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럴(liberal)

[워커스 사전]

[출처: 김용욱]

리버럴은 리버럴리스트(liberalist, 자유주의자)의 줄임말이다. 그러나 ‘리버럴’이라고 영어 표기 그대로 명명할 때는 자유주의자와는 좀 다른 맥락의 의미를 가진다. 자유주의자는 넓은 의미에서 19세기 이후 발전한 근대를 대표하는 정치사상으로서 ‘자유주의(liberalism)’의 범주에서 그것을 자신의 사상적 근거로 삼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홉즈와 로크에서 시작돼 현대의 롤즈와 노직으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사상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고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이념적 기초다. 리버럴 역시 이러한 자유주의 계보의 연장선에 있지만 특히 1990년대 이후에 출현한 특정한 경향을 말한다.

미국에서 리버럴은 민주당-공화당이라는 진보-보수 대항 구도에서 민주당과 그 지지자를 대변한다. 미국과 달리 사회주의 전통을 가진 유럽의 정치지형에서는 리버럴과 사회주의 이념이 대결하면서 리버럴-소셜이라는 대항 구도가 형성됐고, 이는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의 구분 속에 분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영국에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이후, 독일에선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사민당 이후 전통적인 유럽 좌파 정당들은 리버럴과 거의 동의어로 취급됐다. 일본 사회당도 마찬가지다. 냉전 종식 이후 세계화 바람이 불던 시대에 사민주의 정당들의 이념적 전향 혹은 투항 속에서 이 대립 구도는 리버럴로 흡수됐고 이것은 일종의 글로벌한 현상이었다.

일본의 사회학자 이치노카와 야스타카는 일본에서 ‘리버럴’의 부상이 ‘사회’ 혹은 ‘사회적인 것’의 쇠퇴와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정치적 표현으로서의 ‘사회’가 급속히 쇠멸했다. 1993년 니시베 스스무의 논고 <시작할 수 있는가, 소셜 대 리버럴의 항쟁>으로 정치적 논쟁이 촉발될 뻔했으나 시작도 되기 전에 유야무야돼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원래 니시베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지지하며 ‘소셜 데모크라시에 대한 리버럴 데모크라시의 우위’를 주장하려 했던 것인데 1990년대 전반부터 일본 사회에서 ‘소셜, 사회적인 것’의 정치적 의미가 현실적으로 이미 급속히 쇠퇴해버렸고 따라서 논쟁이 시작될 이유도 사라져버렸다. 이후 일본 사상과 언론계는 ‘리버럴’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리버럴은 비슷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민주세력’이라 불리던 과거의 노동운동이나 학생 운동과는 단절해 다른(대안적) 운동방식과 생활방식을 지지하는 리버럴이 나타나고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다. 1990년대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국내적으로는 1987년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형식적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국제적으로는 1989년 페레스트로이카로 소련이 해체되고 1990년대 초반 동구의 민주화 투쟁에서 시작된 개혁 개방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차례로 무너졌다. 대내적으로는 민주세력이 승리함으로써 한국의 사회운동을 오랫동안 규정해 온 ‘독재 대 민주’의 대항구도가 낡은 것이 됐고, 대외적으로는 냉전 구도가 붕괴되면서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라는 이념 구도가 낡은 것이 됐다. ‘자유민주진영’의 승리로 ‘역사의 종언’이 선포되자 냉전시기 ‘민주주의’를 소련 연방 전체주의 국가들을 공격하는 데 적극 활용했던 이 서구 자유민주 진영에게는 민주주의 이념 역시 거추장스러운 것이 됐다. 그래서 서구 민주주의 이론은 한편으로는 대중독재나 포퓰리즘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워 엘리트의 지도를 받지 않는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다른 한편으론 언제든 정치적 계급적 의미로 부활할 수 있는 민주주의에 내재한 인민주권 이념을 지우기 위해 다수결주의나 의회주의 같은 절차적 방법론으로 민주주의를 환원시켰다. 리버럴은 여기서 더 나아가 거버넌스와 같은 탈정치화된 경영학 용어를 민주주의 대체 개념으로 차용했다. 그러나 ‘자유-민주 진영’은 민주주의는 경계하고 흠집을 내면서도 ‘자유’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옹호했다. 동유럽 시민들이 권위적이고 부패한 정부에 대항하는 자신들의 투쟁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불렀음에도 서구의 정치학은 그것을 최종적으로 ‘자유화 운동’으로 정리했다. 자유화는 개방화와 동의어였고 세계화에 대한 대중적 지지의 표어였으며 동유럽의 자유화 개방화 요구를 자유주의자들은 발전을 위한 정당성과 자본주의 체제의 우위를 입증하는 사례로 삼았다.

일본에서 정치적 의미를 지닌 ‘사회’ 개념의 실종도 ‘세계화’ 및 ‘시장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표어를 상징하는 대처의 ‘사회는 없다’라는 문장에서 드러나듯 사회든 공동체든 ‘집단’은 ‘개인’에게 적대적이며 억압적인 실체로 상정됐다. 국가 안에서 사회가 안정될수록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유동하는 자본과 노동이 충돌하게 된다. 이 ‘유동성’에 대한 찬미는 새로운 자유의 특징이었고, 리버럴이 공유하는 노마드적 문화코드였으며, 1990년대 문화적 사상사조에서 사회와 공동체를 해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였다.

한국에서 리버럴의 등장은 문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사상적 정치적 논쟁을 치열하게 거치지도 않았다. 리버럴은 계급적으로 인식되기보다는 ‘신세대’란 애매한 호명으로 등장했으며 ‘386’이란 세대 호칭으로 자기를 표현했다. 이들은 새로운 문화와 사상의 수입을 담당했고, 과거와의 단절과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제시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담론장을 주도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패배에 영향을 받은 국내 사회주의 운동 진영은 패배감과 당혹감 속에서 ‘제3의 길’과 같은 타협주의적 노선을 수용했다. 노동운동 역시 현장 투쟁에 매몰돼 새로운 사상 노선을 정비하지 못하는 과정에서 시민운동 진영으로 담론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일본에서 ‘소셜 대 리버럴’의 논쟁이 시작되지도 않고 사라져버린 것과 유사하게 한국에서는 ‘노동 대 시민’ 논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노동이 전체 운동의 주도권을 잃어버렸다. 노동조합이나 좌파정당이 아니라 제도 내의 시민운동이 전체 운동의 의제를 생산하며 지도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 시기 탈정치화 되고 탈계급화 돼 간 용어로서 ‘시민’은 오늘날 ‘리버럴’에 대응하는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리버럴-시민’들은 민중, 계급, 노동, 혁명 같은 거대담론을 회의하고 부정하면서 동시에 생활세계와 생활정치 미시담론을 수용하고 확산시켰다. 생활세계를 정치화한다는 생활정치 담론의 이론적 급진성은 현실에서 진지전의 의미로 급진화 되기보다는 제도화·개량화로 수렴됐다.

한국 리버럴의 모태, 자본과 진보의 공생

분기점은 1991년과 1996년이었다. 87년의 타협적 봉합 이후 1990년대 들어 노동자 민중들의 거센 저항이 다시 분출됐다. 그러나 정권은 유서 대필 조작 사건과 정원식 총리 달걀 투척 사건을 계기로 운동세력을 전체주의와 폭력성 프레임에 가두고 공안정국을 지휘했다. 노동조합과 학생회에 대한 집요한 파괴 공작이 이어졌고 1996년 연세대 사태로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IMF라는 국가 비상사태가 도래했다. 이 시기 리버럴은 ‘폭력 세력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운동의 대오에서 대거 이탈했다. 당시 지식인들을 비롯한 중간계급은 검찰의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쉽게 용인하고 과격 운동권을 비판하며, 폭력-비폭력 프레임 속에서 자신을 폭력세력과 분리했다. ‘비폭력 평화’ 시민이자 조직과 단체에 속하지 않는 일반시민, 순수시민으로 설정하는 리버럴 개인주의 알리바이는 오늘날에도 유사한 형태로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 90년대의 분기점을 지나면서 과거 민주화 인사들과 노동운동의 기수들은 김문수, 이재오처럼 보수정당으로 투신하는 그룹과 야당인 민주당 진영으로 투신하는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후자는 여전히 자신들을 ‘민주화 세력’의 적자라고 생각해 전향자들과 선을 그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낡은 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과격한’ 노동조합 활동가들이나 ‘시대착오적’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선을 그었다. IMF와 FTA를 적극 수용하며 집권에 성공했던 386이라는 세대 호칭으로 불린 진보 지식엘리트 집단이 한국 리버럴의 모태다. 여기서부터 자본과 진보의 공생이 시작됐다.

특히 자본과 진보가 결합하는 데 ‘문화’가 일종의 접착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는 민주화 이후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싸고 자본 대 노동의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였고 살아남은 운동에 대한 대대적 청산 작업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동시에 1980년대의 학살과 고문의 암울한 흔적을 쾌락과 소비, 문화적 풍요를 통해 지워간 시대이기도 했다. 혼돈의 시기, 반성과 전향은 종종 구분되지 않았다. 공지영과 신경숙, 박일문 등으로 대표되는 ‘후일담 소설’은 운동의 거대 기획 속에 희생된 개인의 모습을 부각하면서 전체주의적 억압과 ‘개인의 자유’를 극적으로 대비시켰다. 어떤 대의명분도 개인의 행복과 자유보다 우선하지 않았다. 마광수와 하일지의 성적 자유주의가 같은 맥락에서 옹호됐다. 배수아와 같은 전혀 다른 문법을 가진 작가들이 등장했고 조정래와 박경리에게는 필수적이었던 역사적 서사나 사회의식 없이도 문장 형식의 심미화나 개인의 경험과 내면에 대한 탐구가 얼마든지 문학의 장르이자 주류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사소설’의 시대가 열렸고 자본 투자가 필수적인 ‘영화’가 문화 산업의 기대주로 부상했다. 문화는 투자시장이 됐다.

조중동 등 주류 언론 매체가 문화면을 증대하고 교수, 변호사, 문인 등 지식인들에게 대거 지면을 할애한 것도 이 시기 중요한 지배의 연성화 전략이자 포섭전략이었다. 이 지면을 중심으로 영향력 있는 여론주도층 셀럽들이 형성됐다. 이 지면 또한 리버럴의 산실이었다. 문화면은 새로운 학문과 사조를 수입해 소개하는 대중 담론장의 역할을 했고, ‘문화좌파’라는 용어도 여기서 탄생했다. 그러나 리버럴 지식계급의 사회적 영향력이 점점 커질수록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은 주변화, 대상화, 소수화 돼갔다.

90년대 리버럴은 세계화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당대 새로운 시대조류를 적극 흡수했다. 그리고 이념 대결의 시대에서 벗어났으며, 온건하고 합리적인 노선을 추종하고, 무엇보다 시장과 자본주의를 수용했다. 이들은 혁명의 불가능성을 선언하고 자본주의를 다른 체제로 극복하는 것에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자본주의를 체제 내에서 ‘새롭게’ 개선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혁신’이란 용어가 리버럴의 표제어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자본과 진보의 대타협이 성립할 수 있었고, 노무현 정부는 그 타협의 산물이었다. IMF 이후 사회변동기에 청년기를 보내면서 세계화 시대의 사상적 문화적 세례를 받은 세대가 이제 중년이 됐다. 이 후세대 리버럴은 앞선 전향자들이 가졌던 노동계급에 대한 최소한의 부채의식도 없으며 노동에 대한 적대성과 문화적 우월의식을 숨기지 않는다. 그들의 지지와 결속에서 탄생한 자본-리버럴 대연정이 문재인 정부다.(워커스 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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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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