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억 혈세 투입되는 대한체육회, 성폭력 대응 메뉴얼 전무

피해자 지원은커녕 가해자가 고위직으로 복귀하기도, 총체적 난국의 체육계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공공기관으로 분류되는 ‘대한체육회’에 성폭력 관련 규정은 없었다. 성폭력 피해 신고를 접수받거나, 사건을 처리하는 메뉴얼도 없어 기관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지 않고, 보도자료에 피해자 실명을 그대로 내보내는 등 또 다른 피해를 양산했다. 체육계를 대표하고, 정부로부터 연간 3,000억 원에 가까운 지원금을 받는 기관이 기본적인 성폭력 대응 메뉴얼도 없어 대한체육회를 향한 비판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16일 오후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여성 국회의원 일동이 주최한 ‘조재범 성폭력 사태 근본 대책 마련 긴급 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에선 체육, 인권 전문가들이 모여 체육계의 반복되고, 은폐되는 성폭력 구조를 들여다보고, 실효성 있는 대책을 주문했다.

전문가들은 체육계의 성폭력 문제는 2008년에도 크게 논란이 돼 대책이 쏟아졌지만 성폭력은 계속 은폐됐다고 지적했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의 제자 성추행 사건이 터졌고 바로 그 빈 자리에 조재범 코치가 장비 담당 코치로 선임되는 등, (성폭력) 사건이 반복됐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라며 “조재범 개인의 일탈이 아닌 반복적으로 쌓인 구조적 문제”라고 진단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성폭행 사실을 알린 선수들은 그 후에도 혹독한 시간을 겪어야 했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 겨우 알려진다고 해도, 다시 피해자들로 하여금 입을 닫게 하는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정 교수는 “발설을 택한 대부분의 피해자들는 (폭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침묵을 선택했을 거라고 단언한다”라며 “다양한 형태의 2차 피해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주위의 시선도 싸늘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피해자들의 입을 닫게 하는 원인으로 무기력증을 꼽았다. 정 교수는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도 아무도 듣지 않거나 들어도 아무도 행동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피해자는 심리적으로 자포자기에 이르는 상태가 된다”라며 “이러한 학습된 무기력증은 일단 (가해자에게) 내려진 징계가 번복되거나 가해자가 몇 개월 만에 멀쩡하게 복귀할 때 증폭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최근 리듬체조계의 성폭력 가해자인 K씨가 체조협회 전무이사를 사퇴했다가 더 높은 직위인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 복귀를 시도한 일이 거론됐다.

하키 선수 출신 함은주 문화연대 집행위원은 “이 사건에서 대한체육회는 인준을 거부했는데, 성폭력 가해사실에 대한 법적 판단이 없는데 왜 인준을 거부하냐며 바로 소송이 들어왔다. 이후 그는 대한체육회 시도체육회 고위직 임원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체조협회와 시도체육회의 인준이 있었던 것”이라며 “(성폭력 지도자 영구제명) 규정을 피해 가는 여러 구멍들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지속적인 컨설팅이 필요해 보인다”라고 조언했다.

  발언하는 김현목 문체부 체육국 사무관(맨 오른쪽)

김현목 문체부 체육국 사무관은 “체육계 협회나 임원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김 사무관은 최근 대한유도회에서 모 선수의 성폭력 피해 폭로에 관한 보도자료에 피해자의 이름을 비롯해 신상 정보를 공개한 것을 예로 들며 “체육계에선 피해자가 신고할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관한 메뉴얼도 없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해야 한다는 것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이어 “최근 유도에서 황당한 일이 발생해 조사해보니 성폭력 사건에 대한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라며 “가해자에 대한 조치, 관계기관에 신고하는 것 같은 메뉴얼을 빨리 만들어 보급하겠다”라고 밝혔다.

문경란 한국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최근 문체부가 발표한 성폭력 지도자 영구제명, 체육계 통합 성폭력 신고센터 설치, 여성지도자 할당제, 선수 합숙 제도 개선 같은 방안은 2008년도에 농구계 성폭력 폭로 이후 당시 문체부가 내놓은 대안과 같다”고 비판했다. 문 이사장은 “여론이 부정적이니까 일시적으로 선언적으로 내놓은 대책”이라고 꼬집으며 “피해처리 과정에서 이제껏 내놓은 대책은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다.

문 이사장은 “심석희 선수를 통해 폭로된 사건의 뿌리는 엘리트주의, 메달 지상주의, 애국주의고, 많은 정권이 선거의 표밭으로 체육계를 이용하는 요소까지 포함한다”라며 “긴 시간 정부, 체육계, 민간이 합쳐 구조를 보고 장기적으로 풀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인권침해가 폭력, 성폭력, 학습권 침해 등 세 가지 문제가 맞물린다”라며 “자기 몸에 타인의 폭력이 가능한 주요 원인은 학습권 침해 문제와 밀접하다. 학습권 침해는 운동을 그만두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때도 방해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제까지 합해 성폭력이 어떻게 드러나지 못하는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조사부터 피해자 지원까지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전문적 체계’를 촉구하며 “선수가 상급기관인 대한체육회에 신고했는데도, 체육회가 종목별 협회에 사건을 이첩한 적이 있는데 기존에 만들어진 클린센터, 신고센터 같은 것들은 전혀 피해자 지원 기능을 하지 않았고, 신고도 제대로 못 했다”라고 비판했다. 이 소장은 “15일 대한체육회는 폭력 성폭력 관련 사안 처리를 외부 전문기관에 전적으로 의뢰한다고 했는데 조직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인다”라며 “국방부의 경우 민간에서 간 성고충전문상담관이 근무하고 있는데 내부에서 ‘와치독’ 기능을 하는 외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어지는 플로우 토론에서 대한체육회 전 스포츠 인권강사가 강의 내용으로 검열받았던 경험을 소개하며 ‘교육의 실효성’을 강조해 주목받기도 했다. A씨는 “빙상연맹 지도자를 대상으로 교육할 때 처우와 노동권 이야기를 했는데 담당자로부터 불편한 이야기라 취소돼야 할 것 같다고 해서 강의를 이어 하지 못했다”라며 “인권강사 중에도 ‘인권교육 중요하지만 애들은 다 맞으면서 훈련해야 실력이 오른다’라던 사람도 있었는데 전문성, 자격 기준이 의문스러웠다”고 말했다. A씨는 “제도에 의한 것이 아닌 진정성 있는 교육이 이뤄지길 바란다”라며 현장 스포츠 인권강사 100여 명이 있으니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개선점을 세워나갔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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