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페미니즘과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만나다

[워커스 인터] 녹색스카프와 국가폭력

[출처: Emergentes]

‘더러운 전쟁’ 속 하얀색 스카프가 등장하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는 ‘국가재건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잔혹한 군부독재를 경험했다. ‘더러운 전쟁’이라 불리는 국가폭력의 한가운데 1977년 실종된 자녀를 찾는 여성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군사정권은 공공장소에서 세 명 이상 한 자리에 모이는 행위를 금지했다. 여성들은 둘 씩 짝을 지어 5월 광장 가운데 서있는 조형물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천천히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머리에 흰 스카프를 둘렀다. 더러운 전쟁의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반군사독재운동의 상징이 된 ‘5월광장 어머니회’는 그렇게 시작됐다. 스카프를 뜻하는 스페인어 파뉴엘로(pañuelo)와 스카프를 상징물로 삼아 집단행동을 하는 파뉴엘라소(pañuelazo)는 아르헨티나에서 매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페미사이드 속 녹색 스카프가 물결을 이루다

2017년 9월 수천 명의 여성이 녹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을 행진했다. 40년 전 여성들이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하얀색 스카프를 둘렀다면, 녹색 스카프를 두른 여성들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선택할 권리를 요구했다. 2003년 ‘결정할 수 있도록 성교육을, 낙태하지 않을 수 있도록 피임법을, 죽지 않을 수 있도록 합법적 낙태를’ 요구하는 70여 명의 페미니스트는 ‘합법적이고 안전한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는 낙태 시술을 위한 전국 캠페인’을 조직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10년 이상 계속된 캠페인의 결실은 2017~2018년 ‘녹색 스카프의 물결’로 나타났다. 그리고 201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하원은 임신 14주 내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비록 8월 8일 상원에서 찬성 31표 반대 38표 기권 2표 불참 1표로 부결됐지만, 정작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상원의 결정을 녹색 스카프 물결의 실패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 기득권세력을 상징하는 상원의 성격을 명백히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한다. 남성 기득권 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의회를 제외하고 학교, 직장, 거리, 가정 등 여성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낙태는 충분히 설득력을 지니게 됐다. 적어도 ‘낙태’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아르헨티나에서 ‘낙태’는 더 이상 금기어가 아니다. ‘낙태’라는 말을 해방시킨 사람은 의사나 법조인이 아니라 여성 자신이다. 매년 50만 건의 낙태시술을 위해 수술대에 오르는 사람들, 수술대에 오르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행진에 나설 만큼 낙태 합법화 운동이 지지를 받게 된 배경에는 2015년 ‘니 우나 메노스(ni una menos)’라는 여성대중운동이 있었다. ‘니 우나 메노스’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15년 3월 다이아나 가르시아가 살해된 후였다. 19세의 다이아나 가르시아는 살해당한 후 투명한 비닐봉지에 휘감겨 버려졌고, 비닐에 감싸인 19세 어느 여성의 시신 모습이 SNS를 통해 유포됐다. 아르헨티나 문인들은 사회의 일부가 되어버린 페미사이드와 젠더폭력에 반대하는 릴레이 문화예술행사를 제안했다. 그들은 이렇게 적었다.

“비닐봉지 속의 여성이 우리입니다. 너무나 많은 우리가 비닐봉지에 휘감겨 있습니다. 비닐봉지를 찢고 나옵시다. 아무도 그곳에 남아있지 않도록 합시다(ni una menos).” 그들은 비닐봉지를 찢고 나와 읽고 말하기를 제안했다. 니 우나 메노스는 살해당한 여성들이 살아있는 여성들의 입을 통해 말하는 행위, 그리하여 자신의 죽음을, 우리 여성의 죽음을 입 밖으로 꺼냄으로써 더 이상 그 누구도 비닐봉지에 담겨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두 달 후인 5월 19일에는 14살의 치아라 페레스가 임신한 상태에서 남자친구에 의해 살해당한 후 뒷마당에 암매장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드디어 비닐봉지를 찢고 모습을 드러냈으며, 사회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6월 3일 대규모 시위가 아르헨티나를 뒤흔들었다. 니우나메노스는 수천수만 명의 여성이 외치는 구호이자, 아르헨티나 역사상 유례가 없던 여성대중운동의 이름이 됐다.

젠더폭력과 국가폭력의 연장선 위에서

니우나메노스 운동은 곧 낙태 합법화 운동으로 계승됐다. 여성대중운동은 적절한 시기에 새로운 이슈를 수혈 받으며 생명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페미사이드와 낙태는 여성대중운동의 확산 과정 속에서 순서대로 등장한 여러 이슈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니우나메노스 운동을 통해 아르헨티나는 처음으로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여성대중운동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기조를 따르는 가부장적 국가권력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니우나메노스 운동을 통해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사회에 균열을 냈을 뿐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을 스스로 뒤틀기 시작했다.

남성에 의한 여성폭력이라는 해묵은 사회적 과제는 남성을 향한 분노에 갇히는 대신 국가를 다시 사고하게 만들었다. 아르헨티나 페미니즘 운동은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이 국가와 정부가 행사하는 폭력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명백히 인식했다. 젠더구조를 바탕으로 남성이 여성을 향해 가하는 폭력은 가시적이고 명백한 물리적 형태로 드러나지만 국가와 정부가 여성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은밀하고 치밀하다. 아르헨티나 페미니즘 운동은 젠더폭력과 국가폭력이 맞닿아 있음을 인식했다. 국가폭력은 40년 전 군사독재시절처럼 실종자를 양산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국가는 공인된 신자유주의 정책과 가부장적 구조 안에 둥지를 틀고 있는 정치세력을 옹호하면서 여성을 향해 권력을 행사한다. 그 권력은 여성의 몸 위에서 행사된다. 여성의 몸에 대한 직접폭력과 여성의 몸에 대해 법적인 통제를 행사하는 낙태는 동일선상에 있었다.

아르헨티나 페미니스트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국가와 정부는 매번 여성의 몸을 착취함으로써 여성의 종속을 강화시켰고, 매번 여성의 권리를 방임했으며, 매번 빈곤과 폭력을 가중시키는 신자유주의적이고 자본친화적 경제정책을 반복했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남성의 손으로 실현되는 여성폭력과 살해의 배후에는 여성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으며 남성의 손이 더욱 폭력적으로 변하도록 부추기는 국가와 정부가 있다는 점을 파악하는 중이다. 그래서 합법적이고 안전하고 무료로 보장받는 낙태시술은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는 국가로부터 여성 자신을 되찾아오는 투쟁이다. 아르헨티나에서 합법적 낙태를 위한 투쟁은 가부장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국가에 대한 투쟁을 의미한다. 페미사이드에 대한 저항은 여성의 몸 위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다.

페미니즘 운동과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만나다

아르헨티나는 1980년대 군부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로 이행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했다. 군부독재시절 ‘어머니’로서 투쟁하던 여성들은 정부정책에 의해 가장 유연하게 동원될 수 있는 성격의 노동력이 됐다. 노동을 끊임없이 분절하고 파편화시킴으로써 유연성을 확보해야 하는 국가는 여성노동을 가장 불안정하고 취약한 자리로 옮겼다. 분절되고 차등화된 노동시장의 가장 밑바닥이 여성들에게 배정됐다.

2015년 니우나메노스 운동이 한창 불붙었을 때 마우리시아 마크리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신자유주의 정책을 일관적으로 추진했다. 농축산물 및 광물 수출세를 폐지했고 다국적기업 본국 송금에 대한 제한을 폐지했으며, 전기, 가스, 수도, 교통, 휘발유 등 공공서비스 요금을 올렸다. 초반에는 달러가 유입됐지만 산업에 대한 투자나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18년 초 아르헨티나는 2001년을 연상시키는 경제위기에 봉착했다.

아이러니하지만 2003년부터 10년 이상 아르헨티나 페미니스트들이 끈질기게 요구해온 낙태 합법화 법안은 2018년 3월 마크리 대통령 덕분에 의회에 상정됐다. 그는 의회에서 ‘낙태’라는 단어를 발음한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몇 달 후, 마크리 대통령이 법안을 상정한 이유는 하원에서 통과되지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는 폭로가 터져 나왔다. 일각에서는 경제위기에 대한 불만을 다른 사회적 쟁점으로 옮기기 위해 마크리 대통령이 낙태라는 ‘핫이슈’를 제안했다고 분석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안타깝게도 마크리 대통령은 잘못된 한 수를 두었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페미사이드와 낙태를 더 이상 경제문제와 동떨어진 사안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성이자 노동자로서, 여성이자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여성이자 가사노동자로서, 여성이자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배제된 자로서 자기 몸에 가해지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할 권리를 요구한다. 노동자이자 여성으로서, 비정규노동자이자 여성으로서, 가사노동자이자 여성으로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배제된 자이자 여성으로 신자유주의에 충실한 가부장적 권력에 맞서 투쟁한다. 지금 아르헨티나 페미니즘 운동은 그렇게 성장하고 도약하고 있다.[워커스 47호]


[참고자료]
http://www.parlamentario.com/db/000/000597_proyecto_ive_2018.pdf
https://www.jacobinmag.com/2018/09/argentinas-anticapitalistfeminism
http://www.resumenlatinoamericano.org/2018/06/04/argentinani-una-menos-el-feminismo-popular-y-todas-las-diversidadessexuales-se-hicieron-oir-en-las-calles-documento-sin-abortolegalno-hay-niunamenos-fotos-ii-videos/
https://www.clarin.com/politica/elisa-carrio-revelo-macri-aceptodebatir-aborto-dijeron-ganaba_0_SJzhWUdf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