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 햄튼은 타고난 조직가였다. 1960년대 변화의 열기 속에서 자라난 그는 대표적인 시민권 운동 단체인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에서 청년들을 조직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1968년엔 시카고로 이주해 미국 전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던 급진적 흑인 단체인 블랙팬서당의 일리노이주 지부에 가담했다. 그곳에서 그는 약 1년 동안 놀라운 활동력을 보여주며 조직의 성장을 이끌었다. 그는 자신들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전위로 생각한 블랙팬서당의 노선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당의 급진적 주장들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한 명의 혁명가를 죽일 수는 있어도 결코 혁명을 죽일 수는 없다”며 불에는 물로, 인종주의에는 연대로, 자본주의에는 사회주의로 맞서야 한다는 그의 연설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블랙팬서당은 햄튼의 주도로 시카고에서 매일 아침 정치 교육과 무료 식사를 제공했으며 경찰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며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그는 시카고의 주요 갱 조직들을 중재해 불가침 협약을 맺도록 하는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인종 집단별로 나뉜 갱 조직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는 인종 간 연대를 주장했다. 흑인의 해방을 위해 블랙 파워가 필요하듯 라틴계와 아시아계 주민 및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도 힘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서로 연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무지개 연합(Rainbow Coalition)’이라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바비 실, 휴이 뉴턴, 엘드리지 클리버 같은 당의 지도부들이 체포와 망명 등으로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햄튼의 왕성한 활동은 더욱 돋보였고, 그는 젊은 나이에도 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로 빠르게 올라섰다.
▲ 프레드 햄튼 (출처 : https://atlantablackstar.com/2018/02/10/fred-hampton-young- revolutionary-gone-soon) |
“혁명적인 국제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나선 혁명가로 죽으리라 믿는다”는 그의 말은 불행히도 현실이 됐다. 미연방수사국장 에드거 후버는 햄튼의 무지개 연합 활동을 감시하고 블랙팬서당의 활동을 분쇄하라고 지시했다. 작전을 위해 특별한 경찰 대원들이 선발됐고, 이들은 블랙팬서당 내의 정보원으로부터 햄튼의 아파트 지도를 넘겨받았다. 사전 정보를 바탕으로 기습한 경관들은 현장에서 블랙팬서 당원들과 총격전을 벌였는데, 90회 이상의 총격 중 단 한 발만이 경관들에게 발사됐다는 사실이 이후 법정에서 드러났다. 햄튼은 침대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했는데, 현장에 있던 그의 약혼자는 그가 약물에 취한 듯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신원을 확인한 경관들에게 고의적으로 살해됐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법정에서 인정되지 않았다. 1970년 햄튼과 클라크의 유족 및 사건 생존자들이 지역 당국과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오랜 공방 끝에 1982년 시민권 사건으로는 최대의 금액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일단락됐다.
“인종주의에는 연대로, 자본주의에는 사회주의로”
힙합은 경찰을 적대시하고 총격으로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음악이다. 따라서 흑인 민중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총에 사망한 햄튼이 힙합 음악인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래퍼 중 한 사람인 제이지조차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한 햄튼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햄튼이 사망한 날 태어났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민중에게 권력을’ 같은 블랙팬서당의 구호들을 자랑스레 인용한다(‘Murder to Excellence’). 오늘날 최고의 랩 스타가 된 켄드릭 라마는 2011년 발매된 자신의 첫 싱글 레코드인 ‘HiiiPower’에서 1960년대의 블랙 파워 운동을 연상시키는 하이 파워 운동을 주장하면서 자신이 블랙팬서당의 뉴턴, 실, 햄튼을 계승하고자 한다는 점을 분명히 언급했다.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래퍼 킬러 마이크는 조금 더 계급적인 이유로 햄튼에게 끌렸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햄튼의 사망 49주기를 기리며 햄튼을 자신의 최고 영웅들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는 “우리에게 죽음을 애도할 만한 대통령이 아무리 많다 한들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죽음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에서 싸우기로 한 이들을 잃은 것보다 민중에게 더 큰 손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애도의 글을 남겼다.
시카고를 대표하는 의식있는 래퍼들인 커먼과 루페 피아스코도 자신들의 고향에서 활동한 햄튼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자 했던 이들이다. 커먼은 자신의 랩이 햄튼이 했던 연설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인물로(‘Food for Funk’), 랩에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최근에는 인권단체를 출범시켜 미국 교정제도의 문제를 지적하는 등 각종 활동에 부지런히 나서고 있다. 루페 피아스코는 최근 발표한 앨범에 ‘프레드 지부장 어록(Quotations from Chairman Fred)’이라는 곡을 실었다. 이 곡에서 실제로 인용되는 어록은 프레드 햄튼의 것이 아니라 그를 비롯한 블랙팬서 당원들이 열광했던 마오쩌둥의 것이지만, 이 곡에는 불에는 같은 불이 아니라 물로 맞서야 한다는 햄튼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루페의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
햄튼의 사망 현장에 같이 있던 약혼자는 당시 만삭이었고, 곧 태어난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지게 됐다. 아버지처럼 활동가로 자라난 그는 1993년 시카고의 한국계 주민이 운영하는 상점에 화염병을 던진 방화 혐의로 18년 형을 선고 받았다. 급진적 힙합 그룹 데드 프레즈는 햄튼 일가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아들 햄튼의 혐의가 조작됐으며 실제로는 그가 아버지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탄압받았다고 주장했다(‘Behind Enemy Lines’). 아들 햄튼은 2001년 석방됐는데, 그는 종종 블랙 스타와 같은 정치적인 힙합 음악인들의 무대에 올라 갇혀 있는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쟁 구호를 외치기도 한다. 그가 정말 억울하게 오랜 감옥 생활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사연은 그의 아버지가 강조했던 블랙팬서당의 투쟁 원칙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인종주의에 인종주의로 맞서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연대로 인종주의에 맞서 싸울 것이다.” [워커스 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