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한 예술’, 또는 일상의 심미화

[워커스 세 줄 요약] 박혜성, 「예술대학 진학의 계급적 함의와 이 시대 예술대학 교육의 방향성」, ≪한국언론정보학보≫, 95권, 2019년


저성장 그리고 인구 절벽. 거의 모든 것이 휘말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노동력 재생산 문제가 염려되기도 하고 그 와중에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집단 간 갈등 또한 본격화되는 느낌이다. 사례들은 넘쳐날 것이다. 인구 감소는 사회경제적 기반이 흔들림을 알리는 전조다. 물론 그 전이 과연 안정적이었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바로 직전보다 더 불안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알던 세계는 작별을 고하고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살고 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영역 중 하나가 바로 고등교육 분야다. 특히 퇴출, 폐과, 학과 정원 감축 등의 선택지 앞에 놓인 인문예술계는 일대 전환의 기로에 서 있는 듯하다. 가르치는 사람이 많더라도 정작 가르침 받을 사람이 없다면 부득불 존재 양식이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대로 절멸하든가 다른 길을 모색하든가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위기가 곧 기회라는 시쳇말은 여기서도 통할 수 있다. 우리가 살던 세계가 모순투성이였다면 위기는 그 같은 모순을 일거에 해소하거나 적어도 다른 방식으로 바꿔낼 기회일 수 있다. 가령 인문학을 보자. 수십 년 동안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떠돌았다. 학문 자체의 쇄신도 부진하고 대중적 소구력도 떨어지니 학문 전체를 감당할 역량 있는 지식인들이 늘기는커녕 점점 줄어들고 있다. 세계의 충격파가 거세지고 정말로 벼랑 끝에 몰리자 인문학은 결국 살 길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래서인지 각종 기금을 유치하러 영업(?)을 뛰고 시민 대중과 직접 대면하면서 의기소침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다시금 활성화되는 조짐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 유효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오늘 소개할 박혜성의 논문 「예술대학 진학의 계급적 함의와 이 시대 예술대학 교육의 방향성 : 1980~1990년대 중산층의 예술전공 경험을 중심으로」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예술교육 역시 위기이기는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몇 년 전 모 대학으로부터 기회를 얻어 예술계 졸업생의 취업 경로와 예술교육의 방향성을 들여다 본 적이 있었다. 교수진의 하나같은 고민은 제자들을 졸업시킨 뒤 어떤 직업적 삶으로 안내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청년 취업 자체가 어려운 마당인데 우리 시대의 청년예술가들은 이중삼중의 고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진통을 잘만 겪어내면 새로운 기회구조가 열릴 수도 있다고 제시한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자.

1. 학벌사회 한국에서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예술교육은 그동안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칠지에 대한 고민(교육 내용)보다는 계층이동 및 유지에 도움을 주는 것(교육 경험)에 초점을 두었다.
2. 이런 시스템은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장기적인 저성장, 위축된 중산층 심리, 지속적 저출산, 감소하는 학령인구 등으로 인해 대학 구조조정이 잇따랐고 예술대학은 학과통합, 학과명 변경, 정원감축, 폐과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3. 그렇다면 문제의 해법은 교육 본연의 목적을 재검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는 성인 예술교육이 이전보다 활기를 띠며 예술교육 대상의 범위를 점차 확장하고 있다. 예술대학은 이 변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교육 기반과 학술적 역량을 재정비하여 그에 필요한 전문인력 양성에 힘쓸 필요가 있다.

저자 박혜성은 이와 같은 예술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을 ‘입시예술’에서 ‘삶을 위한 예술’로의 전환이라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교육의 장이 형성됨으로써 예술교육이 교육‘내용’ 그 자체에 집중할 기회구조가 열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이제 대한민국의 예술은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는 것일까. 일단 저자의 논지를 좀 더 충실히 따라가 보자.

흥미롭게도 저자는 자기기술지(auto-ethnography)를 통해 한국의 입시중심 예술교육을 추적하면서 그 안에 존재하는 계급성을 드러내고 문제점을 짚어내고자 한다. 강남 8학군 지역으로의 이주, 예술중학교 진학, 방과후 사교육 경험 등을 회고하면서 저자는 한국에서의 예술교육에서 상층계급에 진입하고자 하는 중간계급의 가족적 열망과 전략을 읽어낸다. 그러니까 “조기 예술교육과 진학은 당대 중산층의 계층의식이 드러난 계급적인 선택”이며 특히 “중산층 여자 고등학생들에게 ‘예술대학’은 미래의 계층상승을 위한 직업선택과 혼인에 유리한 ‘스펙’이 되는 ‘교육기회’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졸업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대개의 현실은 비정규직으로의 취업이다. 의료계나 법조계가 아닌 이상 졸업이 평생고용이나 계급상승을 바로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몇몇 학교 출신으로 연줄이 있거나 정말로 특출 난 게 아니라면 주류 예술계의 전업 작가나 종사자가 될 기회는 희박하기만 하다. 심지어 이미 학부 및 대학원 재시절부터 각종 프로젝트에 저임금 열정 노동력으로 동원되는 경험을 하기까지 하니 소외감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는 미술교육 현장에 뛰어드는 것이다. 학원 알바로부터 시작해서 학원계에 정착하거나 교직을 이수해 미술교사가 되거나.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입시 중심 예술교육의 회로 안에 갇히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시스템이 그래도 한동안은 안정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경제 성장이 멈춘다면? 게다가 학령인구조차 감소한다면? 이 시기에 이르러 예술대학들은 분과의 생존을 위해 외형 변화를 꾀했다. 융복합, 창조, 문화, 경영, 뷰티 등 신비한 이름들이 등장한 것도 그 같은 맥락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외풍의 위력은 이전에 겪던 것에 비해 질적으로 다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교육과정의 대대적 개편 없이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위기는 가중된다. 입학생은 부족하고 그마저도 졸업생의 취업률은 저조하다.

여기서 저자는 최근 예술교육에 성인들의 관심과 참여가 늘고 있음에 주목한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성인 예술교육이 활성화되는 상황이기는 한 것 같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전 세대 부모들은 단기적으로는 자녀의 ‘대회입상’과 ‘진학’을, 장기적으로는 자녀의 ‘계층상승’을 염두에 두고 예술교육에 투자했지만, 지금의 성인들은 다른 목적을 갖고 예술교육에 자신들의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고 있다.” 성인들의 목적…. 변화하는 세계에서 추구하는 실존적 물음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아주 단순한 미적 허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새로운 수요가 형성됐다는 것은 출구가 없어보이던 예술교육에 한줄기 희망 같은 것임이 분명하긴 하다.

물론 저자는 성인 예술교육의 가능성을 무조건적으로 예찬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현주소를 통해 어떤 불가피한 과제들을 짚어내는 것은 연구자가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 성인 예술교육의 교육내용과 교육방식은 초입 단계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예술교육 프로그램이 성인학습자의 생애주기에 맞게 특화되어 있지 않은 것, 성인 예술교육에 관한 지식과 자격을 갖춘 예술 교육자가 희소한 것 등이 대표적인 과제들이다(물론 이와 관련한 자격증 프로그램이 있기는 하지만 특정 이익집단의 단기 이수과정 수준이어서 공신력은 미미하다고 한다).

자, 그러면 이렇게 대한민국 예술교육과 예술은 새로운 출구를 찾아낸 것일까. 하지만 좀 더 큰 그림을 본다면 저자의 발견에 어느 정도까지 동조해야 할지는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 예컨대 성인들의 예술교육 수요는 얼마나 안정적일까. 지난 시기 입시교육 수요처럼 강고하고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할까. 예술교육을 희망하던 세대가 뒤안길로 물러나고 미적 취향이 없는 새로운 성인 세대가 등장한다면 성인 예술교육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물론 이 정도는 기우일 수 있다. 또 다른 보조적 제도와 정책으로 예술교육 수요를 유지시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다만 저자가 말하는 ‘삶을 위한 예술’이 예술교육의 본령처럼 간주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성인 예술교육이라 한정하지 않더라도 생활예술이니 사회적 예술이니 해서 예술과 예술교육의 패러다임 변화가 다가오고 있기는 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입시예술에서 생활예술로 가는 흐름이지 싶다. 물론 과거의 기형적이던 입시예술에 비하자면 확실히 좀 더 나은 변화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예술이 입시와 계급동학의 도구가 되는 것만큼 (혹시라도) 일상의 심미화를 위한 도구가 된다면 좀 더 깊은 토론이 뒤따라야 하는 게 아닐까. 저자의 전망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말마따나 ‘교육내용’ 그 자체에 대한 숙고와 숙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워커스 5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