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주의 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워커스 세 줄 요약] 신혜영, <스스로 ‘움직이는’ 미술가들-자립적 미술 신생공간 주체들의 생활 경험과 예술 실천 연구>

<<한국언론정보학보>>, 76호, 2016년 4월.


생존의 시대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시대를 지배하는 정서구조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생존일 것이다. 생존의 문제…. 우리 같은 일반 대중이야 그렇다 치자. 언제나 겪는 문제들일 테니까. 그런데 이 문제가 예술가들한테는 어떻게 나타날까.

생존과 예술가라는 말은 어딘지 형용모순 같다. 그들의 삶이 고상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그들이 가난을 버티고 이겨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들뢰즈에 의하면, 철학은 개념을, 과학은 기능을, 예술은 감각을 다룬다. 예술가들은 종종 감각의 첨단에 서 있는 존재들로 이해된다. 촉이 좋은 그들은 누구보다도 세상의 변화를 빨리 탐지하고 그것을 표현해낸다. 몇몇 예술가들에게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헌사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개 인간으로서 예술가가 단지 감각만을 다루며 산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의 관심사가 된 세상에서 그들 역시 살아남아야 하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인간화는커녕 오히려 동물화됐다고까지 여겨지는 현대사회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 맞닥뜨린 예술의 운명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 하나는 생존을 화두로 하는 예술의 의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이냐는 문제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의 첨단을 달리는 이들의 행보가 결국에는 우리 사회의 방향타를 가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신혜영의 2016년 논문, 「스스로 ‘움직이는’ 미술가들」은 2010년대 중반 들어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무르익기 시작한 이른바 ‘신생공간’에 주목한다. 사회경제적 침체가 길어지는 상황에서 젊은 예술가들은 활동 무대가 좁아지는 상황이다. 기성 미술계는 진입장벽이 높을뿐더러 신뢰도 가지 않는다. 자립이 절박해진 예술가들은 이제 도시 곳곳의 숨은 공간을 찾아다니며 ‘하고 싶은 예술’과 ‘해야만 하는 생존’ 사이에서 평형감각을 찾아야 한다. 논문의 연구참여자 말마따나 신생공간이란, “미술씬이 잘 작동하면 애당초 생길 필요도 없는데 부작용에 의해 돌연변이처럼 생긴 것”인 셈이다.

그렇지만 예술사회학적 견지에서 신생공간의 출현은 의미심장한 사건이기도 하다. 신혜영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1. 신생공간의 젊은 작가들 대부분은 제도적인 큰 성공을 기대하기보다는 동료의 인정과 협업을 통해 현재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전 세대들과 달리 정부나 예술시장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인 삶과 예술을 병행하고 있다.
2. 이런 식의 아비투스(성향 체계)는 기성 미술계와 신진 작가들 사이의 상징투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예술 표현의 양식적 차이를 낳기도 하고 궁극에는 예술계의 네트워크 변동과 권력 지형을 바꿀 수도 있다.
3. 신생공간 작가들의 ‘자기 충족적 아비투스’는 과거에 비해 훨씬 유동적인 예술 실천의 면모로 이어지고 있다. 자립과 생존 등을 키워드로 하는 이들의 특징은 현재의 미술생산장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화생산장 전반의 경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선 이들 젊은 작가의 세대적 특성을 보자. 대개 1980년대 초중반에 출생해서 청소년기에 외환위기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이력이 있다. 그동안 미술계 내에서는 대안공간을 비롯한 기존 미술운동들이 소멸하거나 일부 주변화됐고, 작가들의 공적 후원 배경이었던 문예진흥기금은 고갈 위기에 직면했다. 요컨대, 1) 배고픔의 고단함을 아는 젊은 작가로서 이들은 2) 예술운동으로서 내세울 명분을 찾기가 마땅치 않고 3) 그렇다고 해서 외부로부터의 선택과 지원을 기대하기도 어렵게 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싶은 예술을 하면서 동시에 생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자립하는 수밖에 없다. 임대료 걱정이 덜한 도시 주변부의 유휴공간을 찾아 옹기종기 모여서 활동을 하는 것. 그런데 이 선택이 기존의 예술운동과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번 따져보도록 하자.

무엇보다 공간적 안정성이 취약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끔 예술활동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저자에 의하면, 장소 특정성이란 것이 사라지면서 예술실천 자체가 유동화된다. 실제로 그들의 작품 상당수는 협소한 공간에 맞춰 설계되곤 하며, 2015년 <굿-즈> 행사에서처럼 부분적이고 과정적인 요소가 작업의 결과물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제야말로 작가들은 진정한 의미의 시장을 상대로 작업을 하게 된다. 외부의 공적 지원이나 유력자의 후원이 아니라 익명의 대중들을 상대로 하는 예술실천이 벌어지는 것이다. 2013년에 결성됐던 미술생산자모임으로부터 미술소비자모임이 파생된 것이 단적인 예이다. 따라서 몇몇 환경들이 달라질 조짐이 나타난다. 도시 주변부의 전시공간을 찾는 관람객들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미술관 경험을 할 수밖에 없으며, 작가들 역시 하위화된 장르로 취급받던 ‘굿-즈’ 같은 영역을 넘나들게 된다.

작가 정체성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작가를 둘러싼 다양한 관계망들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2000년대 초반 (비엔날레와 더불어) 열풍을 일으켰던 대안공간 운동과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공간은 말 그대로 기성 미술계에 대한 ‘대안적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그에 반해 신생공간은 그와 같은 명시적이고 정치적인 의제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오히려 대안공간 운동이 2000년대 후반 들어 기성 미술계의 견본 시장으로 소멸됐던 역사야말로 이들의 반면교사가 될 정도다.

게다가 미술계에 불황이 닥치고 ‘예술+노동’이란 것이 쟁점화된 상황. 그런 점에서 보자면, 신생공간이란 것은 출구가 부재한 상황 속에서 출몰해온 임의적 예술활동들의 결집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들은 이제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작업 활동 외에도 알바를 병행하는 등
이른바 ‘프리터족’으로까지 변모하고 있다. 기성 미술계를 바꿔놓겠다는 야심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들의 선배들처럼 무기력해질 공산이 더 크니까 말이다. 그들을 작가로 만드는 동기란 거창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동료들의 상호 인정과 소소한 즐거움 정도가 된다.

그들은 자기들 활동이야말로 대안이라는 둥 단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그럼 대체 뭘 하겠다는 것일까’라고 반문을 품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글쎄, 아무 것도 정해진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정체가 뭐냐고 묻는 것이야말로 결례가 아닐는지. 어쨌든 신생공간의 등장으로 인해 어떤 문제들의 지형이 바뀌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지속가능성이란 비교적 실용적인 문제들로부터 시작해서 예술의 미래라는 역사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물론 저자의 결론처럼 그 결과를 예단하기는 매우 어렵다.<워커스 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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