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내가, 이행은 알아서들 하세요

[워커스 이슈(4)]서울시가 내놓은 정책, 이행과정 살펴보기



“서울시 산하기관 노동자들의 진짜 사장은 시장님이죠. 돈줄을 쥐고 있고, 시에서 실질적으로 관리 감독에 나서니까요. 노정교섭을 왜 요구하겠습니까. 기관은 아무런 힘이 없어요.”

어느 공공기관 노동자의 말마따나 서울시 산하기관들은 서울시의 정책에 따라 움직인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임금체계 개편, 각종 사업까지 서울시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산하기관 노동자들에게 서울 시장은 ‘진짜 사장’도 된다. 서울시가 입에 침을 바르며 홍보하는 ‘노동존중 특별시’ 서울의 정규직 전환은 박원순 시장의 의지가 가장 중요했다. 정부보다 먼저 상시지속적 업무를 정규직화하겠다고 했고, 구의역 참사 이후엔 안전업무직들에 대한 정규직 전환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서울시는 수많은 정책을 발표하면서도 정작 이행에 대해선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예산 부족을 이유로, 산하기관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조정이 필요한 과정에서 발을 빼곤 한다. ‘전시행정’이라 비판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서울시의 약속

오는 3월 1일부로 서울교통공사 소속 1,288명의 업무직 노동자(무기계약직)들도 일반직군(정규직)으로 전환된다. 무기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례는 전국 지자체 산하기관 중 최초다. 그간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선전해 왔던 정부와 지자체가가 ‘무기계약직은 정규직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서울시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서울교통공사는 ‘무기업무직 전면 정규직(일반직) 전환 관련 노사합의서’를 작성하며, 서울시의 ‘노동존중특별시 서울 2단계 발전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번 합의가 서울시의 치적으로 적립되는 것을 지켜본 업무직 당사자들은 기가 찬다. 이번 합의를 위해 고군분투한 6개월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업무직들은 정규직 전환 합의가 서울시의 계획이 아닌, 업무직 전환 요구 투쟁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유성권 업무직 협의체 공동대표는 지난 2월 12일 열린 ‘서울교통공사 비정규직 투쟁의 의미와 과제’ 토론회에서 “서울시, 서울교통공사, 노조 모두 2017년 계획에 업무직들의 정규직 전환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서울시와 공사는 1월 초 보도자료를 통해 ‘기존의 용역 하청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됐다’고 발표한 바 있고, 노조 역시 6월까지만 해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업무직들에게 ‘계획에 없다’는 답변을 해왔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7월 17일 서울시의 업무직 전환 발표는 갑작스럽고 시혜적인 발표가 아닌, 업무직들이 직접 투쟁하고 압박해서 이룬 결과”라고 강조했다.

서울교통공사 업무직 노동자들은 2016년 9월부터 직고용이 됐지만, 여전히 낮은 차별과 처우에 시달리고 있었다. 100여 명의 업무직들은 지난해 5월 1일 노동절집회에 모여 "정규직전환 약속을 지켜라"라고 요구했다. 구의역 사고 이후 서울시가 내놓은 '안전업무 노동자 정규직 전환'을 온전하게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 집회를 계기로 50여 명의 업무직 대표자들이 뭉쳐 '서울교통공사 업무직협의체'를 결성했다. 업무직 협의체는 이후 "차별 없는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각종 기자회견, 1인 시위, 박원순 시장 면담 요청 등 다양한 투쟁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박원순 시장은 2017년 7월 '노동존중특별시 2단계 계획’을 직접 발표하며 서울시 투자출연 11개 기관에서 일하는 무기계약직 2,442명 전원을 정규직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박 시장은“같은 일을 하면서도 각종 차별을 받아온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통해 고용구조를 바로잡겠다”고 말했다. 서울교통공사 무기계약직의 정규직 전환규모는 1000명 이상으로 가장 컸다. 9월에 들어서는 서울교통공사와 지하철 3개 노조가 정규직 전환 노사협의체를 구성해 논의도 시작했다. 하지만 노사 간 이견이 커 교섭 결렬과 재개를 수차례 반복했다. 공사는 8급 신설, 근속 3년 기준으로 차등 전환 등 ‘차별 없는 정규직’과 거리가 먼협상안을제시해반발을샀다.노조의안역시 업무직들의 반발을 사긴 마찬가지였다.

무기계약직의 정규직 전환 반대하는 정규직, 세력화되다

10월 말, 노조는 일반직 7급으로 전환하되 1-2년 승진 유예(서울지하철노조)와 마이너스 호봉제(도시철도노조) 등의 안을 내놨다. 젊은 정규직 조합원들이 시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며 노조를 상대로 집단 탈퇴 압박을 하던 때였다. 혼란 속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반목과 갈등은 심화됐다.

임선재 업무직협의체 공동대표는 서울시가 역할을 방기했다고 지적했다. 임 대표는 “최종 결정권자는 서울시이고, 서울시 의지에 따라 추진 과정이 달라지는데 논의 주체들이 각기 다른 안을 이야기하며 협상안이 자꾸 후퇴한 것은 명확한 지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규직들이 걱정했던 임금 잠식 등의 다른 피해가 없다는 것을 명확히 했어야 한다. 공사도 노조도 서울시가 예산을 지원할 거라고 이야기는 했지만 정작 서울시는 예산 관련 질문에 대해 노사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떠넘기니 정규직들의 반대가 극심해졌다”라고 설명했다.

자꾸 후퇴되는 협의 내용과 일부 정규직의 극심한 반발 속에 업무직협의체와 소수 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공동행동’을 꾸렸다. 이들은 지지부진한 협상을 비판하며 지난해 11월 2일부터 서울교통공사 본사 정문 앞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정책 결정권을 쥐고 있는 서울시청으로 가야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타깃을 분명히 하자는데 힘이 실렸다. 이들은 62일간 천막농성을 이어갔고 합의문이 나온 후인 올해 1월 2일에서야 농성을 철수했다. 당시 농성에 결합했던 한 업무직 노동자는 “가면 갈수록 연대의 발걸음도 적어지고, 고립된 싸움을 이어나가다 나중엔 승리보고대회도 유야무야할 만큼 모두가 지친 상태였다”고 전했다.

공동행동 소집권자인 김대훈 씨는 “정규직 전환 합의는 임단협에서 노조의 양보를 요구하는 공사의 공격카드로도 작동했다”라며 “2017년 마지막
날, 이미 노조 통합을 의결한 서울지하철노조와 도시철도노조는 노조간, 직종간 불화의 불씨를 남긴채 사실상 마무리되고 말았다”고도 진단했다.

입사 3년차 가량의 젊은 조합원들이 노조의 정규직 합의에 불만을 품고 집단 탈퇴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호영 서울지하철노조 교선실장은 정규직-비정규직 갈등으로 비춰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정규직 전환 논의과정을 거치면서 100여 명의 조합원들이 탈퇴했다”라며 “젊은 조합원을 중심으로 짜놨던 노조 사업도 다 어그러졌다”고 말했다. 이 교선실장은 “1월부터 젊은 조합원을 대상으로 이번 합의의 의미를 설명하고, 서운한 점을 듣고 있다.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이들과 청년 세대의 언어를 가지고 노조 존립의 이유와 연대의 가치 등을 소통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라고 했다. 이어 “업무직 노동자들과도 만나 뜻하지 않게 갈등이 장기화되는 것에 대해 사과하고 소통하려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모범사례’ 속의 허점들

당사자들이 협의과정에서 빠진 것도 비판 지점이다.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2월 열린 ‘서울교통공사비정규직투쟁의 의미와 과제’ 토론회에서 “직군을 통합한 정규직 전환을 이루었고,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넘어설 가능성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라면서도 “다만 당사자들이 빠진 채 합의가 이루어진 점은 아쉽다”고 강조했다.

‘소방, 전기, 냉방, 환기’ 등 4개 분야의 직영전환이 뒤로 미뤄졌다는 것도 이번 합의의 한계로 꼽힌다. 5-8호선은 이미 도시철도ENG라는 자회사를 통해 역사시설 정비업무를 따로 떼 운영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는 2월 초 1-4호선의 용역 노동자들을 이 자회사에 무기계약직으로 고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노동자들은 “직영화는 노사정 대표자협의체에서 지난해 나온 약속인데 이 합의를 뒤로 하고 자회사에 눌러 앉히려 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윤동익 도시철도ENG 사무처장은 “우선 자회사로 보내고 재논의하겠다는 식인데 4개 분야 직영화를 1년 가까이 미루고 있고, 교통공사 사측은 인원도 대폭 줄이고, 업무직 정규직 전환과 달리 채용 방식도 다르게 하겠다고 했다. 서울시가 외부적으로만 드러나는 정규직화 성과에 치중하면서 투쟁으로 받아놓은 합의까지 무력화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4개 분야의 직영화는 박 시장의 약속 중 하나였다. 2016년 5월 구의역 참사가 발생한 뒤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의 생명 안전과 직결된 업무, 위험한 업무의 외주화에 대해서는 직영하는 방안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구의역 사고 진상조사단도 지난해 발표한 2차 보고서를 통해 “실제 현장 설비 및 인력 운용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돼 있어 소방설비만 전환하는 것은 공사 직영과 자회사 운영의 분리로 인한 효율성 저하를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며 “공사 직영 전환은 적어도 시설관리 부문에 관한 한 전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4개 분야의 직영전환을 주문한 바 있다.

기관사 자살 방지 대책은 있지만 돈은 없다는 서울시

도시철도공사에서 9명의 기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마다 서울시는 관련 대책을 주문하며 재발 방지를 위해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기관사 사망 방지를 위해 2012년 ‘서울시지하철최적근무위원회(최적근무위)’가 꾸려졌다. 2014년에는 ‘기관사 근무환경 개선단’이, 2016년에는 ‘기관사사망 근본대책 마련을 위한 특별위원회(기관사 특위)’가 차례대로 마련됐다. 이들 위원회는 공사는 물론 서울시의 책임도 성토하며 각 주체들에 권고안을 제시했다.

가장 최근인 2016년 8월 꾸려진 기관사특위는 10개월간 도시철도공사 기관사 근무환경 개선관련 이행점검 및 근본대책을 마련했다. 이를 토대로 기존에 이행하지 않은 대책을 포함해 총 18개의 과제를 제출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6월 ‘기관사 대책 특별위원회 운영결과’를 발표하고 18개 중 10건은 논의를 완료했고, 이행되지 않은 8건도 통합공사가 출범하면 함께 검토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실제 2017년 2월, 서울시와 서울시도시철도공사, 5678서울도시철도노조, 5678서울도시철도노조 승무본부는 특위의 논의 과제인 2인 승무 시범실시 및 기관사 처우개선에 대한 합의를 실시했다. 100명 정도의 기관사 인력을 추가 투입하여 7호선 대공원 승무사업소에서 2인 승무 시범실시를 추진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다만 여기에는 ‘기관사특별위원회의 국내외 비교조사결과 2인 승무가 아닌 1인 승무가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1인 승무에 따른 노동 강도를 고려해 1인 승무수당으로의 전환을 검토한다’는 단서가 달렸다.

서울시는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합의 직후인 2017년 3월 보도자료를 내고 기관사 104명을 추가 확보해 1인 승무로 운영 중인 7호선 일부구간에 2인 승무제를 시범 실시, 기관사의 근무환경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안전관리인력도 역마다 2명씩 총 556명으로 늘리고, 지하철 보안관은 50명을 충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달 안에 5~8호선 승강장 안전문(PSD) 기술인력 175명도 추가 채용하겠다고 밝혀 큰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이 같은 합의는 예산에 발목 잡혀 거의 실행되지 않았다. 강호원 전 사무처장은 “2인 승무 시범실시라는 타이틀을 달기도 민망하다”며 “짧게는 16분, 길게는 40분을 자격도 없는 인턴을 태우고 다녔다. 사실상 기관사들이 인턴을 가르쳐주고 끝나는 피곤한 시범사업이었다”고 했다. 그는 “더 기가 막힌 건 기관사들의 평이 안 좋으니, 2인 승무 시스템에 대해 기관사들의 만족이 높지 않았다며 자기 입맛대로 평가를 해버렸다”며 “지난해 특위에서 단독 근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제대로 해보자고 했지만 비용이 들어 어렵다고 하니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김태훈 전 5678서울도시철도노조 승무본부장은 서울시가 예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전 승무본부장은 “서울시가 행자부 핑계를 대기에 행자부의 공기업팀 담당 과장하고 면담을 했다. 행자부에선 서울시랑 합의를 해야지 왜 우리한테 그러냐며, 서울시와 합의하고 몇 가지 절차만 거치면 행자부도 당연히 인정하고 예산 배정에 협조하겠다고 했다. 결국 그동안 서울시는 행자부에서 안 해주는 걸 어떡하느냐면서 핑계를 대고 있었던 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권고안 이행 완료? 서울시의 ‘일방적’ 주장

성실히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잇따른 기관사의 자살에 서울시는 인력을 충원해주겠노라며 노사 특별 합의를 작성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78명에 대한 인력 충원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강호원 전 사무처장은 “다시 예산 문제를 들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며 꺼낸 게 구조조정”이라며 “휴일을 늘리는 대신 근무표를 더 복잡하게 바꾸자고 하는데 사고가 많아질 가능성만 높아 반대했다”고 말했다.

노-사-정이 각각 추천한 외부인사들로 구성된 최적근무위는 2012년 7월부터 2013년 09월까지 11차례에 걸쳐 7개 분야 약 100가지 세부 권고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안을 보고받은 시장은 각 공사에게 ‘실행계획서’를 설계하라고 지시했으나 각 실행계획서는 크게 비용이 안 드는 비쟁점 영역에 주력하고 예산이 소요되는 권고안은 중장기 계획으로 배치해 개선 의지를 의심받았다.

한인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은 2016년 6월 ‘기관사 자살실태와 해결방안 토론회’에서 서울시에 대한 권고안이 실종됐다고 비판했다. 한 연구원은 “서울시에 경영평가시스템 때문에 발생하는 과도한 경쟁과 전시행정 중심의 현장 운영문제를 개선할 수 있도록 조치할 것과 정비시간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철 연장운행 시간 축소를 검토해달라고 했지만 이러한 권고안에 대해 서울시는 답이 없다”고 했다.

언론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친노동’ 행보에 찬사를 보내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노동자들은 오늘도 그를 향해 약속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서른여섯 무기계약직 청년의 죽음과 기관사들의 연이은 자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반목과 갈등. 모두 ‘노동존중특별시’에서 일어난 ‘과거 같은 현재’들이다. <워커스 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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