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 노동자 하나, 트랜스젠더퀴어 노동자 리나의 이야기

[세계여/성노동자대회 기획연재] n개의 성, n개의 노동, n개의 노동자, n개의 노동현장②

[기획자 말] 10월 27일 청계광장 프리미어 빌딩 앞에서 세계여/성노동자대회가 열립니다. 세계여/성노동자대회는 노동의 성별화와 성적 위계 속에서 비가치화되고 가려진 노동들을 드러내고, 직접 우리의 노동을 이야기하며 선언하는 자리입니다. 이 기획을 통해 제1회 세계여/성노동자대회 준비위원회는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 노동의 현장들과 다양한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세계여/성노동자대회 페이스북 페이지/링크)


[출처: 픽사베이]

레즈비언 자동차 정비 노동자 김하나 씨 이야기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많이도 했습니다. 음식점, 목욕탕청소, 놀이공원 운영자, 호텔조리사 보조, 웨이트리스, 바나나 농장, 호텔 하우스키퍼, 마트 판매원 등등.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는 최저임금을 받으며 가장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어리니까, 용돈 버는 수준이니까 그러겠지 사회에 나와 ‘취직’을 하게 되면 달라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27살에 법률 사무소 사무직에 취업을 했습니다. 전공을 살려 열심히 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애매한 위치만 주어질 뿐이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해 어제 사용했던 컵들을 설거지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모든 직원이 사용하고 올려놓은 개인 컵까지 설거지를 했습니다. 나중엔 손님용 컵들만 설거지 하는 것으로 피 터지게 투쟁하여 쟁취했습니다. 제 다음으로 들어온 친구에게 이 일 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중요하고, 경력이 될 만한 일들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서류 심부름, 우편물 심부름을 하며 1년이 갔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고 실력이 부족해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내 일’이라는 것이 생기긴 했지만 실력과 경력을 쌓아 간단 느낌보단 언제나 대체 가능한 부속품 같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출처: 픽사베이]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니 여성 직원들의 모습과 남성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주도적인 일을 하는 여직원은 사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반장은 남자가, 부반장은 여자가 같은 느낌이 사회에서도 여전했고 거기에 더 이상 있는 것이 무의미해졌습니다.

그리곤 30살이 가까워질 무렵 저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기술을 배워 나이가 들어도 일을 놓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찾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지는 많지 않았고 진입장벽이 낮고, 사회에서 제공하는 재취업 교육으로 공짜로 6개월 동안 정비학원을 다니며 자동차 정비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어렵게 카센터에 취업을 하였습니다.

사장은 나에게 여성으로서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세심함? 친절함? 꼼꼼함? 저에겐 무엇도 없었고 심지어 기술도 없었습니다. 학원에서 배우고 국가가 보증한 자격증은 사실 실전에선 쓸모가 없었습니다. 실수투성이에 밥만 많이 먹는 ‘여성스럽지’ 않은 여성정비사를 사장은 최저임금도 쳐주지 않고 한 달에 100만원 남짓 주면서 그것마저 아까워하다가 2달만에 잘랐습니다.

재취업하기까지 3개월이 걸렸습니다. 자동차 정비 직업군에서 여성의 업무는 대부분 리셉션, 경리 자리였고 어쩌다 어드바이져로 상담하는 자리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직접 차를 고치고 싶었고, 그런 자리를 찾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출처: 픽사베이]

하지만 기적적으로 노동자 30명 정도로 규모가 큰 1급 정비소 일반정비 파트에서 다시 일하게 됐습니다. 다시 일하게 돼 기뻤지만 큰 사업장인 만큼 손님도 끊이질 않았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갈 때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들어가 라면과 함께 마시고 자고 일어나 출근하길 반복했습니다. 이 생활을 일을 시작하고 한 달 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일이 고되 온 몸이 아파 집에 오면 아무것도 못하고 잠이라도 푹 잘 요량으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사업장도 처음으로 여성을 일반정비사로 고용한 상황이어서 저의 존재는 실험 대상이었고, 모두 제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잘해내고 싶은 마음에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 곳은 남성 직원들의 샤워장, 휴게실, 탈의실, 개인 옷장도 있었지만 여성 직원들에겐 없었습니다. 남자 직원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일을 하며 땀을 많이 흘리고, 옷이 더러워져 퇴근할 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하지만 여성 직원들은 대부분 리셉션에 앉아 일을 했고, 직원 수도 남자직원에 비해 적기 때문에 여성 직원의 공간을 만들어 주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겐 공간이 필요했지만 비용을 들어 만들어 달라고 하기엔 부담스럽고 염치가 없었습니다. 저만 아니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던 곳에서 제게 일을 시켜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그런 것까지 만들어 달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조금 친해진 동료들은 저의 결혼, 외모, 태도에 대해 말할 때 ‘예의’ 같은 건 원래 없었던 것 처럼 ‘하이힐을 신고 일해라’ ‘아무리 기름때 묻히는 일을 하지만 출근할 땐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와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여자면 여자답게 굴어라’ 등등 성희롱으로 걸면 걸리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면서도 날 걱정하듯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참을 수 있었던 건 어느 정도 평등한 위치에서 동료로서 ‘너나 잘해’라는 식의 대꾸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상처를 안 받을 순 없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며 저는 ‘사회성을 기르라는 것이 이런 말들을 듣고 흘리라는 것인가?’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경영자는 매달 달성한 기술공임(매출)이 많은 사람을 뛰어난 노동자인양 칭찬하고, 낮은 공임을 기록한 노동자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몰아 임금을 올려주지 않는 근거로 사용했습니다. 몇몇 동료와 저는 이것이 부당하다며 공임을 평준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열악한 노동환경, 낮은 임금, 구조적인 착취에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을 찾아 이직을 했고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직장에서 단 한 곳도 차별이 없었던 곳이 없었습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모습입니다만, 이미 남성들 위주의 노동사회에서 여성인 나의 노동력의 필요성과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무거운 것은 함께 들면 되는 것이었고, 누군가에게 일이 집중되지 않도록 분배를 잘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노동자들을 하나 되지 못하게, 크게는 여성, 남성으로 나누고, 생산력의 기준으로 나누고, 직급으로, 연차로 나누는 것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더 쉽게 착취하기 위한 수단이지 않나 싶습니다.

[출처: 픽사베이]

트랜스젠더 서비스직 노동자 리나 씨 이야기
“꾸밈 노동에 임금을 지불하라!”


2016년, 여성 노동자에게만 메이크업 등의 ‘외모 꾸미기’를 요구하던 CGV를 규탄하는 알바노조 시위의 구호였습니다. 보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몇 년 동안이나 매일 출근과 동시에 꾸미기를 해왔지만, ‘꾸미기’ 또한 ‘노동’이며, 내가 사회에서 여성으로 인식되는 노동자이기에 부당하게 강요받아온, 임금을 지불받지 못한 노동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겪어온 지워진 여/성 노동의 이야기입니다.

서비스직 여성 노동자가 가진 얼굴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스스로를 FTM 트랜스남성 스펙트럼 어딘가에 위치하는 사람으로 정체화 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의료적인 트랜지션은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10여 년 가까이 서비스직에서 ‘여성 노동자’로 일해오기도 했습니다.

여성 노동자에게만 강요되는 꾸밈은 나에게 있어서 공기처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메이크업이나 헤어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계속해서 지적받고 벌점이 부과되는 등 인사상의 불이익이 생기는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같은 업무를 하는 남자 동료는 ‘깔끔한 헤어와 면도’만을 해도 근무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지만, 여성 직원은 눈썹 모양과 아이섀도우, 입술 색깔, 볼터치까지 일일이 지적받고는 했습니다. ‘맑은 빨간색의 립스틱’ 등 메이크업 컬러가 구체적으로 지정된 곳도 있었습니다. 상사는 백화점 브랜드의 립스틱을 모범적인 컬러의 예시로 들었습니다. 10시간이 넘는 근무시간동안 흐트러짐 없는 메이크업을 유지해야 함에도 여직원 유니폼에는 주머니가 달려 있지 않아서 따로 파우치를 챙겨 다녀야 했습니다.

여성에게는 풀메이크업을 한 것이 근무 중 가져야 할 얼굴의 기본값인 듯 했습니다. 똑같이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맨 입술이어도, “아파 보인다” “입술에 뭐라도 좀 발라라”라는 지적은 나에게만 돌아오곤 했습니다. 서비스직에서 여성 노동자가 가질 수 있는 외모는 정해져 있습니다. 남자 유니폼은 크고 넉넉한 사이즈도 얼마든지 구비돼 있지만, 여자 유니폼은 55, 66까지밖에 없는 근무처도 많았습니다. 분명 규정상으로는 여직원도 숏컷을 할 수 있다고 나와 있었지만, 정작 근무 현장에서 짧은 머리를 한 여성 직원은 단 한명도 찾아볼 수 없을 때도 많았습니다.

[출처: 픽사베이]

“이제 남자 탈의실 가야겠다?”

내가 트랜스남성이 아니었더라도 ‘우리 매장의 꽃인’ 여직원이기에 이래저래 외모를 꾸미라는 지적은 여전히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젠더 디스포리아(gender dysphoria: 트랜스젠더가 지정성별과 성별정체성이 일치하지 않음에서 느끼는 신체적·사회적 불편함 혹은 불쾌감)는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비스직으로 근무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머리를 싹둑 자르고 출근했습니다.

그리고 자그마한 일탈이 아닌 일탈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기존에 입던 유니폼이 작다는 핑계로 남성용 바지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성별을 불문하고 안경을 착용해선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남자 직원들은 안경을 쓰고 근무해도 그다지 지적받지 않았습니다. 왠지 오기가 생겨 구석에 박아둔 뿔테 안경을 쓰고 출근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말’로 지적이 들어왔습니다. 내가 맡은 포지션은 고객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고 응대하는 일이 대부분이니, 업장의 ‘꽃’인데, 너무 편한 것 아니냐며. 예전이 더 예뻤다며. 저는 지금이 더 나은 것 같은데요!, 라고 외치며 바꾼 차림새를 고수하자 한 상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리나 씨, 이제 뒷모습만 봐서는 여자인지도 모르겠는데? 남자 탈의실 가야하는 거 아냐?”

지금은 웃으면서 뒷걸음질로 엉겁결에 성별정체성을 존중받았다고 농담 삼아 말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불쾌하기만 했었습니다. 그렇다고 실제로 남자 탈의실을 이용하게 됐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내가 일하던 곳에서 ‘여성’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머리가 짧고 바지를 입은 여성은 서비스직 노동자로서, 또 근로자로서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머리 길이와 화장의 유무가 고객을 대하는 태도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닌데요.

내가 여자가 아니라면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일까요? 실제로도 내 성별정체성은 여성이 아니니, 만약 트랜스남성이라 커밍아웃한다면 불필요한 꾸밈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트랜스젠더, 또 성소수자로 일하기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구직 자체에 어려움을 겪거나 의료적 트랜지션을 진행하며 그동안 커리어를 쌓아온 분야에서 경력 단절을 경험합니다. 나는 아직까지 의료적 트랜지션을 진행하지 않았기에, 직장에서 커밍아웃하지 않고 여성으로서만 일한다면 ‘트랜스젠더라서 겪는’ 노동 현장에서의 어려움은 상대적으로 덜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유니폼이나 화장 규정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근무처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어쩌다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상사에게 들키고 레즈비언이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트랜스젠더라고 답했습니다. 그 뒤로 바지 유니폼을 입기라도 하면 “그렇게까지 티를 내야하냐”라며 기존에는 없던 외모 지적이 갑자기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음에도 트랜스젠더로서 위협을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무할 때, 트랜스젠더 여성처럼 보이는 손님이 레스토랑을 방문했었습니다. 어떤 직원은 다른 포지션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를 굳이 무전으로 호출해 그 손님을 구경하게 하고는, “재미 있는 거 보여줬는데 내가 고맙지 않냐”라고 말했습니다. 정말로 트랜스젠더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 믿는 호의(?)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소름 돋는다, 라며 직원들이 모인 공간에서 해당 손님을 두고 한참을 떠들기도 했습니다.

함께 일했던 직원들에게 트랜스젠더란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일 뿐, 내 옆에도 있을 수 있는 동등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나는 대부분의 지인들에게 커밍아웃을 마친 상태였고 트랜스젠더 인권과 관련된 여러 활동도 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직장에서는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트랜스젠더임을 드러낼 수 있었다면, 과연 당사자인 나에게도 그 손님을 구경시켜 주었을까요?

서비스직. 커밍아웃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 성소수자. 노동 현장에서의 나는 다양한 정체성 속에서 존재해왔습니다. 여성 노동자였기에 업무 외적으로도 꾸밈노동을 강요받아야 했었고, 트랜스젠더로서 다른 젠더 표현을 할 때마다 계속해서 압박을 받아왔었습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음에도 다른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폭력을 지켜보며 위협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노동 현장에서의 차별과 배제는 한 가지 이름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겪어왔던 삶의 결을, 차별받거나 배제되었던 노동의 경험을, 그래서 지워져온 이름의 노동을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언젠가는 그 이름이 있는 그대로 오롯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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