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김용욱] |
미세먼지의 습격. 발원지가 중국인지 서해안인지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 모르겠으나, 전국적인 현상이 돼버린 환경 문제에 서해안 화력발전이 이슈가 됐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들 대다수는 매우 뒤늦게야 그 사실을 알아챘다.
이런 일에는 일종의 패턴이 있다. 어딘가에서 환경 변화 요인이 작동하고 있는데 처음엔 워낙 비가시적이어서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채지 못한다. ‘아아, 풍요로워.’ 얼마 후 화학물질 과민증(multiple chemical sensitivity) 호소자들이 생겨나는데, 이때만 해도 보통 사람들은 이들을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는 게 고작이다. ‘뭐 저리 유난이야?’ 그러다 강도가 강해지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 상황이 문제적임을 직감하게 된다. ‘콜록콜록.’ 자연히 원인을 찾는다. 처음엔 대개 촌극이다. 삼겹살이나 고등어. 나중엔 장르화된다. 중국 공장, 서해안 화력발전, 경유 자동차 등등.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상황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원인을 찾았다 하더라도 과학적 입증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미세먼지와 화력발전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근대 과학의 정수는 이것이 반드시 인과관계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상식이라 해서 과학적 앎이 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마치 수많은 폐암 환자들에도 담배 산업이 결코 멈추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대개의 중요한 정보는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들이 독점하고 있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능한 건 악다구니밖에 없지 않겠는가. 결국 시민과 시민, 활동가와 전문가, 기업과 지자체 그리고 중앙정부 등이 한 데 뒤엉킨 일대 복마전이 연출된다.
여기봉의 논문 <당진에코파워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을 둘러싼 탈석탄 운동의 전개과정과 의미>는 바로 이 과정을 성실히 담아낸 보고서다. 충남 당진 이야기를 접해본 적이 있는가. 논문은 수도권 거주자들이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며 풍요를 즐기는 동안 당진에 환경오염과 지역사회 갈등이 일어났음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지만, 사실 전반적으로 우리는 무지하거나 무감각하다. 어쨌든 논문에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1. 석탄화력발전소 인근에 건강 및 환경 피해가 견딜 수 없는 수준이 됐다. 그리고 이런 이슈에 휘말린 대개의 지역들이 그렇듯 발전소 측의 회유와 폭력이 시작되면서 석탄화력발전을 고수한 기존 세력과 탈석탄을 주장한 세력 간의 갈등이 나타났다.
2. 발전소 추가 증설이 시도됐는데 처음에는 보통의 증설 반대운동과 비슷했다. 지역사회 내에서 발전소 증설이 중대한 현안으로 급부상했고 전국 규모의 연대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3.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증설반대 주장이 점차 탈석탄 의제화로 변모해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범시민운동이 조직되는 동안, 모종의 상승작용이 나타나면서 문제의식이 전문화되고 보편적 견지를 갖기에 이르렀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 논문은 지역사회 갈등 양상과 환경정책적 시사점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저자 여기봉은 탈석탄 프레임을 통해 분산형 전원 및 재생에너지 도입이라는 사회적 요구를 읽어내는 한편, 사회구성원과의 쌍방향 의사결정을 골자로 하는 정책 프로세스를 촉구한다. 하지만 저자가 밝힌 바를 넘어 이 논문을 통해 (어쩌면 저자가 행간에 숨겨놨을) 배울 점이 더 많다는 생각도 든다.
마을 주민들이 10년 가까이 투쟁하면서 얻은 것은 무엇 일까.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암 환자가 급증할 정도로 아픈 사람이 늘고 소음과 비산 먼지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주민들은 일종의 투사이자 송전 분 야 전문가로 거듭났다. 그리고 작년 말 8차 전력수급기본 계획 확정에 따라 당진에코파워 LNG 전환이라는 성취를 얻어내기도 했다. (여전히 산적한 과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을주민과 지역운동의 성장 서사에 기반한 한편의 영화 같은 정치사회적 성과를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갈등과 성취의 드라마 구조를 소비만 할 게 아니 라면 다소 색다른 토론도 가능할지 모른다. 환경문제에 각성한 주민 또는 시민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효과는 정책적 성과 이상의 논점을 건드리는 지점이 있기 때문 이다. 환경 변화로 인해 우리의 건강과 생명이 위협당할 수 있음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다만, 그 위험이 실제로 다가왔을 때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즉 어떤 윤리에 입각해 이해하고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무거운 주제일 수 있다.
당진 주민들처럼 우리는 누구나 반응이라는 것을 한다. 먼저 신체적 반응. 반응이라 함은 물질의 성질이나 구조가 변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환경 변화는 우리 몸 안에 들어와 특정한 내부-작용(intra-action)을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몸이 된다. 그리고 사회적 반응. 몸의 변화는 마침내 정신을, 그리고 관계를 바꾸기도 한다. 이상한 점이 인지되면 우리는 그 원인을 알고자 노력하고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특정한 실천을 조직하곤 한다. 정보를 뒤지면서 준-전문가적 지식을 쌓기도 하고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다른 누군가와 연결을 도모하기도 한다.
다소 사변 섞인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꼭 그런 것 만은 아니다. ‘특정한 사회적 반향을 얻어내는 과정’ 이전에 ‘시민-전문가의 관계성과 환경정의에 대한 규범이 바뀌는 과정’이 있었고, 그 이전에 ‘비인간적 물질이 틈입해서 우리의 존재 양식이 변화한 사건’이 있었음에 주목한다면 적잖이 중요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준거했던 철학적 전제, 즉 (자아와 타자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던 논리가 일정한 한계 지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주체, 시민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에 (타인, 동물, 사물, 자연 환경 등) 다양한 관계성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개인적으로 여기봉의 연구 결과는 (환경계획학적 보고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다른 방식의 윤리적 태도가 요청된다는, 즉 오늘날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라 부르는 흐름의 중요한 단초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동일한 정치값을 가지는 건 아닐지라도 포스트휴머니즘, 객체 지향적 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인류세(anthropocene) 담론 같은 것들처럼 말이다.
물론 우리의 존재 양식이 이렇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 데 그치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단순한 도덕환원론이나 순진한 시민윤리론에 갇혀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해방과 변혁이라는 정치 형식 외에도 오늘날 정의나 윤리 같은 것들도 정치적 주제로 간주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음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남는 과제는 이런 것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알던 정치와 새롭게 알아야 할 정치는 어떻게 접합할 수 있을까.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워커스 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