이나 정책적 이견 등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상무위원회의 분업체제를 중심으로 합의와 그에 따른 결정을 수행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2년 후진타오에서 시진핑으로의 권력 이행기에 발생했던 보시라이 사건과 그와 연관된 저우융캉 사건은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당의 집단지도체제에 커다란 균열을 낼 수 있는 일이었다. 충칭에서 좌파적인 정책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보시라이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은 여전히 그 전모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상무위원으로 공안과 경찰력을 총지휘하는 정법위원회 서기였던 저우융캉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당 지도부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는 것(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매체를 통해 정변모의설이 보도되었다)은 분명해 보인다. 이후 18대 지도부 구성에서 정법위원회 서기 직위가 상무위원회에서 제외되고 인원수를 9명에서 7명으로 축소한 방침과 몇 달 전 유력한 6세대 지도부로 예측되던 충칭시 서기인 순정차이의 낙마 이유 중 하나가 보시라이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러한 분석들을 뒷받침한다.

즉, 후진타오 시기 상무위원 간의 권력 분점 속에서 합의를 깨고 당에 엄중한 위기를 가져올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여실히 보았기에, 이를 제압할 수 있는 좀 더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최고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에 여러 당 원로들을 비롯한 각 계파들이 동의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또 한편으로 빈부격차, 부정부패, 생태위기, 부채 증가, 경제 성장 둔화 등과 같은 여러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드라이브를 걸기 위해서도 좀 더 강력한 권력 집중이 필요할 수 있다는 정책적 선택이 이뤄졌을 수도 있다. 배후에 어떤 갈등이 있을지는 몰라도 이번 19대 개막식과 폐막식에서 전임 총서기였던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시진핑의 양 옆에 나란히 서서 힘을 실어준 것도 합의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 종합하자면, 중국 공산당의 가장 큰 목표는 당의 지배적 통치의 안정 유지이다. 따라서 장기적인 정책 실행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강한 리더쉽의 등장을 합의했을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시진핑 사상은 덩샤오핑이론을 뛰어넘었을까?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이 강화되었다는 증거는 ‘시진핑’이라는 현직 지도자의 이름이 들어간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이 당의 주요 지도 이념으로 당장에 삽입되었다는 것이다. 18대까지 중국 공산당 당장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덩샤오핑이론, 삼개대표론, 과학발전관이었다. 시진핑의 이름이 명시된 사상이 들어갔다는 것은 적어도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은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이 공산당을 창당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이나 개혁개방으로의 노선전환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끌어낸 덩샤오핑에 비해서 아직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한 시진핑의 이름을 당장에 넣는 것은 무리라고 관측해왔다. 특히 나름 주의-사상-이론-론-관으로 이어지는 지도 이념의 위계가 있는데 ‘사상’이라는 명칭을 택한 것은 심지어 덩샤오핑을 뛰어넘어 마오의 위상에 이르려는 시진핑 개인의 욕망이 아닌가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하지만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 내용을 살펴보면, 중국 공산당이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제기했다기보다는 큰 틀에서 여전히 당은 덩샤오핑의 유산의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보인다. 물론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에서 향후 2050년까지 대전략의 구체적인 목표들(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과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이라는 두 개의 백년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인 소강사회를 건설하여 부강한 민주문명과 아름다운 사회주의 현대화를 이룬 강국의 건설)과 그에 따른 여러 실행 방안들의 비전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비록 그 설계도가 화려해지고 중국적인 색채가 좀 더 강해졌으며 이것저것 덧붙여졌음에도 덩샤오핑이 이미 1980년대에 제기했던 2050년까지의 중국의 3단계 현대화 전략(溫飽 - 小康 - 大同)이나 “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점(중국의 가장 중요한 국정목표는 경제성장이고 그 방법으로 개혁개방을 견지해나가되 공산당 영도의 원칙을 유지해나간다)”이라는 원칙에서 바뀐 것은 없다는 판단이 든다. 그런 맥락에서도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중국에 새로운 계기/변화를 마련하기보다는 덩샤오핑 시기에 그려진 큰 그림에서 부딪힌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한 방법이라고 보인다.

중국 공산당은 초심으로 돌아갔는가?

“초심을 잊지 말자(不忘初心)” 시진핑은 이 말로 19대 개막을 알리는 긴 연설을 시작했다. ‘첫 마음을 잃지 말자’는 한국의 사회운동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말이다. 특히 뭔가 운동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방향을 잃었을 때 자주 되뇌이는 격언이다. 중국 공산당의 첫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시진핑은 이어서 중국 국민의 행복을 도모하고 중화민족의 부흥을 꾀하는 것이 중국 공산당원의 초심과 사명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중국 공산당의 초기 구성원들의 첫 마음은 단순히 중화민족의 부흥만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제국주의와 자본의 억압으로부터 고통받는 민중, 그것도 중국 인민뿐 아니라 연대를 통해 아시아 지역을 넘어 만국의 노동계급 해방이라는 그 원대한 이상이 그들의 첫 마음이 아니었을까? 마오쩌둥은 1941년 연안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자신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거나 일부만 알고 있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고 있다.”[워커스 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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