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에 도박을 거는 외설적 자본주의

[워커스 세 줄 요약] 이승철, 「“도박자”의 인류학을 위한 연구 노트」, ≪문학과 사회≫, 2018년 여름호


“‘주술사’의 조언에 따라 새로운 시장의 탄생이 “대박”이라 외쳤던 전–대통령의 말에서, 무속인의 말에 따라 선물 옵션에 투자해 천문학적 돈을 벌었다는 재벌 총수에 대한 소문에서, 신년이 되면 은행 사이트가 제공하는 온라인 사주팔자를 통해 올해의 돈벌이 운세를 확인하고, 코인 가격의 상승을 갈구하며 “가즈아!”를 주문(chant)처럼 외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주술이 전근대적인 현상이 아니라 금융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귀환한 매우 동시대적인 현상임을 피부로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시장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체제라고 배웠다. 분명 교과서에는 그런 식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최순실 사태에서 드러나듯, 그리고 가깝게는 장학썬(장자연, 김학의, 버닝썬) 사태에서 드러나듯, 자본주의 체제는 무수한 요설스러움으로 뒤덮여 있다. 헷갈린다. 현실이 이념을 따라잡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이념이 애초부터 틀려먹었던 걸까. 어떤 식으로 의심하느냐에 따라 강점과 약점이 있을 것이다. 비루한 현실을 문제 삼으면 대중운동을 촉발할 것이고(‘이게 나라냐’), 허울뿐인 이념을 문제 삼으면 세계의 민낯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이게 나라구나’).

한동안 우리는 자본주의를 살아내는 우리를 ‘근로자’라고 상상했던 적이 있다. 그런 식으로 우리들 대다수는 산업주의 규범에 따라 근면하게 노동하는 주체가 되길 기대받았고 또한 스스로도 그렇게 소망했다. 그러다 푸코주의적 해석이 각광을 받으며 2000년대 들어 상황이 바뀌었음을 알게 됐다.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를 ‘기업가’인 것처럼 상상하고 있구나, 라고 말이다. 자기 계발, 리스크 관리, 재테크 등등 우리를 둘러싼 관행과 실천들에서 새로운 규범과 윤리를 확인한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다만, 개인적으로 푸코주의에 대해 느끼는 아쉬운 점 중 하나는 그것이 다루는 시간대가 비교적 길다보니 일정한 분석적 제약을 만든다는 것이다. 예컨대 저자도 동의하듯 푸코의 진단은 “금융화로 대변되는 현재의 변화까지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즉, 신자유주의로 특정될 수 있는 오늘날의 시간대를 적절히 짚어내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전체를 아우르는 긴 시간대에서의 기업가적 주체성보다는) 금융화 국면에 조응하는 별도의 이념형적 형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오늘 소개할 논문 「“도박자”의 인류학을 위한 연구 노트」의 저자 이승철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도박자’라는 형상을 기입하면서 동시대의 주체성에 관한 이론적 정정과 정교화를 시도한다. 그는 도박자의 형상이 적어도 네 가지 분석적 장소(현대성, 주술, 통치, 혁명)에서 출현하고 있음을 거론하는데, 거칠게나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논의들이 시도되고 있다.

1. 애초부터 현대문명 자체는 합리성만이 아니라 주술성에도 근거해 있다.
2. 금융화 국면에서 와서는 도박성이 광범위한 규범적 행동 지침으로 자리 잡고 있다.
3. 주의를 기울여보면, 혁명이라는 것도 도박의 논리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요약으로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이 같은 요점이 현대문명이 은폐하는 일종의 외설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세상이 어디 합리적으로만 돌아가던가. 부정부패는 물론 점술과 트렌드 전망 등 온갖 술수가 판을 친다. 카지노 자본주의라 하지 않던가. 판돈을 걸고 남의 주머니를 털어야 부를 축적할 수 있다.

혁명도 결국 주사위 던지기가 아니던가.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내란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현대문명 또는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모종의 헷갈림을 반복한다. 외설투성이임을 알고 있음에도, 자본주의는 동시에 합리성이 지배하는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승철의 논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와 같은 실제적 긴장을 쉽게 간과하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다. 가령 현대성을 이해할 때도 그는 주술성을 합리성이 대치 했다는 식의 계몽주의적인 ‘요소’론적 접근 대신, 새롭게 등장한 합리성의 가치가 형질전환된 주술성과 뒤섞인다는 문화적·미학적인 ‘아이러니’식 접근을 채택한다.

이렇게 보면 카지노 자본주의나 오컬트 자본주의 같은 대중적 은유는 말 그대로 은유에 그치는 일이 없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후기자본주의라는, 즉 산업적 현대 이후의 금융적 현대를 살고 있다. 그런 까닭에 현대 자본주의 분석에서는 카지노와 같은 외설적 속성이야말로 가장 중심적인 문제이며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대상일 수 있다.

물론 과도하고 무책임한 존재들을 배제시키는 신용 등급 시스템 같은 안전장치가 있기는 하다. 또한 실물 경제를 몇 갑절 이상 넘어서버린 금융 거래이기는 하더라도 일단의 애널리스트들에 의해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당국에 의해 철저히 제어되는 것으로 보증되기는 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또한 우리의 도박판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룰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전문가의 예측이나 관료의 조언은 마치 〈오이디푸스 왕〉의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처럼 시장의 미래를 결정짓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금융 시장은 이성이 아니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정념의 공동체 속성을 나타내며, 세계가 금융화되어 있는 만큼 우리들 각자 역시 서로에게 연결되기에 이른다. 요컨대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철저하게 이성적인 호모 이코노미쿠스뿐만 아니라 “감정적·정념적 호모 이코모니쿠스”의 등장을 고려할 때만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비이성적 정념이 관리되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에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저자가 시사하듯 이 문제는 정치적이고 동시에 매우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술성을 응축한 세계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체계의 합리성이 아니라 주술 자체를 문제 삼곤 한다. “사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들이 표면화되고 심화된”다. 사회적 적대는 대개 이런 식으로 재현되고 (종종 실제 ‘주술사’를 색출해냄으로써) 도덕성의 문제로, 그리하여 우연적인 문제로만 치환돼버리곤 한다(저자가 각주를 통해 설명했던 것처럼 세월호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도박사라는 주체성의 등장은 다분히 모순적이고 메타적인 정치학의 필요성을 함의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한 축을 이루는 중요한 형식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붕괴를 한없이 지연시키는 ‘사라지는 매개자’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도박성은 자본주의를 성립 가능하게 하는 요인인 동시에, 문제가 생기면 기꺼이 도덕적 비난의 희생양이 되어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가능하게 해주는 요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혁명에 관한 문제에 오게 되면 이 같은 복잡성은 더욱 극적으로 나타난다. 마키아벨리즘으로부터 행운적 요소가 중요해진 이래로 혁명은 도박과 같은 속성을 지닌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프롤레타리아가 잃을(lose) 것은 쇠사슬 뿐이요, 얻을(win) 것은 전 세계이다’). 그러나 오늘날 금융 자본주의에서 혁명은 또 하나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집트 혁명에, 대통령 파면에, 그리고 그 모든 봉기적 계기들에 대해서도 투자라는 이름으로 베팅을 걸 수 있다.

굉장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재래의 견고했던 어떤 문법도 도박판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형국이다. 저자의 단언, 즉 “오늘날 세계의 ‘사건 없음’과 궁극적인 변화의 불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면, 그 일차적 원인은 지루한 대의민주주의나 과도한 관료제에 있기보다는, 역설적으로 흥분과 열광에 기반한 금융자본주의와 도박판의 확대, 모두가 도박자가 되어버린 이 구조에 있을 것”이라는 말이 단순한 허언만은 아닌 셈이다. 오늘날 우리는 “혁명이 도박이 된 세계를 넘어, 혁명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세계이자 궁극적으로는 도박이 혁명을 관리하는 사회”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저자 이승철은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는다. 도박자라는 주체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혁명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혁명은 모두가 도박자가 된 조건을 지양해내는 새로운 도박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gambler를 도박‘사’가 아니라 도박‘자’로 번역한 것처럼 어쩌면 그 실마리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워커스 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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