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법’ 개악, 근기법 개악시도에 부쳐

[정치칼럼] ‘진보’와 ‘보수’의 질긴 로맨스, 그 끝은 어디인가

지난 비평에서 문재인 정권이 ‘사람 사는 세상’,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한 치도 의심치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그 세상, 나라는 이른바 ‘재산과 교양을 지닌 이들’의 것, 글로벌 자본을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 ‘시장합리성’이라는 가면을 씌어 인적, 물적 자원을 수직적으로 배치, 투여하는 그런 곳일 것이다. 여전히 그 자본을 신줏단지 모시듯 떠받치는 자들이 ‘고위 공무원’이라는 이름표를 단 채, 가난한 이들의 ‘서바이벌 게임’을 즐기는 그런 세상, 나라일 것이다. 따라서 그 곳에서는 ‘자본스러운, 공무원스러운 사람들’이 가장 우대받을 것인데, 삼성 등 글로벌 자본의 일원이 되는 것, 공무원이 되는 것이 ‘꿈이자 성공의 기준’이 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그런 사회, 나라를 위해 현 집권세력 등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자유한국당 등이 지난 신자유주의 20년 동안 ‘갈등적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것 또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면, 여전히 흥분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그 대부분이 현 정권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이다. 일부에서는 그들을 ‘노빠’, ‘문빠’라고 부르지만, 스스로 상식과 교양, 합리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자유한국당과 같은 몰상식하고 천박한 정치세력의 지지자들과 왜 한통속으로 묶느냐’며 성을 내기 일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수구파시스트들을 ‘보수정치세력’이라 호명하며 기를 살려주고 있는 이들이 다름 아닌 현 정권과 집권 민주당이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같은 사회에 사는 구성원들의 생각, 이념을 문제 삼아 그 구성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을 보수로 호명하는 이상한 세상이 대명천지에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친북/종북 정권’이라는 딱지를 붙여 공공연히 색깔몰이를 하고 심지어 ‘북한이 좋으면 그곳에 가서 살라’고 하는 자들을 보수라고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상식과 교양, 합리성’을 지녔다고 믿는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정권, 정치세력에 의해 비상식, 비합리의 인식과 행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바른정당조차 그 자유한국당을 ‘진정한 보수정당’이 아니라고 부정하며 떨어져 나왔는데 말이다.

물론 그런 행태들을 이해하기 위해 현 집권 세력의 뿌리가 친일지주 세력의 상징인 한민당, 극우반공의 자유당 및 민주당 등에 닿아 있다는 역사의 계보를 환기시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족보에 집착하다 보면, 역사를 ‘피는 진하다’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 해석하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록 실제로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선임들’이 변하려 노력했던 역사적 사실, 향후 그럴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독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실 속에서 그와 같은 냉정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늘 그래왔듯이 현 정권과 집권 민주당 스스로가 자신들을 수구파시스트세력과 도긴개긴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 동안 이 사회의 양식 있는 이들이 반대해 왔던 이른바 ‘김영란법’ ‘3-5-10’ 조항의 개정이 현 정권의 밀어붙이기로 결국 통과되었다. ‘합리적 신사’로 불린다는 국무총리가 전면에 나서 법 개정이 설을 넘기지 말아야 농민에게 빨리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며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등 진두지휘해 농축수산물에 대한 ‘선물비’의 상한이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올랐다. 그런데 어이가 없는 것은 그 개정이유가 ‘농민을 위해서’이다.

농민들이 한결같이 요구해 온 농수축산 농가들을 수탈하는 유통구조 개선, 고리대로 전락한 농수축협에 대한 개혁 요구 등, 정작 해야 할 일들은 외면한 채, ‘선물비’를 올려 농어민을 위하겠다니, 그것도 정권의 명운을 건 듯 속전속결로 통과시키니 너무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런 ‘친농민적인 정권’이 그 동안 어디에 또 있었는가. 농민들에게 부패를 조장하는 이익집단이라는 욕을 배불리 먹게 하고 5만원 인상으로 큰 혜택을 보게 된 유통자본의 배 두드리는 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까지 남겨주었으니 말이다. 이를 볼 때, 현 정권의 머릿속은 백남기 농민의 외침이 아니라 여전히 고무신 한 켤레, 막걸리 한 사발에 표를 팔던 쌍팔년도 농민의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농민은 ‘개, 돼지’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다른 한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근로기준법을 개악하려 해 그렇잖아도 팍팍한 삶에 지친 노동자들이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고생을 하고 있다. 장시간 노동시간을 유지하고 휴일/연장노동(중복)수당 등을 줄여 노동자들의 피 한 방울, 한 올의 생기를 더 쥐어짜겠다고 앞장선 자들의 면면을 보니, 현 정권의 초대 고용노동부장관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상임위원장 등 집권 민주당 의원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 사는 세상’,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권의 언술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전매특허로 애용했듯이, 그런 행태가 ‘의원 개인의 일탈행위’라면 더 심각한데, 개혁을 내세우는 문재인 정권에 대해, 내부에서 사보타주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혁’을 포기하지 않은 이상 그들에게 강한 경고를 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런 낌새가 없는 것을 보니, 촛불혁명의 적자를 자임하는 그들에게 가장 큰 적폐는 자본이 편안하게 착취, 수탈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노골적으로 반노동, 아니 반인권의 행보를 취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이야말로 ‘노동자인권’을 최소로 상징하는 준거 아닌가. 한 표가 아쉬울 때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노조 할 권리 보장’ 등의 정책을 남발하다가 게임이 끝나자마자 그런 요구를 하는 노동자들을 외면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근로기준법이라는 ‘죽 그릇’마저 더 일그러뜨리려 하니, 그들에게 노동자들은 ‘호갱님’일 뿐이다. 물론 그것은 문재인 정권의 책임만은 아닌데, 특히 지난 대선에서 ‘(친)노동자정부’가 될 것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민주노총의 전현직 관료들이 ‘호객꾼’으로서 기능했기에 그렇다.

자유한국당을 본말전도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개혁의 발목을 잡는 전형적인 정치세력이라고 비판해 온 이들이 과연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처럼 자유한국당스러운 짓을 반복하고 있으니 후안무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자유한국당이 김영란법의 개악, 근로기준법 개악시도에 대해 민주당에 끌려가는 듯 표정을 관리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 정권과 민주당이 알아서 잘 하고 있는데, 박수쳐주고 떡이나 먹으면 되지, 괜히 초칠 일 있는가. 손 안대고 코푸는 격으로 정치적으로도 손해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심전심, 염화미소야말로 ‘환상의 콤비’가 지녀야할 최고의 정치적 덕목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적폐를 내세우며 ‘박정희교’의 신자들만을 비판할 일이 아니다. 반공분단체제의 산물인 완고한 정치 틀, 즉 ‘수구-보수독점의 정치구조’, 혹은 지금 재민주화의 징표로 운위되는 ‘보수-수구독점의 정치구조’를 재생산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다른 한 축이 ‘상식과 교양, 합리성’을 그 누구보다 강조하는 현 정권의 지지자들, 세칭 ‘노빠’, ‘문빠’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양자는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오십 보 백 보의 ‘전략적 동반자들’이다. 겉으로는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서로 자신들의 역사적 위상, 존재 의미를 긍정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척도로 기능하는 동반자 말이다. 그렇기에 문재인 정권, 혹은 민주당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자신들과는 다른 정치관, 삶의 지향과 모습을 보이는 이들, 즉 다양한 영역에서 착취, 수탈 받는 이들, 차별, 배제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진보좌파를 비난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국사회처럼 수구파시스트들이 보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공식적으로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며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그런 ‘선진적인 나라’가 있는가. 없다. 그런 구조야말로 적폐를 양산해 온, 아니 적폐 그 자체인데, 그것을 유지, 조장하는 이들이 그 청산을 말하면, 정치를 종교와 동일시하지 않는 이상 누가 그 언술을 믿겠는가. ‘김영란법’을 개악하고 이어 근로기준법을 개악하고자 시도하는 이들이 어떻게 ‘상식이 통하는 사회’,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그리고 ‘사람이 먼저인 사회’를 만들 수 있겠는가. 이런 ‘합리적 의심’을 부정할 이 누구인가.

수구파시스트의 상징인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비교의 척도로 내세워 그 우위를 내세우는 이들이 전폭, 혹은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현 정권, 집권 정치세력에게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것은 자칭 ‘진보’와 ‘보수’가 즐기는 저 신비로운 ‘구조적 로맨스’를 지탱시키는데 기여할 뿐이다. 지난 신자유주의 지배 20년, 아니 전후 한국정치가 준 쓰디 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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