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혐오를 전복해 인권을 쟁취할 것이다”

[기고] 인천퀴어문화축제, 살인적 분위기 속에 고립된 10시간...“우리는 여기 있다”

[출처: 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알]

2018년 9월 8일, 동인천역 북광장은 이른 아침부터 혐오세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가 열렸어야 할 그곳에, 축제를 즐기기 위해 행복한 마음을 가득 안고 동인천역에 도착한 이들은, 축제의 열기는커녕 자신들을 향한 끔찍한 혐오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폴리스라인은 유명무실하게 바닥에 내팽겨져 있었으며, 퀴어와 앨라이들*은 한쪽 구석에 고립돼 잘 보이지도 않았다. 보이는 것은 ‘사랑해서 반대한다’는 등의 피켓을 들고, ‘동성애 반대’를 연신 외치고 있는 수많은 살의였다.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의 공식적인 시작 시각인 11시부터 행진을 끝내 마치기까지의 시간을 계산을 해보면, 퀴어와 앨라이들이 고립된 시간은 무려 10시간이다. 그 10시간 동안 퀴어와 앨라이들은 화장실도, 물을 마시는 것조차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고립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히 물리적인 고립으로 사유할 수 없다. 성소수자로서 살아내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는 것, 세상에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등 그 존재와 삶 자체를 가리고야 말겠다는, 보지 않겠다는 불의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퀴어와 앨라이들은 고립을 넘어선 폭력을 당했다. 혐오세력은 몇 되지 않는 경찰들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고, 그중 몇 명은 끝내 경찰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폭력을 저질렀다. 그들은 성소수자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게 가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분위기였다. 살인적인 언어와 눈빛, 행동이 성소수자를 향해 난무했다.

살의를 방조한 공권력

공권력은 이날의 ‘살의’들을 방조했다. 인천 동구청은 혐오세력의 환호를 듣기 위해, 동인천역 북광장의 사용에 대한 절차에서, 불합리하고 무리한 행정적 절차를 인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에 요구했고, 경찰들은 미온한 태도로 살의의 현장을 제지하지 않았다. 공권력의 그 권력이 왜, 어떻게, 누구에게 향하는지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억압받는 자들의 수많은 투쟁에서, 그 ‘억압’을 행하는 것이 공권력이었을 때가 많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알고 있다. 그 힘이 굉장히 강력하다는 것을. 그런데 방조했다. 성소수자들을 향한 살의를 방조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성소수자 대중에 비해 성소수자들의 사회적 타살로 인한 죽음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많은 연구결과의 통계로 밝혀져 있다. 그럼에도 그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막기 위해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살의를 방조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현 정부의 인권경찰 선언은 거짓이었다. 공범인 것이다. NAP(국가인권기본정책계획안)의 후퇴, 정치인들의 비겁한 탈출구인 사회적 합의, 그리고 ‘나중에’. 이런 흐름 속에서 동인천역 북광장에서 볼 수 있었던 살의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실제로 성소수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공권력은 이날의 ‘살의’들을 방조한 공범이다.

  혐오세력의 피켓을 이용해 참가자들이 다시 만든 피켓 [출처: 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알]

퀴어력力, 혐오를 전복시키는 능력

인천시는 우리를 국민이자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 참가자는 어떤 경찰이 혐오하는 자들을 달래주며 ‘수고하신다’고 말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행진을 위해 준비됐던 차량은 혐오하는 자들에 의해서 바퀴에 구멍이 나고 물리력으로 막히기까지 했다. 폭언이 끊임없었던 것은 물론, 목 졸림을 당한 퀴어도 있었다. 여성으로 보이는 퀴어/앨라이만 골라 신체적 폭력을 가하는 자들도 있었다. 물리고 멍이 들고 상처가 나서 피가 나기도 했다. 휠체어를 이용한 장애인 참가자는 휠체어에 탄 채로 바닥에 밀려 넘어지기까지 했다. 퀴어와 앨라이들이 가지고 있던 무지개 아이템들도 혐오하는 자들에 의해 찢어발겨 바닥에 버려졌다. 우리의 행진을 저지하기 위해 혐오하는 자들은 트럭 등의 차량까지 동원했다. 심지어, 경찰은 오히려 우리에게 해산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혐오하는 자들이 아닌, ‘적법하게 집회신고를 낸 우리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그 모든 상황은, 매우 저급했다.

그럼에도 그 끔찍한 환경 속에서 퀴어와 앨라이들은 단 한 순간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의 삶을, 목숨을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걷는다고(행진한다고) 뭐가 달라져?’ 퀴어와 앨라이들은 이런 소리를 들으며, 아니, 더 끔찍한 소리를 들으며 행진을 끝끝내 마쳤다.

비록 원래의 계획대로 행진이 이루어지진 못했으나,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의 행진은 그렇게 누가 말한 것처럼 그냥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진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하고, 더 나아가 이 사회가 성소수자를 긍정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기 위한 행동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절박하게, 그러나 웃으며 행진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퀴어력力은 감히 혐오하는 자들도, 공권력도, 건드릴 수 없이 끈질기고 강하다. 심지어 몇몇 퀴어들은 혐오하는 자들의 피켓을 이용하여 우리의 사랑을 다시 표현하고 만들어냈다. 혐오를 전복하여 인권을 쟁취하는 것, 그것이 퀴어력力이다.

“우리는 여기 있다”

“우리는 여기 있다.” 결국 인천에 크게 울려 퍼진 말이다. 아무리 혐오하고 반대하고 부정해도, 우리의 존재가 우리를 증명한다. 우리가 많은 눈물을 흘린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의 눈물은 그저 슬픔과 서러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물은,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을 방해한 모든 자에 대한 분노와 반격을 위한 의지를 포함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낸, 우리의 인권에 생채기를 낸 그 모든 자들, 긴장하시라. 우리는 우리의 그 모든 죽음과 삶의 역사를 끊임없이 그려낼 것이다. “우리는 여기 있다.”

*[페미위키] 앨라이(영어: ally)는 성소수자 차별에 대해 차별 당하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그 차별을 반대한다는 뜻에서 서로에 대한 연대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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