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괴로움

[워커스] 이어말하기

[출처: 김한주 기자]

나는 해직교사다. 해직 생활 3년 차가 돼 간다. 2015년에 전임을 나왔으니, 전임생활은 4년 차가 된다. 나는 계급의식이 투철하지도, 자본주의에 대해 잘 알지도, 다른 노조의 활동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는, 그야말로 내가 속한 지회에서만 활동했던 현장 조합원이었다. 그런 내가 어쩌다 해직교사가 되었나.

1999년에 발령을 받고, 이듬해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20여 명의 선생님들이 한 번에 전교조에 가입했다. 나도 그런 흐름을 타고 가입을 했지만, 활동은 하지 않고 회비만 내는 조합원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학교의 부조리와 불합리한 관행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게 되는 날이 찾아왔다. 교장실에 찾아가 처음 교장에게 문제제기를 했던 날, 교장은 대답 대신에 교실 문을 벌컥 열고 수업 중인 나를 향해 아이들 앞에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교장실로 향했다. 행동은 생각처럼 차분하게 되지는 않았다. 나 역시 아까 교장이 했듯, 교장실 문을 벌컥 열고 소리를 질렀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다음엔 가만히 있지 않겠노라고. 이후로 다시는 교장이 교실 문을 열고 소리 지르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분회 활동에서는 좋은 날보다 힘든 날이 많았다.

그런데 2009년 이후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교조처럼 승진을 빨리 시켜주는 조직이 없다고들 하는데, 나 역시도 그랬다. 2009년 일제고사로 파란을 겪으면서, 투쟁력이 급상승했다고나 할까. 불의에 저항한다는 자긍심이 있었지만, 처음 해보는 싸움은 참 힘들고 지난했다. 소청심사위, 징계위를 오가며,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노와 가슴떨림으로 1년을 살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지회집행부를 하고, 지회장을 했는데, 어느 순간 지부 전임자가 없다며 여러 번 권유하길래 내가 능력이 되나 싶으면서도 엉겁결에 수락했고, 그렇게 지부에서 1년 일하다가 어느 순간 해직이 됐다.

해직교사라는 말은 엄혹한 시대를 대변하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이명박근혜’를 지나 문재인 정부에서도 여전히 해직교사라니, 참 어이가 없다. 간혹 누군가 직업을 물으면, “교...”(사)라고 답하려다 말을 끝맺지 못하고 만다. 요즘처럼 정체성의 혼란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 정체성의 9할인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나니, 나의 직업은 무엇일까를 넘어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심지어 이렇게 간절하게 학교를 그리워한 적이 있나 싶다. 처음에는 단순히 방학이 그리웠다. 충전을 하고, 필요한 연수를 듣고, 내가 배우는 모든 것이 수업 자료가 되던 그 방학이 간절하게 그리웠다. 방학의 고비를 넘고나자 더 간절히 생각나는 것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소리, 아이들이 서로 배우는 소리, 나의 말과 생각에 공감을 표하던 그 많은 눈빛, 표정과 행동, 교실을 가득 채우던 활기찬 아이들의 소리가 간절하게 그립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 뒤 아이들이 남긴 흔적과 함께 찾아오는 고요함과 바깥 음식에 길들여지던 4년 내내 학교급식조차 그리웠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수업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의 내 삶은 학교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우리는 멈출 수가 없다

퇴직한 한 선배가 집회에서 그런 말을 했다. 전임을 2년하고 나면, 먹먹하고 헛헛해지는 병에 걸린다고. 누구나 2년 정도는 온 열정을 다해, 최선을 다해 전임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계속되는 긴장과 스트레스를 견뎌낼 장사는 없다. 처음 하는 전임생활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설마 하던 해직이 현실화되고, 언젠가 될 거라고 믿었던 복직이 저만치 멀어지고 나니 (청와대에 애초 기대도 없었지만, 이제 기대조차 사치였음을 깨달았다) 단단히 조였던 줄 하나가 툭, 하고 끊어진 느낌이다. 시작은 있었는데, 끝이 어디인지 모를 길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정년이 다 되어가는 위원장이 폭염 속에서 목숨을 걸고 한 달 가까이 단식을 했는데도 청와대는 묵묵부답이다. ‘이명박근혜’ 때도 시도하지 못했던 정책을 하나둘 시행하려는 것을 보니 이 정부의 본질이 낱낱이 드러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교육과 노동에 대한 올바른 정책 없이 이 정부가 성공하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교육에 대한 원칙과 헌신으로 일관해 온 전교조 없이 교육을 말한다는 것은 형용모순일 뿐이다.

노조할 권리, 노동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지키려다 34명이 해직됐다. 해직 이후의 삶은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사는 것 같다. 지난 4년간 소소한 일상적인 삶이 없어졌으며, 그동안의 인간관계도 대거 끊겼다. 여타의 모임에도 참석할 수가 없다. 집은 그저 잠만 자는 곳이 된 지 오래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 출근하던 숱한 날들 속에 피로는 누적되고, 몸은 각종 증상과 징후로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병원을 가는 것도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의 일이라 묵힌 증상들은 병이 되어 찾아온다.

조합의 녹을 먹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끝없는 책임감, 잠시라도 놀거나 쉴라치면 찾아오는 낯선 자기검열과 수시로 마주쳐야 했다. 무언가 일이 되게 하려면, 일과시간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집회나 기자회견, 각종 회의는 물론이고, 누구 일이랄 것 없이 부족한 데가 있으면 메꿔야 해서,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 자체가 부족하다. 그래서 야근을 하고, 주말을 반납하기도 하고, 휴일이나 연휴에도 일할 때가 많았다. 한정된 수의 전임으로 교육부의 각종 ‘뻘 짓’을 막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전임을 하면서 겪은 많은 경험 속에서 나는 성장한 것 같다. 내 인생에서 이토록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때가 없었던 것 같으니 말이다. 지회 활동만 할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됐고 알게 됐다. 전국의 수많은 조합원이 전교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에게 전교조가 어떤 조직인지, 자발적인 활동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어떠한 헌신으로 이 조직을 지켜왔는지 알게 됐다. 과거에는 전교조가 필요해서 활동했지만, 이제는 내가 전교조에 필요한 존재가 됐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어 가듯, 이 정부의 모순도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멈출 수가 없다. 우리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 자리를 내어주고, 소소한 일상을 살아내면서 다시 교육노동자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성취감에 한껏 취해보고 싶다.[워커스 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