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회사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서 살 수는 없다

[기획연재] 모든 노동에 바칩니다①

<모든 노동에 바칩니다> 연재를 시작하며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노동자의 권리는 점점 박탈됐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면 행복해지는 것일까? 지금은 정규직 노동자들도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미래의 희망을 잃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벌기 위해 장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차별과 위계화에 익숙하여 비정규직을 폄훼하기도 한다. 때로는 비정규직을 고용의 안전판으로 삼으려고 한다.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가 노동자들의 권리를 훼손하고 있지만 비정규직 운동의 목표는 단지 고용형태만 정규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는,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지 비정규직의 눈으로 바라보고 함께 토론하면서 '비정규직 사회헌장' 18개 조항을 만들었다. 그 내용은 <모든 노동에 바칩니다>(오월의 봄 출판사)라는 단행본으로 발간됐다. 그 중에서 네 개의 조항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출처: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

7조. 노동시간에 대한 권리가 있어야 한다.
9조. 건강을 위협할 정도의 장시간 노동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최근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에서 노사정이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에 합의를 이루었다. 이 합의는 법안으로 만들어져 국회가 개원되는 대로 처리가 될 것이 예상되고 있다. 1주 40시간 1일 8시간이라는 법으로 정한 노동시간은 이제 더 이상 노동시간 제한의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힘들어졌다. 노동시간의 경계는 사라지고, 노동자는 기업이 원하는 시간에 자신의 몸과 생활을 맞추어야 하는 상황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확대의 첫 번째 문제점은 노동시간이 장시간화 된다는 것이다. 법으로 정한 기준이 있지만,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적용하기로 합의를 하면 이 노동시간의 기준은 사라지고 제도 적용에 따라 장시간의 노동이 가능해 진다. 그 시간은 2018년 개정법이 적용되어 주 52시간 한도의 노동시간이 적용되는 공공부문 및 300인 이상 대기업의 경우에는 최대 64시간까지 가능해 지고, 아직 개정법이 적용되지 않는 사업장의 경우에는 80시간까지 늘어날 수 있다. 노동자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또 그 반대편에서 노동시간은 극도로 줄어들 수도 있다. 그렇게 늘어나고 줄어드는 시간을 평균해서 법정 근로시간 한도에 끼워맞춰 지기만 하면 연장노동에 대한 추가적 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노동자는 제도 적용 이전과 평균적으로 동일한 시간을 일한다 하더라도 더 낮아진 임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기존의 3개월 단위 탄력적 근로시간제로도 노동자의 장시간화와 불안정성이 문제인데, 이를 6개월 단위로 늘리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문제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생활의 불안정이다. 이번 경사노위의 합의는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기간만 3개월에서 최장 6개월로 늘린 것이 아니라 세부적 내용도 개악했다. 이전에는 매일의 노동시간을 사전에 정하도록 했지만, 경사노위 합의안에서는 이를 주 단위로 정하면 되도록 하고 있다. 특정 주에 총 몇 시간을 일하게 될 것인지는 사전에 정해지지만 구체적인 노동시간은 2주 전까지만 정하면 되도록 하고 있어서 노동자는 그 전까지 자신의 정확한 노동시간을 알기가 어렵다. 즉, 노동하는 시간이 불확실해 지는만큼, 그 반대편의 생활시간도 불안정해 진다. 여가, 휴식 뿐 아니라 개인적인 일들을 위해 계획해야 하는 노동자의 생활은 보장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불안정해 지는 노동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노동자로부터 더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적용에 있어서 필요한 절차인 ‘노사합의’는 노동자가 스스로 노동시간을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이지만, 경사노위 합의안에서는 이 합의의 내용 자체를 완화시켜버렸으며, 노동시간의 결정이 집단적으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권한으로 부여되어 버렸다.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최소 2주 전에 정해지지만, 이는 사용자가 정해서 통보하도록 하면서 노동자가 거부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사전에 정한 주당 노동시간도 업무량이 갑자기 늘어나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변경될 수도 있고, 그에 따라 노동자의 매일의 노동시간은 또 달라질 수 있다. 이 때에도 사용자는 통보하면 그만이고 노동자에게 노동시간을 결정할 권리는 없다.

돌이켜, 노동시간에 대해 근로기준법은 근로시간의 기준을 정하고, 1주의 연장근로시간 한도를 12시간으로 정하고 있으며, 이 연장근로는 노동자가 동의하는 경우에 가능하다. 또 근로기준법이 정하고 있는 다른 휴식에 관한 조항인 연차유급휴가는 노동자에게 그 시기의 지정권한이 있으며, 사용자는 필요한 경우 그 시기를 변경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권한으로 보유되어 있는 부분이다. 즉, 노동시간과 휴식에 있어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으로 부여되어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데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확대는 이러한 노동자의 통제권을 박탈한다. 연장근로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합의에 의해 강제잔업으로 변화하고 연차휴가의 기간 또한 실질적으로 사용자가 원하는 기간에 배치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노동자는 기업의 필요에 따라,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활용되는 부품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는 지난 해 “모든 노동에 바칩니다”라는 단행본을 발행하면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에 노동시간에 대한 두 가지 목록을 담았다. 그 가운데 ‘사람이기 때문에 회사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서 살 수는 없다’라는 문구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필라델피아 선언의 첫 문구와 같다. 노동자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동으로만 내몰리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휴식과 여가를 즐길 권리가 있고, 그런 생활의 풍요를 추구할 권리가 있는 존재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논의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가 인권을 가진 존재로서 사고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노동자의 시간은 고려되지 않고 기업의 시간만 남는다. 결국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지고, 노동자의 생명을 해칠 수밖에 없다.

노동시간의 길이와 배치에 대한 노동자의 선택과 결정이 부정되면, 노동자는 결국 사회와 분리될 수밖에 없다. 야간노동을 하느라 낮에는 잠만 자기 때문에 가족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 부부가 맞교대로 일하면서 노동시간이 서로 달라 간혹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면 낯설기만 하다는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진행되는 노동시간 개악이 현실화 된다면, 이제는 일하는 가족 서로가 언제 얼굴을 볼지도 알 수 없는 해체된 삶을 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안정한 노동시간은 노동자의 생활리듬을 깰 수밖에 없고, 결국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다. 가족과 주변과, 또 사회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힘든 일이 된다면, 노동자는 과연 이 사회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의 시간이 곧 기업의 이윤이기에 기업은 끊임없이 노동자의 시간을 통제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지금, 오늘의 이 싸움에서는 마치 자본이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갖는 것이 노동자에게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어 가고 있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쳐 온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지금 또 다시 외면당하고 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개악 시도로부터 다시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의 권리 목록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노동시간에 대한 권리가 있어야 한다. 적정한 휴가와 휴식 시간을 누리고, 원하는 시간에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회사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서 살 수는 없다.” , “장시간 노동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죽음을 부르는 야간 노동과 24시간 노동, 강제 잔업과 특근은 없어져야 한다.” 바로 지금, 기업의 강한 요구로부터 시작된 강제잔업이 정부의 정책으로, 노사정 합의의 외피를 쓰고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