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과 촛불의 계급적 의미

[양규헌칼럼] 노동자계급의 과제는 여전히 진행형

2017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촛불로 촉발된 변화를 실감하며 새로운 계획을 논의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의 끝자락이다. 연일한파를 몰고 오는 기온이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하지만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더욱 어깨를 움츠리게 한다. 12월임에도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 손에 희미하게 피어나는 촛불이 시린 손을 녹이고 있다. 촛불 1주년을 맞아 촛불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해석은 물론 지나친 규정이 새로운 논쟁을 부추기고 있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촛불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지만, 지난 촛불이 혁명이라기보다는 어둠을 밝히고 염원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보고 싶다.

[출처: 자료사진]

최초 촛불집회

필자가 경험한 촛불집회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70년대 말, 전태일 열사 추모제에서 밝혔던 촛불이 최초의 촛불집회였다. 민주노조 활동가 30~40명이 작은 강을 건너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조심스럽게 촛불을 켜고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며 열사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겠다는 결의를 모으는 비밀스런 자리였다. 11월 초순,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산속은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 추위는 기온 때문이 아니라 군사독재정권의 감시의 눈빛에 대한 공포가 추위를 더욱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서로를 의지하며 한 개의 촛불은 양옆으로 옮겨 붙이며 깜깜한 계곡은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촛불은 대오전체를 침묵으로 휘감으며 순간적인 적막과 긴장은 차츰 촛불 속에 스며들며 얼었던 산골을 녹이고 있었다. 소규모 촛불집회였지만 그 자리는 전태일 열사 정신을 해방정신이라고 규정하며 민주노조정신을 이어나가겠다는 결의가 활동가들 가슴에 요동치고 있었다.

열사 추모제 촛불은 자신을 불살라 주변을 함께 비춘다는 열사의 희생정신, 노동자 개개인은 나약한 존재지만 단결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그 촛불은 춥고 어두운 계곡에서도 추위를 녹이고 환한 빛을 밝혀주는 촛불이었다. 긴장된 추모제는 열사의 뜻을 이어받겠다는 결의가 담겼고, 그 결의는 엄혹한 군사독재정권하에서도 민주노조운동의 맥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펑화를 기반으로 하는 투쟁전술이 모든 가치의 우선일 수는 없다

약 40년 전에 캄캄한 산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전파했던 촛불이 서울 도심 한복판은 물론 각 지역의 도심에 밝혀졌다. 40개 촛불이 아닌 수천 수백만 개의 촛불이 밝혀지며 탄핵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권력이 바뀌었다. 민중이 참여하여 밝힌 촛불의 바다를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작금의 촛불로 정권은 여당과 야당이 바뀌었고 혹자들은 ‘촛불혁명’이라고 하지만 거대한 촛불의 위력에도 예전 전태일 열사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30년 전, 6월 항쟁이 그러했듯이 전 세계 관심을 집중시키며 진행되었던 완강한 촛불이지만 노동자들의 삶을 밝히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노동자 처지에는 아랑곳없이 외신들은 평화적 촛불집회가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며 톱기사로 다루었다. 나아가 촛불항쟁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 의식을 높이 평가하며 아름다운 민주주의 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촛불1주기를 즈음해서는 평화적인 집회가 총과 칼보다 위대했다며 ‘에버터 인권상’까지 받게 되었다.

촛불위력에 대해 국제적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은 언론들은 나름대로 의도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 의도에는 비폭력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으며 상대개념인 폭력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규정이 담겨있다. 언론은 물론 숱한 활동가들은 평화적인 촛불시위가 가장 모범적이고 위대한 투쟁이었으며 정권까지 교체하는 성과를 이룬 최상의 투쟁방식이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주장이 진리라고 한다면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동서를 불문하고 역사적으로 혁명을 감행했던 민중들에 대한 평가는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촛불항쟁의 비폭력성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촛불국면을 둘러싼 정세에서 투쟁전략과 전술이 적합했는가를 평가하고 보도해야 할 것이다.

시기에 따른 정세를 고려하지 않고 나타난 현상만 집착한다면,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일제하 민족해방투쟁이 폭력적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할 것인가.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에서 자발적으로 분출되었던 폭력투쟁은 어떤 잣대로 봐야할 것인가. 또 지금 이 순간에도 억압받는 민중들과 소수민족들이 세계 도처에서 혁명과 해방의 총칼을 움켜잡고 저항하는 처절함을 어떻게 봐야할까. 전 세계 주류언론들이 한번이라도 그들을 심층 취재하여 당사자들의 기본권리와 생존의 몸부림을 보도한 것을 본적이 없다. 이들에게도 에버터 인권상을 수여함으로써 국제적인 쟁점으로 부각시킨다면 에버터 재단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더라도 촛불인권상의 의미는 평가할 수 있다.

혁명의 이중적 잣대가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촛불투쟁 1년을 맞으며 촛불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각자가 처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집권여당은 촛불혁명으로 규정하고 그 밖에 시민단체는 물론 학자들까지 나서서 ‘촛불혁명의 의의와 향후 전망’이라는 주제를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에게 촛불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의 일상에서 촛불은 축하와 추모의 의미가 일반적이고, 종교적으로 모든 종교는 의례를 행할 때 촛불을 밝힌다. 고대사회에서 종교는 불을 숭배하는 의식이 많았는데, 이 같은 인류의 전통이 종교 의식을 밝히는 촛불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가톨릭에서 촛불은 온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어둠을 쫓아내고 밝은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도 촛불은 중생의 무명(윤회하는 근본원인)을 일깨운다는 의미에서 예불 등 의식을 밝히고 우리도 촛불이 빠진 제사는 생각할 수 없다. 또 예술적 의미로 촛불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점에서 희생, 진실, 불타는 정념 등의 이미지를 낳으며 다양한 문학적 동기로 사용돼 왔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에게 촛불의 의미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지난 촛불정국을 혁명이라고 한다. 정권교체 투쟁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있는지 몰라도 노동자계급에게 촛불투쟁을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혁명의 사전적 의미는 ‘피지배 계급이 국가의 권력을 빼앗아 사회체제를 변혁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권력만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종래의 관습·제도·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일을 말한다. 이 말은 특수한 계급적 개념이 아니라 일반적 개념이기 때문에 시중에 유행되고 있는 촛불혁명에 무게를 담으려면 촛불전후로 달라진 혁명적 상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산적한 노동자계급의 과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촛불투쟁 1년을 경과하고 있는 지금, 기록적인 강추위가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계절적 요인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삶과 정치적인 상황이 추위를 더욱 부추긴다.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여당이 되고, 적폐의 중심에 섰다는 박근혜가 구속되고 촛불을 억압했던 권력자들이 줄줄이 구속되거나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박근혜퇴진을 외쳤던 민주노총 위원장은 형기 2년을 넘겨도 감방에 갇혀있고, 사무총장은 민주당사에서 단식농성중이다. 거리에서는 교육노동자가, 공무원노동자들이 농성과 집회투쟁을 이어나가고 건설노동자들은 광고탑에 오르고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청와대 앞에는 하이디스 정리해고 투쟁을 비롯한 비정규노동자들이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노숙농성 노동자들의 천막은 투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현 정권은 호시탐탐 농성물품을 강제로 압수한다. 이런 모습은 촛불투쟁 전과 후가 차이가 없고 나아가 저들이 얘기하는 혁명전과 후가 어떤 변화도 차이도 전혀 없는데 혁명이라고 우긴다면 그 혁명은 그들의 전유물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무엇이 달라졌을까. 혹자들은 문재인 정권이 권력을 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성급하다고 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이 내세운 소득주도 성장의 실체가 최저임금산정에 상여금을 넣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휴일근로 할증을 50% 적용하고 연장근로 할증 50%는 제외한다는 방안들이 추진되고 있다. 한마디로 임금은 깎고 노동시간은 늘리려는 노동법 개악의도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강조하는 노사정합의체는 그간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물거품 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문재인정부의 노동정책 전반에 우려의 목소리가 시간이 경과할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민주노총은 선거철이라는 이유 때문에 정책적 대응이 순조롭지 못하다. 이러한 때를 틈타 청와대는 노정교섭과 대화의 장이라는 구실로, 각개격파전술을 활용하며 개별연맹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채널을 가동하여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민주노조지도부 출신들이 앞 다투어 문재인 정부의 품에 안겨 생산해내는 노동정책이 노동자 삶에 희망보다는 먹구름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민주노조진영은 조직적 대응보다는 노사정합의체와 대화창구라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2005년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노사정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이유로 민주노총이 강하게 반발했던 그런 문제의식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설사 그때와 지금은 달라졌다고 한다면 나아가 촛불전후가 혁명적으로 상황이 바뀌었다고 한다면 무엇이 바뀌었는지 설명이 되어야 한다.

촛불집회에서 귓전을 울렸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외침. 정말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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