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을 직면하다: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

[기고] ‘잔중(佔中)’과 ‘잔중(佔鐘)’:홍콩 사회 ‘운동의 형성’과 ‘거대사건’의 형성

[역자 말] 이 글은 올해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에 반대하면서 홍콩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한 글이 아니라 2014년에 홍콩에서 일어난 ‘우산운동’에 대한 글이다. 우산운동 직후인 2015년에 대만에서 발표된 이 글은 비록 최근 홍콩 시위의 상황은 다루고 있지 않지만 당시 제기한 분석과 문제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의미 있고 최근 시위에 대한 분석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렇게 비슷하게 보이는 사건이 반복되는 것은 그에 대한 평가와 분석이 철저히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홍콩 시위에 대해서도 철저한 분석을 통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런 대규모 시위와 충돌은 언제든 또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 현상이 그렇듯, 2014년과 올해 홍콩에서 진행된(그리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대규모 시위도 다각도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이 글도 그 중 하나인데, 이 글은 2014년 홍콩 시위의 사회˙역사적 원인을 비교적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이 글은 홍콩 시위를 “추상적인 ‘민주’, ‘독재’와 같은 범주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고 명확히 하고 있다. 이 글의 작성 동기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글에서 홍콩 시위의 배경으로 홍콩 경제 상황의 변화, 중국 본토의 권력-자본과 홍콩 사회의 왜곡된 유착, 중국 본토와 홍콩 사이의 정치적 관계의 문제로 인한 홍콩 시민들의 불안함과 불만, 홍콩 시민들의 경제적 열악함 등을 지목한 부분들은 매우 설득력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홍콩 시위의 본질이 표면적으로 대두된 ‘민주’나 ‘자치’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심층적인 원인이 있음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홍콩 시위를 계기로, 1989년 중국 본토에서 일어난 ‘천안문 사건’을 성찰한 저자의 평가도 흥미롭다.

이 글의 저자인 항표 교수가 홍콩 시위를 분석하며 가장 관건적인 행위자로 중국공산당(중공) 혹은 중국 정부-이 둘은 저자가 글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당-국가 체제를 형성해 사실상 구분하기 어렵다-를 지목하고 있는 것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문제가 중공과 중국 정부에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홍콩 시위를 통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위치에 중공과 중국 정부가 있다는 의미이다. 2019년 올해 다시 일어난 홍콩 시위는 여러 의미에서 2014년 이후 중공과 중국 정부의 대응이 적절하지 않았거나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터져 나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비록 홍콩에는 ‘독자적인’ 홍콩 정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중국 정부는 홍콩을 책임지고 있는 중앙정부이다. 중공과 중국 정부는 홍콩 시민들의 좌절과 분노에서 비롯된 행동들을 비난하고 중국 본토 시민들과 홍콩 시민들의 대립을 방임하거나 심지어 부추기는 방식이 아니라, 적절한 분석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고 중재해야 할 임무가 있다. 평화시위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홍콩 시위대의 절망감이 바로 “폭력” 시위의 토양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공과 중국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항표 교수의 분석과 비판은 적절해 보인다.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에서 유행하던 말 중에 ‘조반유리(造反有理, 저항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그동안 평탄치 않은 역사를 거치면서 이미 상당히 복잡한 맥락을 가진 말이 되어 버렸지만, 기본적으로는 권력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은 언제나 진지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을 ‘민중들의 저항은 항상 옳다’로 해석하기보다는 ‘민중들의 저항에는 다 이유가 있다’로 해석해서, 그 저항의 정치적 방향이 옳든 그르든 저항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맥락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접근이 홍콩의 시위대를 비난하는(혹은 반대로 무비판적으로 옹호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해 보인다.

이 글은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일국양제’에 대한 평가와 새로운 접근, 1989년 ‘천안문 사건’에 대한 평가, 홍콩의 식민지 역사에 대한 해석 등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굵직한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관통하는 핵심에는 중국공산당과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적 의미와 변화에 대한 평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거대한 토론의 대상들이고 중국 내부에서도 다양한 관점과 의견이 제출되고 있는 쟁점들이다. (정치적으로 봉쇄되어 토론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지만) 예를 들어, 이 중에서 항표 교수는 ‘일국양제’에 대해 “중국 정부는 일국양제에서 ‘양제(兩制)’를 ‘중국 본토의 사회주의’와 ‘홍콩의 자본주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항표 교수는 ‘지금 중국은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라는 질문을 직설적으로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체제의 성격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도 논쟁이 되고 있는데, 적어도 중국이 전형적인 사회주의 체제라고는 하기 힘들다면 - 이에 대해서는 중국 스스로도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혹은 ‘시장 주도의 사회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 일국양제에서 ‘양제’의 의미는 새롭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홍콩의 식민지 역사에 대한 해석에 대해 항표 교수의 이 글에서는 그다지 다루고 있지 않지만, 중국 내부에서는 일국양제에서 ‘일국(一國)’을 더 강조하며 한때 서구의 식민지였던 홍콩의 ‘미완의 탈식민화’ 문제를 지적하는 흐름도 있다. 이는 일정 정도 중국 본토의 도덕적 우위를 전제하면서, 심지어 홍콩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홍콩의 피식민 역사를 비난하는 사고방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때 ‘탈식민화’는 홍콩의 ‘(피식민으로) 오염된 역사에 대한 정화’라는 의미를 강하게 갖는 듯하다. 이는 ‘탈식민화’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중국 본토의 탈식민화 문제는 성찰하지 못하면서 홍콩의 탈식민화 문제만 지적하는 것이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홍콩만의 탈식민화 문제를 지적할 때 여기서 ‘탈식민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와 같이 이 글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은 하나같이 크고 복잡하기 때문에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조금만 변용한다면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가능하고, 심지어는 절박한 질문이 된다. 한국 사회는 87년 ‘민주화 운동’에 대해 적절한 분석과 평가를 남기고 있나. 큰 시위가 있을 때마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종종 소환되고 있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등과 같은 담론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보면 87년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제한적이거나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미완의 무언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미완’이 문제일까, 아니면 ‘민주주의’를 핵심이자 강령처럼 설정한 인식 자체가 문제인 걸까. 87년의 그 ‘거대사건’을 과연 ‘민주화’라는 담론틀로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항표 교수는 1989년 ‘천안문 사건’에 대해 “1989년 중국의 사회운동이 실패한 것은 단지 그것이 진압됐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회운동이 장기적 사회 변화의 역량으로 전화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심지어 그러한 경험을 의미 있는 사상적 자원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는 1987년의 ‘민주화 운동’, 1996~1997년의 민주노총 총파업, 2008년 그리고 2016~2017년의 촛불집회를 통해 어떠한 사회 변화의 역량이 형성됐고 이를 어떠한 사상적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가.

이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과 홍콩이 겪고 있는 일국양제 문제는 남북 관계에도 큰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남의 국가연합 통일안이든 북의 연방제 통일안이든 현재 중국과 홍콩의 문제는 상당 부분 남북이 이후 유사하게 겪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홍콩과 중국 본토가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들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남북의 어떠한 미래를 상상할 것인가. 홍콩과 중국 본토의 현재 상황은 중요한 참조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항표 교수가 현재 중국공산당의 결정적 문제 중 하나로 제기한 정치 세력의 지도력과 군중노선 등의 문제에 대해 한국 사회는 어떤 고민을 구체적으로 갖고 있는지도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와 ‘민주주의’, 20세기 혁명의 역사 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 사회주의가 일개 구호나 타/아(他/我)를 구분할 선명한 정치색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 있는 인류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의 사회주의, 그 중에서도 중국 사회주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이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혹은 질문을 좀 다르게 던진다면, 역사적 교훈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중국과 다른 ‘사회/주의’를 상상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훌륭한 글이지만, 다소 조심스럽거나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 일단 눈에 띄는 부분으로, 문화대혁명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평가가 다소 일면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양하고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 좀 더 풍부하게 드러나는 평가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든다. 그리고 홍콩의 역사와 홍콩 시위에 대한 평가도 좀 아쉽다. 홍콩 시위에서 보여준 홍콩 시민들의 능동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까. 그리고 홍콩 역사의 대표적 특징으로 ‘비정치성’을 드는 것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홍콩 역시 오랜 식민지 역사를 거치면서 적지 않은 민중들의 저항이 있었고 중국 본토의 혁명과도 긴밀하게 상호작용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홍콩 경제 발전의 역사와 관련해서도 외부적으로 형성된 조건만으로 홍콩의 경제 발전을 평가하는 것은 전면적인 평가로서는 좀 부족해 보인다. 홍콩 사람들의 적극적 노력과 그에 상응하는 홍콩 정부의 능동적 정책이 없었다면 홍콩이 과연 이만한 경제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중국은 외부에서 흔히 쉽게 상상하듯 어떠한 단일체가 아니다. 중국에도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고 적지 않은 다양한 사회주의자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존재하고 또 사회에 대해 다양하고 진지한 토론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토론에서는 생각보다 정치적으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 사회보다 더 과감한 의견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중 ‘일부’는 검열로 삭제되기도 하지만.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특히 젊은 세대)은 ‘사회주의’ 중국에서 서구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무엇이 ‘자유주의 우파’이고 무엇이 ‘좌파’인지도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다. 이는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현재 중국 사회의 전체적인 작동 기제, 특히 일상 생활의 경제 구조나 사람들의 의식 구조 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에 더해 반제국주의의 의미를 상실한 민족주의가 확실히 중국 사회에서 점점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중국의 현실에서 항표 교수의 주장은 소수 중에서도 소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회가 홍콩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무능함에 가까운 한계를 보이는 것은 이와 같은 중국 현실의 여러 요소가 복합된 결과일 것이다. 이번 홍콩 시위 현장에서 울려 퍼진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을 통해 홍콩과 한국과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는 것이 어느 정도 체감된 지금, 한국 사회는 홍콩과 중국 본토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화답할 것인가.


[출처: 김한주 기자]

홍콩을 직면하다: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1)
‘잔중(佔中)’과 ‘잔중(佔鐘)’:홍콩 사회 ‘운동의 형성’과 ‘거대사건’의 형성


거의 모든 매체들이 - 홍콩, 중국 본토, 서방의 매체들이 지지하든 반대하든 간에 - 2017년 시행될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 선거법과 관련해 2014년 9월 26일부터 홍콩에서 진행된 항의 행동, 특히 28일 이후 격화된 대치 상황을 “잔중(佔中, 중환 점령)” 운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중환 점령을 조직한 사람들은 28일 새벽에 ‘잔중(佔中) 시작’을 선포했지만, 실제로는 ‘중환’ 점령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금종’ 점령을 시작한 것이었다.(3) ‘중환(中環, 센트럴)’과 ‘금종(金鐘, 애드미럴티)’의 차이는 단지 지역적인 차이가 아니다. ‘중환 점령’은 홍콩의 일부 학계와 법률계 그리고 종교계 인사들이 2017년에 있을 선거 개혁과 관련해 2013년 초에 시작한 운동이다. ‘중환 점령’을 조직한 사람들은 이 운동을 시작한 후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적절한 방안을 토론하며 중국 본토를 포함한 각계각층과의 접촉을 조직했다. 그들은 만약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목표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이후 홍콩의 금융중심지역인 중환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경제 흐름을 방해해 정부를 압박할 계획이었다.

‘금종 점령’은 9월 26일 밤에 일부 학생들이 홍콩특별행정구 정부 앞에 있는 시민광장에서 경찰에 연행된 후 항의 운동이 일어나 전체 홍콩으로 확산된 운동이다.(4) 27일에는 약 5만여 명의 시민들이 금종으로 모여서 학생들을 지지했다. 그리고 28일에는 시위 인원이 계속 늘어서 경찰이 저녁 무렵 최루탄 87탄을 발사해 전체 홍콩을 놀라게 했다. 29일 홍콩대학생연합회(香港專上學生聯會, 8개 대학 학생들의 연합조직, ‘학련’이라고도 부른다)는 무기한 수업거부를 선포했다. 일부 사람들은 번화한 상업지구인 왕각(旺角, 몽콕), 첨사저(尖沙咀, 침사추이), 동라만(銅鑼灣, 퉁뤄완 혹은 코즈웨이베이)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텐트를 치면서 ‘점령’을 진행했다. 29일 저녁부터 30일 사이에 대략 2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거리를 ‘점령’했다. 경찰의 최루탄에 대비해서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나옴으로써 이 운동은 ‘우산운동’이라고 불리게 됐다.(5) 10월 20일 홍콩고급법원은 점령자들에게 즉시 금종과 왕각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21일 학생 대표와 홍콩 정부 대표는 2시간 동안 대화를 진행했고, 이는 모두 텔레비전을 통해 생방송으로 중계됐는데 결국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후 12월 15일 최후의 점령지였던 동라만 점령이 해산됨으로써 점령운동은 끝났다.

비록 ‘중환 점령’과 ‘금종 점령’이 주장하는 기본 목표는 홍콩특별행정구역 행정장관 선거와 입법회 의원 선거에 관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8월 31일 결의를 변경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일치하지만, 그 둘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중환 지역은 홍콩의 상징과 같은 지역이고 금종 지역은 홍콩 정부 소재지이다. 중환 점령은 전체 홍콩이 정치 체제 개혁을 요구한다는 의미가 있다. 한편 금종 점령은 홍콩 경찰과 정부의 강경한 조치에 대한 학생들과 각계 시민들의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금종 점령 참여자 중 상당한 사람들은 선거 방안에 대한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중환 점령도 찬성하지 않았지만, 28일 이후 거리로 나와 학생들을 보호하고 홍콩 정부가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중환 점령을 조직한 사람들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자신들의 결의를 발표한 후, 10월 1일부터 중환 점령을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 예상 참여인원은 수천 명을 넘지 않았고 학생들을 주력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9월 28일 새벽 전혀 예상치 못하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중환 점령을 조직한 사람들은 예정보다 서둘러 중환 점령 ‘사전 개시’를 선언했다. 그러자 당시 현장에 있던 일부 학생들은 이를 ‘도둑질(이용, 가로채기)’이라고 비난했고 일부는 현장을 떠났다. 입법회 민선의원과 사회운동 인사들은 ‘장발(長毛)’ 량국웅(梁國雄, 렁쿽훙)(6) 앞에서 몇 번이나 무릎을 꿇고 학생들이 남아서 중환 점령을 지지하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7) 중환 점령 조직자들은 금종 점령 중 소외됐고 자신들은 운동을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했다. 금종을 점령한 인원은 아주 많았고 통일적인 지도가 없었으며 상황도 아주 복잡했다. 학생들이 중심이 됐던 금종의 ‘점령구’는 일국양제(8) 하의 민주와 자치를 주요 요구사항으로 내걸었고, 첨사저(尖沙咀)에서는 ‘반중(反中)’과 ‘홍콩 독립’ 구호가 나와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왕각에서는 점령운동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반대하는 시민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면, 중환 점령은 북경을 대상으로 규모는 제한적이지만 목표는 거대했던 정치운동이었고, 금종 점령은 상당 부분 홍콩 정부를 대상으로 규모는 크지만 목표는 제한적이었던 운동이었다. 중환 점령은 장기적인 계획이 있었지만 결국 그것을 실현하지 못했고, 금종 점령은 우발적으로 일어나서 대체로 자발적이고 돌발적으로 형성된 사건이었다.

서방의 매체들은 이러한 운동들을 모두 ‘민주 쟁취’와 ‘북경에 대한 항의’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중환 점령과 금종 점령을 구분하지 않는다. 홍콩의 반대파(9)는 금종 점령이 중환 점령의 필연적인 발전이기 때문에 정당의 요구를 군중의 구호로 드러냈다고 강조했다. 홍콩 정부는 정부의 합법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점령 행동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이 둘을 하나로 묶으려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표면적으로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결의를 지지하므로 중환 점령을 반대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겨냥한 금종 점령을 반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중국 본토의 매체들이 이 두 운동을 구분하지 않고 - 예를 들어 금종 점령을 홍콩 지방 정부의 대응 방식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반응이라고 분석하면서, 최루탄 사용의 정당성 등과 같은 문제에 토론을 집중하는 것 - 오히려 이 두 운동 전후의 연계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 배후에는 아마도 세 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중국 본토 매체가 반복적으로 강조한 ‘합법-불법’을 기준으로 하는 입장이다. 어차피 불법은 중환 점령 계획과 금종 점령 행동의 공통된 본질이다. 그러므로 구분하지 않고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건의 성질에 대한 ‘배후론’적 사고방식이다. 배후 세력이 중환 점령을 계획했고 점령을 지도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배후 세력을 잡는 것이지 거리로 나온 학생들이 어떻게 이야기했고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는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중의 ‘사건화’에 대한 사고방식이다. 중환 점령이 제기한 원칙과 방안들이 금종 점령이 일으킨 교통 체증, 생활상의 불편함, 경제적 피해 등의 문제들로 바뀌었고, 따라서 기술적이고 전략적 조치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자들이 중환 점령과 금종 점령을 어떻게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분석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참가자들에게 동일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참가자들에게는 중환 점령과 금종 점령은 분리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산운동은 2003년 23조에 반대한 7.1 대규모 집회(2003년 동건화(董建華, 퉁치화) 당시 홍콩행정장관이 홍콩의 기본법 23조에 근거해 ‘국가보안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후, 이에 반대하는 약 50만 명의 시민들이 7월 1일 시위를 진행했다.(10) 이는 이후 모든 사회운동과 지역운동, 정치개혁운동을 아우르는 대표적 사건이 되었다. 전형적인 비정치적 사회로 인식되던 홍콩이 최근 10년 시위와 침묵 연좌시위, 집회 등의 방식으로 정치적인 입장을 표현하는 등 예상치 못했던 고도의 정치화와 ‘운동의 형성’을 경험했다. 시위 동원 범위와 입장의 급진화는 의회 정치를 훨씬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운동은 자신의 순수한 시민사회로서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 정당들과도 명확히 선을 긋고 있다. 우산운동은 이 상징적인 우산이 거대해서 각종 운동의 역량을 결집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인류학자의 일반적인 임무는 중대한 사건에 의해 가려진 일상생활과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본 의의를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이지만, 2014년 가을 홍콩에서는 일상생활 자체가 중대한 사건이었고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의미는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종종 그 의미가 행동보다 컸으며, 상징은 상징되는 내용보다 더 중요했다. 따라서 인류학자는 하나의 우산 아래에 어떠한 다양성과 차이가 존재하는지 분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다양성과 차이가 어떻게 하나의 ‘거대사건’으로 수렴되었는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이 운동을 직면해 이것을 순수한 이념(‘민주’)의 직접적 화신이나 국제적 음모의 결과로 보지 말고, 실제로 벌어진 사건 그 자체를 통해 도대체 무엇이 발생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먼저 이 거대사건으로 수렴된 여러 논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거대사건의 형성 중 모호한 ‘민주 홍콩의 독재 중국/본토에 대한 저항’이라는 틀이 각종 운동의 구체적인 요구에 녹아 들어갔고, 게다가 실제로 ‘민주’와 ‘독재’의 관계가 홍콩과 내지(중국 본토-역주)의 관계로 전화되고, 제도의 문제가 정체성의 문제로 변화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결코 ‘홍콩독립론’과 ‘종족론(族群論)’(11)이 특별히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 온 관광객들이 최근 몇 년 간 뚜렷이 많아지면서 홍콩 시민들이 이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중국 본토에 대한 반감(反感)이 커져서 운동의 중요한 동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12) 동시에 명확한 적에 대한 저항은 원래 건설적인 토론보다 더욱 호소력을 갖기 마련이라 저항은 손쉽게 문제를 타자-자아의 관계로 변화시켰다. 운동이 일단락된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운동의 목표가 일순간 물거품이 되어 형성된 좌절감이 협소한 본토론(本土論)(13)을 더욱 강화시킨 것은 아닌가? 원래 다양하고 구체적이었던 사회운동이 이러한 거대사건을 거친 후 더 큰 힘을 갖게 됐는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력을 소진해버렸는가? 2011년 금융 패권에 반대해 진행된 중환 점령 운동과 같은 사회 분위기가 2014년의 중환 점령을 통해 확대됐는가, 아니면 축소됐는가?(14)

저항 운동의 논리는 그것이 중공 체제에 대한 이해를 단순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종종 무형의 거대한 것으로, 그리고 틈만 있으면 침투하려고 하고 경직되어 있는 독재 체제로 간주된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전제정치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에 “중국을 바로 알고, 사회에 관심을 가지며, 나라와 민주를 사랑하자”는 구호는 어떻게 홍콩 청년들 사이에서 주류가 되었고, 적지 않은 학생들이 어떻게 중국 본토를 흠모하는 소위 ‘국수파(國粹派)’가 되었는가? 1989년 피비린내 나는 전제정치를 목도한 후에도 홍콩은 왜 여전히 평온을 유지한 채 ‘애국애항(15)’이 인쇄된 티셔츠가 1997년에 높은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는가? 그런데 2000년 이후 중국 본토가 개방정책을 시행하고 홍콩에 끊임없이 ‘선물을 보내는’ 상황에서는 왜 홍콩에서 오히려 ‘애국’은 비하적인 말이 되었고 ‘민주통일’ 구호는 ‘민주반공(民主反共)’으로 바뀌었는가? 우산운동은 홍콩과 중국 본토의 관계를 강조했는데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정확한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관계도 모두 필연적으로 역사적이고 구체적이며 다층적이고 다면적이지, 단순한 대립은 있을 수 없다. 중국은 종종 갑자기 군림하게 된 거대하고 속 빈 어떤 것으로 상상되곤 한다. 하지만 홍콩의 독특한 체제의 형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및 냉전 시기 중국의 독특한 위치, 1980년대 이후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어떤 의미에서 최근 20년 간 홍콩 최대의 정치 변화는 사실 홍콩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 일어난 것이다. 중국 본토에서 어떻게 전제정치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홍콩에서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없다. 본문에서는 ‘관계’의 시각에서 우산운동의 형성과 그 함의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이번 운동 중의 핵심 요구였던 홍콩의 ‘민주’와 ‘자치(자주)’가 어떻게 역사에서 구체적인 의의를 획득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운동 중에 거대한 동원 능력을 갖게 됐는지, 하지만 또한 어떻게 한계를 조성했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그 다음에 ‘일국양제’의 틀 및 그것과 중국 본토의 ‘당-국가’ 체제와의 관계로 돌아와 상반된다고 할 수 있는 문제를 질문하고자 한다. 즉, 중국공산당은 당시 ‘일국양제’라는 창조적인 제도를 제기할 수 있었는데 이와 같이 중공이 가지고 있었던 설득력, 동원력 그리고 조정과 통합 능력은 어쩌다 위기에 빠지게 되었는가? 우산운동에 대해서 이 글은 외부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쓴 것이지만, 홍콩과 중국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분석은 내재적 시각에서 쓴 것이다. 즉 나의 고찰은 이 관계의 변화에서부터 출발하려고 하는 것이지, 추상적인 ‘민주’, ‘독재’와 같은 범주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중공 체제에 대해 고찰할 때 나는 중공의 사회주의 정치에 대한 이해를 이론 자원 중 하나로 삼아 그 변화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중공의 담론을 역사를 해석하는 기준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내부에서 역사를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담론은 홍콩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 본토에서도 비현실적인 신화로 간주된다. 하지만 역사가 해석할 수 없는 황당한 웃음거리가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오늘날의 곤란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운동의 발생과 사건화는 홍콩 내부의 많은 사회 모순과 역사 간의 관계를 덮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운동의 발생과 사건화를 허구적인 과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매우 실질적인 사회적 결과를 가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현재 홍콩과 중국의 관계가 경색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홍콩의 2014년과 대만의 2014년은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 대만의 해바라기운동(16) 또한 유사한 거대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 본토와 대만, 홍콩의 이러한 새로운 정세는 우리를 거의 해결 불가능하고 소모적이기만 한 곤란한 상황으로 이끌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에 대한 토론이 일단 정체성 문제로 전환되면 세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주와 공론, 다원화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모두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협소하고 심지어는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이미 각지에서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 시기에는 인류학의 다양한 개입이 필요하다. 우리는 미시적이고 치밀한 민족지적 글쓰기도 필요하고 주류의 인식틀에 직접적으로 도전해서 사회 구성 과정 중의 연결들을 새롭게 다시 드러내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홍콩 민주화의 외향성(17)

2017년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 선거 방안은 이번 운동의 중심 의제였다.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은 2014년 6월 10일 <홍콩특별행정구에서의 ’일국양제’의 실천>이라는 제목의 백서를 발표해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은 반드시 ‘애국애항(愛國愛港)’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8월 31일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 선거 방안에 대한 결의를 통해, 먼저 추천위원회가 2~3명의 후보를 추천하고 모든 후보가 각각 추천위원회 위원 중 50% 이상의 승인을 얻으면 홍콩에서 등록된 모든 유권자는 1인1표를 행사해 직접 선거로 행정장관을 선출하도록 했다. 2017년의 추천위원회는 현재의 선거위원회의 연장으로 4개의 서로 다른 집단(18) 대표들이 1200명의 대표단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대표들은 각계에서 지정한 투표인들이 분배된 정원에 따라 선거로 구성한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추천위원회의 정원 분배와 선거 방법이 홍콩의 사회 구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사실상 공상업계와 소위 ‘친북경파’로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후보가 추천위원회 위원 중 50%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만 선거에 출마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은 사실상 민주파의 집권 가능성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애국애항(愛國愛港)’ 요구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기본법이 보장한 홍콩의 고도의 자치권 보장이라는 근본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행정구 행정장관 후보자는 시민들이 직접 추천하거나(‘공개추천’) 아니면 각 정당들이 추천한 후에 선거권을 가진 모든 홍콩 시민들이 직접선거하는 방식, 즉 ‘진정한 보통선거’를 제안했다.

‘민주와 자치’는 단지 선거 방안 문제만이 아니다. 점령 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다른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한 출발점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선 사람들은 홍콩 사회의 경제 구조, 특히 극대화된 빈부격차와 청년 세대(즉 ‘제4세대’)의 기회 박탈 문제에 대해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부동산 산업과 금융업의 번영은 보통 서민들의 생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대학 졸업생은 “최근 20년 동안 대학 졸업생의 임금 상승은 제한적이었지만 집값은 거의 10배가 올랐다”고 나에게 말했다. 적지 않은 홍콩 사람들은 중국 중앙이 홍콩을 통치하기 위해 홍콩의 부동산 산업 및 금융 자본과 연계를 맺고 그들을 지지해서 사회불평등이 더 심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이 ‘민주’와 결부된 것이다.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는 사실상 ‘상인(商人)에 의한 홍콩 통치’였던 것이다. 게다가 중공의 고위직들이 홍콩을 불법 자산 처리 기지로 삼은 것이 중국 본토의 반부패 정책 중 끊임없이 드러났는데, 이로 인해 홍콩 사람들은 붉은(‘사회주의’를 의미-역주) 집권 세력과 자본이 공동으로 홍콩을 통치하는 것에 대해 공포심을 갖게 됐다. 최근 폭로된 홍콩 공무원의 부패와 전통 주류 매체(특히 TV 방송국)의 중립성 결핍 역시 중국 본토 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한 결과로 인식되고 있다. 일부 홍콩 사람들은 진정한 보통선거가 실현되지 않으면 홍콩 정부는 홍콩인들의 의견을 중시하지도 않고 현실을 바꾸려고 하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홍콩 사람들의 민주에 대한 절박함은 홍콩의 국내 및 국제 지위의 하강에 따른 위기의식과 관련이 있다. 홍콩의 GDP는 이미 상해, 북경보다 낮을 뿐만 아니라 곧 광주, 심천에도 추월당하고 있다. 홍콩 사람들이 내내 깔보았던 싱가포르도 홍콩의 국제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19) 이러한 위기감은 단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홍콩에서의 일반적인 추측은 홍콩이 중국 경제에 점점 덜 중요해진 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점점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황금알을 낳던 백조가 반갑지 않은 새끼 오리로 변해버린 것이다. 중앙의 정책은 더 이상 지원이 아니라 문제 처리에 속도를 내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2003년 이후 특히 2013년 이후의 중앙정부의 정책은 점점 강경해지고 있어서 마치 이러한 추측이 확인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주파는 행동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차피 경제적 이점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정치적 압력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20)

재차 말하지만, 홍콩 시민들의 중국 본토 사회에 대한 심리적 간극과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 정서는 무시할 수 없다. 중국 본토와 관련된 홍콩자유여행, 중국 본토의 보따리상인들, 홍콩 원정 출산, 공기 오염, 취업 경쟁(21) 등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든 보통선거 방안에 대한 토론 중에 터져 나온 반감 정서는 상당히 뚜렷하다. 예를 들어 많은 학자들과 학생들은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8월 31일 방안이 후보자에 대한 제한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보통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에 격렬히 반대한다. 그들은 홍콩 사람들이 1인 1표를 행사해 선거에서 선출하기 전에 후보자를 통제하는 것이 홍콩 유권자들의 정치적 인격과 존엄에 대한 무시라고 생각하며 보통선거를 안 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긴다. 한 대학생은 나에게 “(중국 정부는-역주) 무엇을 근거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우리 입에 구겨 넣으려고 하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그 결의를 발표하기 전에 홍콩의 각계는 정부에서 주최한 자문회의에 참여해서 다양한 의견을 제기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인민대표대회의 결의는 이러한 의견들을 반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의 가장 가혹한 방안을 선택한 것으로 본다. 심지어 약간의 타협적인 제스처조차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후보자가 추천위원회 성원 중 50%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북경은 이미 이전과 동일하게 행정장관 선거를 통제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온건 민주파와 심지어 친북경파도 인민대표대회의 결의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무원의 ‘백서’는 홍콩에 대한 더욱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대립적 감정이 운동의 이후 발전 방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점령파의 민주와 자치권에 대한 요구는 허구적인 면도 있고 실질적인 면도 있다. 실질적인 면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허구적인 면은 그것이 다양한 사회 정서를 모아서 절충해버렸다는 것이다. 민주 담론은 이번 운동 중 특히 실질적인 것을 통해서 허구적인 것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으로써 거대한 동원력을 형성했다. 또한 직접적으로 중앙정부를 향한 저항적 구호로서 강력한 외향성으로 이어졌다. 민주의 내부 과정과 실질적 효과가 - 보통선거는 어떻게 홍콩 경제의 공정성을 높일 수 있는가? 민주는 어떻게 홍콩의 경제 구조를 고도화할 수 있는가? 특히 현재 상황에서 홍콩의 다양한 사회 역량은 어떻게 효과적이고 질서 있는 민주적 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가? - 반드시 명확한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내부의 모호함 때문에 점령 운동은 대외적으로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번 운동의 합리성과 한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외향성을 분석해야 한다.

외향성은 홍콩 민주화 과정 중의 한 역사적 특징이다. 현재 홍콩의 민주 정당은 중국 본토의 1989년 ‘천안문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서 1990년에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원래 홍콩 사회와 별로 관계가 없었던 사건인 1989년은 홍콩 민주운동의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1992년 크리스 패튼(22)이 홍콩에 부임한 후 그는 전임자와 중국 사이에 암묵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모종의 이해관계와 런던 측의 의문을 무시하고 정치 민주화를 빠른 속도로 추진했다. 이와 동시에 중국 측은 홍콩에서 정치단체와 정당을 육성하려는 노력을 강화했다.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민주주의자가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애국자가 되었다. 오늘날 ‘민주파’와 ‘건제파(建制派)’는 대립하면서 홍콩의 정치 구조를 결정하는데, 그들이 홍콩 사회 내부를 얼마나 대표하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홍콩 민주의 외향성은 또 형식적 정치 민주(실질적 경제 민주 및 사회 민주와 상대되는 개념인)에 대한 강조와 연계돼 있다. 홍콩의 기본 사회 복지와 법치주의, 정치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1970년대 이래 홍콩의 영국 정부 통제 아래 형성됐다.(23) 이러한 권익은 현재 민주화 운동의 목표는 아니며 민주화는 처음부터 중앙 정부와의 관계 문제였다. 이 또한 민주 운동의 강령이 추상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한 한 원인이 됐다. 예를 들어, 중환 점령 계획이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제출한 방안의 수정을 강조한 원인 중 하나는 그것이 ‘국제 표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 민주파는 다른 나라와 중국 간의 대립 관계를 이용해서 중앙에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로 홍콩 문제를 국제화하려고 했는데, 이것은 홍콩 민주화의 외향성을 더욱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외향성은 민주화운동이 외적 요인의 영향을 받고 그 지향이 홍콩의 외부를 향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가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은 현행 체제를 부정함으로써 일련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현행 체제의 내부 메커니즘과 반동의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의미하는 것이다.(24) 이와 관련해 1989년 중국 본토의 학생운동은 깊은 교훈을 남겼다. 1980년대 후반 중국 민중들의 통화팽창에 대한 공포와 관료의 부패에 대한 증오, 가속화되는 사회불평등에 대한 불안 등 이 모든 것들은 정치 민주에 대한 요구로 표현됐다.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마치 일단 민주의 빛이 비추기만 하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정치와 평등 관념에 기반해서 당시 권력 주도의 시장화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지만, 운동 중에는 오히려 사회주의 제도에서 벗어나라는 요구로 표현됐다. 어떻게 민주화를 실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어떠한 구체적인 구상도 없이 개별 책임자가 물러나라는 요구만 했다. 구체적인 사회 모순은 민주주의의 미완성으로 추상화됐다. 이는 오늘날 중국에 대해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 사회문제에 대한 단순화는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고도의 일견 일치를 조성했다. 이에 따라 정치적 태도는 계속해서 급진화됐고 정치 요구는 계속 높아졌다. 그래서 결국 학생들은 스스로 퇴로를 차단해버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운동의 칼날이 점점 개별 권력자를 겨냥하게 됐을 때 국가 내부의 고위층은 분열됐고 이것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전면적인 폭력 진압이 결정됐다.(25)

둘째, ‘민주’ 담론이 1980년대 초 조금씩 드러난 각종 사회 문제를 덮어버렸고, 그 결과 이러한 사회 문제는 오랫동안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없게 됐다. 민주에 대한 꿈이 산산조각 난 후, 지식인이나 경제인들, 관료들, 학계의 학자들, 어용학자들 모두 운동의 긍정적 요소와 한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진행하지 못해서 이후의 사회 변화에 대해 분석적인 참조점을 제공할 수 없게 됐다.

셋째, 급진운동과 그에 대한 반격이 조성한 사상적 공백 상태를 통해 1989년 이후 중요한 위치를 맡게 된 관료들이 1989년에서 1992년 사이(26)의 동요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혁명 전통과의 밀접한 관계가 단절돼 버렸다. 또한 그들은 서방의 정치 이념까지 배척하면서 그 결과 현존 제도의 유지와 현실적인 이익 추구만을 중심으로 하는 임무를 자임하게 됐다. 1992년 이후 시장화는 더욱 맹렬히 진행되어 가공할 힘을 얻게 됐고, 경제불평등은 전에 없이 가속화됐다. GDP가 계속해서 기록을 세우는 사이 자본과 권력 동맹은 각계 각층에서 조용히 동맹을 맺었다. 따라서 중국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1989년 운동의 발발과 그 후과로 분석한 왕휘(汪暉, 왕후이, 1997; 2008)의 주장은 핵심을 찌르는 분석이다.

당연히 오늘날 홍콩의 상황은 다르다. 하지만 여전히 비슷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도대체 홍콩의 금융과 부동산 자본의 현황을 어떻게 분석해야 할 것인가? 불합리한 경제 구조에 도전하는 것은 현실에서 어떠한 구체적인 계기를 찾을 수 있을까? 홍콩과 중국 본토, 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관계는 역사적인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고 이에 대응해야 할까? 보통선거는 이러한 문제들에 결코 대답할 수 없다. 반대로 형식적인 정치 민주의 문제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진정한 문제들은 오히려 은폐될 수도 있다. 운동이 끝난 후 정치체제 형식이 어떻게 변화했든지 간에 핵심 이익 집단은 약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화될 수도 있다. 격렬한 운동은 어쩌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보수 세력에게만 합법성을 제공하게 될 지도 모른다.

다자 ‘불개입’ 하의 자치

만약 민주화에 대한 요구의 외향성이 간접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자치권은 직접적으로 대외적인 것이다. 우산운동 중 자치에 대한 요구는 사실 민주에 대한 요구보다 더 격렬했다. “홍콩은 중국의 또 다른 한 도시가 될 수 없다”는 구호는 민주파의 구호이자 적지 않은 보통 시민들의 우려이기도 했다. 홍콩은 확실히 상당히 특수한 도시 경제체이다. 홍콩의 자주성은 어떠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 형성된 것이고, 지금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홍콩의 자주성은 1997년 이전 상당히 특별했던 홍콩의 식민지 지위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홍콩은 영국의 사실상의 식민지였다. 영국은 홍콩의 안전을 보호하고 기본적인 질서를 보장했다. 하지만 또 정식 식민지는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빌려온 지역, 빌려온 시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홍콩에서 ‘고도의 식민주의’를 실행하지는 않았다. 홍콩섬의 엘리트들은 뿌리까지 영국화되지는 않았고 홍콩의 일반 시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것들이 홍콩의 일상 사회생활에서 일정 정도 자치성을 갖게 했다. 영국 정부는 홍콩에서 전형적인 경제자유주의정책을 시행했는데, 상업무역은 공공복지 지출과 노동권익 보호 등과 같은 ‘사회 외부적’ 간섭을 최대한 적게 받았다. (이것은 전후 영국 본토의 발전과는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홍콩에 새로 온 많은 이민자들도 ‘빌려온 지역, 빌려온 시간’이라는 생각을 갖고 경제적인 생존과 발전만을 추구했다. 이렇게 홍콩 경제는 순수한 자유자본주의의 모범이 되었다. 홍콩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땅이 아니라 마치 모든 것이 자유롭게 유동하는 시장과 같은 곳이다. 홍콩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와서 각축을 벌이도록 수용하면서 대신 입장료를 받고 수수료를 버는 개방된 플랫폼이다. 순수한 자유자본주의는 어떠한 제약도 없이 자주적이고 자치적이지만, 반면 이는 홍콩 사회의 정치 성격의 결여로 이어지게 됐다.(27) 홍콩의 영국 정부는 1970년대 이후 중국인 엘리트 계층을 정치로 끌어들였다. 한 편으로는 중국인 사회의 자주적인 경제 생활과 일상생활을 허락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 사회의 자주성이 정치화됨으로써 정부와 완전히 분리되고 심지어는 대립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즉, 소위 ‘자치’는 엄격한 정치적 상황(즉 홍콩의 영국 정부와 해당 사회 사이의 통치와 피통치 관계) 하에서의 일종의 행정관리 방식이지 비정치적인 의미의 자치는 아니었다.(28)

이와 같은 홍콩의 고도의 자유와 정치적 성격의 결여는 2차 대전 이후의 경제 발전에 특수한 장점을 제공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경제의 급속한 발전은 냉전 체제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베트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서방이 통제하는 세계시장체계에서 배제된 것과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의 고립(고립을 선택하기도 하고 고립되기도 한)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거대한 시장을 남겼다. 이 뿐만 아니라 그 국가들이 서방의 지지도 받게 함으로써 좋은 조건으로 국제자본주의 경제체계로 진입할 수 있게 했다. 게다가 홍콩은 다른 ‘용’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고립 중의 중국과 서방 간의 무역을 거의 독점한 것이다. 홍콩의 자주와 자치는 홍콩의 독립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수의 주체들이 이러한 비정치적인 플랫폼을 필요로 한 결과였다. 즉 그 자주와 자치는 홍콩이 스스로 가지게 된 정치적 민주가 아니라, 홍콩이 정치적 주체의 자격이 없다는 전제 하에 여러 주체들이 ‘개입하지 않는’ 자유항이었기 때문이다. 그 번영은 내생적인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와 경제 상황의 특수한 위치가 결정한 것이었다. 냉전이 끝나고 중국이 개방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세계정세도 크게 변했다. 중국이 달라짐에 따라 홍콩의 위치도 필연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홍콩 민주 정치의 발전 역사는 중국의 당-국가 체제 형성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이것은 각 주체들이 ‘일국양제’의 발전 궤적에 대해 원래 예상했던 것들이 왜 허망한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 일정 정도 설명한다. 모두들 중국 본토가 개혁개방을 거쳐 홍콩과 자연스럽게 점점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떤 측면에서는 심지어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그 배후의 원인은 19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홍콩의 발전이 홍콩의 정치 주체로서의 자격 결핍 및 이에서 비롯한 사회 정치 성격의 모호함에서 기인했다는 것이다. 반면 개혁개방 후 중국의 발전, 특히 근래의 ‘굴기(급속한 부상-역주)’는 장기적인 혁명과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으로부터의 고립 중 형성된 선명한 정치 성격 및 정치적 자주의 원칙에 대한 견지(예를 들어 서방의 경제정책을 쉽게 따르지 않고, 정치적 각도에서 경제 문제를 분석하는 습관) 덕분이다. 만약 이러한 역사 발전의 내재적 논리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쌍방에게 ‘민주’ 혹은 ‘독재’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에만 치중한다면 서로 소통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홍콩 역사에서 형성된 정치 성격의 모호함으로 인해 아마도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더 외향성을 갖게 된 것 같지만, 더 큰 문제는 중앙정부가 현재 기본적으로 실어상태(失語狀態)에 있어서 자신의 정치 주장, 특히 구체적인 정책을 명확히 표현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이는 중국의 당-국가 체제 그 자체에 대해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당-국가 체제의 변화?

일국양제에 관한 많은 토론 중 대부분의 논자들은 이 구상의 배후에 있는 점들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당시 중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홍콩의 역할, 홍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충분히 이용하고 장기적으로 계획한다’는 일관된 생각, 홍콩의 영국 정부의 객관적 영향 등등. 비록 충분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이런 점들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당시 등소평은 어떻게 이런 구상을 제기할 수 있었는가이다. 등소평은 일국양제가 각종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겠지만, 그는 이러한 충돌은 부차적인 불편함이기 때문에 전략적 판단의 방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 30년 후에 이러한 불편함이 지금과 같은 곤란함이 되었는가? 이는 단지 신의를 저버린 문제인가?

중앙인민정부 주홍콩연락사무실에서 3년 간 근무했던 법학자 강세공(强世功, 창스궁)은 일국양제의 의의를 중국공산당의 티벳, 대만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뿐 아니라 중국 한당대(汉唐代) 이래의 제국 형태와도 연계시켰다. 그 결과 이러한 국가 주권의 다양한 내재적 구성 방식은 중화민족이 존재해 온 특별한 방식이고 “장기 역사”가 부여한 합법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29) 통일 주권 하 다양한 통치 권력이 공존하는 형식이 중국의 독자적인 것인지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토론해볼 만한 문제이다. 중국의 현실은 확실히 유럽에서 기인한 현대 ‘민족-국가’ 관념과는 다르다. 현대 민족-국가 관념은 원래 하나의 이상적인 형태로서 세계적으로 단지 소수의 몇몇 국가만이 이러한 형태에 진정으로 부합할 뿐이다. 여기에서 구체적인 현실과 일반적인 이론상의 차이를 유형의 차이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일국양제 구상을 천년천조(千年天朝, 중국의 전통 왕조-역주)의 연속으로 보기보다는 우선 그것을 현실 조건 하의 생동하는 실천으로 보고 일국양제와 역사 상 주권 구성의 구체적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통일 국가의 주권이 다양한 수준의 정치 주체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첫째, 국가기구를 초월할 수 있는 주권의 상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다양한 종교 신분을 가진 청조(清朝) 황제와 빅토리아 여왕이 그러하다. 국가기구는 통상 주권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구이기 때문에 현대 국가가 주권을 실현하는 방식은 비교적 단일하다.(30) 중국공산당이 현재 이와 같은 국가를 초월하는 주권체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역할은 자신의 역사성을 갖고 있다. 중국공산당 발전사 상의 중요한 한 지점은 강력한 아래로부터의 군중 동원과 위로부터의 조직제도 건설을 결합하고 교차한 것이다. 전자가 전복성을 갖고 있고 후자가 보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결합은 독특하다. 1949년 이전 중국공산당은 혁명과 기존 권력의 전복을 기본 사명으로 삼아, 지방소비에트를 발전시키고 혁명근거지를 건립하며 해방구를 형성해 이러한 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진행했다. 그리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법규를 반포해 민주적 통치를 실험하며 사상투쟁과 ‘정풍’운동(31)을 전개하고 이데올로기적 동원과 통제를 진행하는 등 풍부한 국가 통치의 경험을 쌓았다. ‘무장할거(武装割据)’(32)의 전략적 의의는 지역적 건설(33)과 전국적 혁명을 결합했다는 것이다. 지역적 건설은 전국적 혁명에 지속성을 갖게 했다. 1949년 이전이 건설로서 혁명을 지지하는 것이었다면 1949년 이후는 혁명운동의 방식으로 건설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1949년 이후 중국공산당은 오랫동안 ‘집권 혁명당’이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동시에 강력한 군중 동원과 사회 통치 능력을 갖게 해 일반적 의미의 정당과 관료체계로서의 국가를 초월하게 했다.(34) 이러한 중국공산당의 특수한 위치에 기초해 등소평은 일국양제 방안을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다당제 민주체제 하에 있었다면 기존의 연방 체제는 유지될 수 있었겠지만 창조적인 사고로 새로운 국가 구성 방안을 도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형적인 독재 체제는 일반적으로 매우 취약해서 종종 협소한 민족주의 등과 같은 우파 세력에 의존한다. 또한 민주 체제 하에서보다 이러한 체제의 창조적 개혁을 이루기가 더 힘들다.

둘째, 강력한 이데올로기와 고도의 정치적 자신감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식민주의 시기의 사회다윈주의와 문명진화론이 그와 같다. 청제국은 유학을 핵심으로 하는 천조사상(天朝思想)이 있었고, 1980년대에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있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당시 엘리트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고 동시에 대중에게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홍콩의 정치경제 제도와 생활방식이 왜 50년 동안 변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면서 등소평은 1988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 50년은 변할 수 없었고, 50년 후는 변할 필요가 없다.” 미래에 대해 “변할 필요가 없다”는 바로 이 역사적 판단에 근거해 “변할 수 없었”던 현실적 전략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변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근거해 등소평은 일국양제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지도력’은 고도로 인정받은 권위와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결합해 형성된다. 국제공산주의운동 중 발전해온 각종 이론들, 특히 그람시, 레닌, 트로츠키에서 모택동까지 혁명운동과 관련한 이론에 근거해 우리는 현대 정치 중의 지도력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초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첫째는 역사 발전 방향에 대한 전망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정당의 사명을 설명함으로써 정당이 순간적인 이익에 대한 요구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또한 보수적인 정치 요구(예를 들어 전통신앙이나 민족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등)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는 엄격한 기율이 있는 발전된 조직이다. 이러한 조직은 광범위한 군중을 동원할 수 있다. 셋째는 강력한 간부대오이다. 각계 군중 속에서 성장했고 신념이 강하며 솔선수범하는 모범적인 간부가 필요하다. 모택동이 강조한 것처럼, 간부대오는 중요한 것들 중에서도 특히 중요하다. 지도력은 정치적 정당성과 이론적 설득력만을 의미하지 않고 도덕적 매력과 감정적 친밀성도 필요하다. 이것은 하나하나의 간부들이 매일 솔선수범으로 해내야 하는 것들이다. 간부는 당과 군중의 구체적인 매개체이다. 간부가 있어야만 정치 이론과 효과적인 조직도 발전시킬 수 있다. 군중과 긴밀히 결합된 관계를 유지하는 간부가 없다면 이데올로기는 공허해질 것이고 엄격한 조직 기율은 독재의 도구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간부의 역할은 또한 지도권과 통제권을 구분하는 것이다. 지도권은 기존의 체제에 의존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해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중에 비로소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지도권은 군중노선과 분리될 수 없다. 지도권은 실천 중의 ‘지도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권력이지만, 통제권은 먼저 권력 관계를 정의하고 고정된 권력 관계에서 사회 생활에 대한 주도적인 능력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정당이 자신의 지도력에 대해 높은 자신감이 있지만 체계적인 통제력은 상대적으로 약한 상황에서 그 정치적 상상력은 종종 가장 풍부해지고 창조력은 가장 강해진다.(35)

중국공산당의 지도력에 대한 자신감은 1951년 티벳의 ‘17조협의’, 1981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 엽검영(葉劍英, 예젠잉)이 제출한 ‘대만의 평화통일과 관련한 9조 방침 정책(즉 ‘엽9조’)’, 그리고 홍콩에 대한 ‘12조’ 제출의 공통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건국 초기든 문화대혁명 후의 수습 시기든, 중국공산당은 자신이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고 있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위대한 사업을 이끌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에 홍콩과 대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1950년대와 1980년대 창조적인 소수민족 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일국양제 구상이 제기된 원래의 배경에는 이미 큰 변화가 발생했다. 1989년 중공의 지도력은 전에 없던 도전에 직면했고, 그에 대응한 전략은 새로운 통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1992년 이후의 경제시장화는 사회 상식을 새롭게 확립하고 집권당의 권위를 강화한 것 같지만, 1990년대 이후의 ‘발전주의’와 1980년대의 ‘경제 건설 중심’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1980년대의 발전은 확고한 방침이었으며 다소간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였다. 그 ‘확고함’은 실질성과 설득력을 갖고 있었으며 정신적으로 만족감을 주는 일면이 있었다. 그런데 1992년 이후 발전에 대한 확고한 방침은 대체로 많은 사회문제에서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한 실책에 대한 반응이었고 사회모순을 덮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 ‘확고함’은 수단의 강제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개 대표(36)’의 제출은 중국공산당이 선명한 정치이데올로기와 노동자 농민의 대표라는 원래의 지도권을 조정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형식적으로는 전민당(全民党, 즉 비계급적 대중정당-역주)이 되는 것을 추구했다. 구조적인 통제력의 강화와 행정권의 확대, 그리고 실질적인 지도력의 약화는 동전의 양면을 구성했다. 2003년 중공은 약자의 이익 강화, 조화로운 사회, 인간 중심, 과학적 발전관, 새로운 민중의 형상 수립 등을 강조했지만, 여러 심층적인 모순은 건드리지 못하면서 이 기간에 사회불평등은 오히려 심화되었고 중앙정부의 도덕화 현상이 출현했다. (예를 들어 ‘민중의 명을 받든다’) 그리고 지방정부는 공리주의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고 심지어 점점 약탈적 현상이 나타났다(항표 2010). ‘안정 유지’는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이 되었는데, 정치 체제는 원래 ‘유지’를 위한 체제이기 때문에 안정 유지라는 이름의 많은 이상한 현상들을 단지 개별 사람들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2008년 이후 또 한 번의 전환이 일어났다. 국가 부의 급속한 증대(중앙정부의 재정수입 증가, 소수 대형 및 특대형 국유기업의 독점적 발전, 지방정부의 토지 등과 같은 희소자원에 대한 투기적 운용)와 서방의 경제위기 및 이에 기인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에 대한 세계적인 성찰은 중국 내 민족주의 정서와 국가주의 이론을 강화한 것이다. ‘중국모델’, ‘중화문명의 굴기’, ‘자신감 있는 노선, 자신감 있는 체제’와 같은 담론이 이러한 변화를 반영했다. 하지만 이러한 권위에 대한 자신감과 지도력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지도력이 떨어진 상황을 오히려 은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중국 정부는 일국양제에서 ‘양제(兩制)’를 ‘중국 본토의 사회주의’와 ‘홍콩의 자본주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37) 많은 사람들이 느끼기에 현실 중 양제의 가장 명확하고 직접적인 차이는 일당제와 다당제의 차이이다. 앞서 말했듯이 바로 강력한 일당집정의 ‘당-국가’ 체제가 바로 일국양제의 구상을 가능하게 했다. 일당제와 다당제의 관계는 당파 간의 권력에 대한 쟁투로 단순화해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당과 당 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과 국가 간의 관계에 있다. 바로 당이 당시에 상대적인 초월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국’ 중 ‘양제’ 심지어는 다수의 제도를 수용하는 구상이 가능했다. 만약 당과 국가가 고도로 일체화되어 있다면 당은 국가를 초월해서 국가를 지도할 수 없고 오히려 국가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 하에 있는 당은 지도력을 확보할 수 없고, ‘국가’는 유연성과 포용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홍콩의 문제는 일반적인 지방과 중앙 사이의 분권 문제가 아니다. 이는 홍콩이 ‘불완전한 주권’을 갖고 있고 일반적인 지방 정부가 갖고 있지 않은 법률적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중국 본토의 지방과 중앙의 관계가 상당 부분 당의 행정화(관료화)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과 중앙 간의 경제 이익과 행정 권력 게임은 결국 당의 위로부터의 간부 인사권 발동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다. 혁명 시기 당과 지방 사회 사이에 형성된 유기적인 관계는 당 자신의 행정화 및 당과 정부의 일체화로 인해 상당 부분 약화됐다. 말하자면, 당과 국가기구의 일체화는 사회생활에 대한 당의 일체화를 대체했다. 당은 홍콩에서 행정화된 위계적 수단으로 관리할 수도 없었고, 또한 자신의 전통적 이데올로기인 지방 사회와의 유기적 연계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당이 홍콩의 상업 세력과 반공개적으로 진행한 암묵적 계약은 이익 연대를 기초로 한 위탁식 관리였으며 이것이 바로 현재 위기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다. 따라서 ‘분권(分權)’이나 ‘주권-통치권’의 관계와 같은 틀을 통해 홍콩 문제를 분석하는 것은 단지 문제의 일부분만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홍콩 학자인 류조가(劉兆佳, 라우시우카이, 2012)는 중공과 홍콩의 관계 중 또다른 한 측면을 제기했다. 중공은 중국의 집권당이고 또한 당연히 홍콩의 집권당이다. 그런데 중공은 홍콩에서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많은 정치적인 문제에서 불확실성이 숨어 있는 복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89년 이후 중공은 사도화(38)와 같은 전우를 잃어버렸고, 점점 이가성(39)과 같은 ‘한 배의 동료’에게 의존했다. 중공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 없게 되자 점점 더 물질적 이익과 조작적 공작을 통해 침투하는 것에 의존하게 됐다. 중공은 홍콩에서 반공개 상태로 있고, 홍콩을 중국 본토 고위관리들이 거대한 금권을 교역하는 천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홍콩의 문제는 중국 본토의 문제와 아주 다른 게 아니라 독특한 방식으로 중국 정치의 총체적인 깊은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중공이 일국양제를 제출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자신감 있는 지도권은 그 자신의 장기적 무장혁명,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경험과 분리할 수 없다. 그리고 홍콩에는 당시 정당의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고 정치이념과 담론의 경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 홍콩의 운동은 역사상 수차례의 혁명이 더 이상 정치적 합법성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 요구의 다양성이 명확하게 증가했다는 점 등과 같은 새로운 도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도전은 중국 본토에도 존재한다. 홍콩의 곤경은 바로 중공이 국가의 지도권을 어떻게 확보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정치는 종종 운동이 끝난 후에 시작된다. 운동의 성패는 운동이 당시 제기한 구체적 요구들이 해당 시기에 얼마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는지만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의 시도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으려고 하는 운동은 모두 비현실적인 것이다. 끊임없는 운동만이 진실하고 성공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 만약 운동의 구체적인 요구는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는데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실패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랍의 봄’이 바로 그러한 예다.(40) 반대로 구체적인 목적을 즉시 이루지는 못해서 그 순간에는 실패한 운동으로 보이더라도 만약 사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내고 한순간 일어난 혁명적 역량이 장기적인 사회 진보의 역량으로 전화될 수 있다면,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9년 중국의 사회운동이 실패한 것은 단지 그것이 진압됐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회운동이 장기적 사회 변화의 역량으로 전화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심지어 그러한 경험을 의미 있는 사상적 자원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식계는 운동의 경험을 제때에 갈무리하지 못했고, 운동 후 혹은 일상생활에서 진행된 잠복된 정치에 대해 지속적인 개입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홍콩의 우산운동과 대만의 해바라기운동은 우리가 그것들을 어떠한 사건으로 평가할 것인가와 무관하게 그 운동들은 이미 새로운 정치적 과정을 만들어냈다. 인류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은 통일된 사고의 틀과 공통의 언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 사이, 그리고 여러 사회 역량 사이의 구체적인 내재적 연계와 단절을 자세하게 서술함으로써 절대화된 주권 사상, 텅 비어버린 민주 담론, 그리고 본질화된 본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다.

[필자] 항표(项飚, 샹뱌오) | 영국 옥스퍼드대 사회문화인류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북경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졸업했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로 인구 유동과 사회, 경제적 변천에 대해 연구해왔고, 최근에는 중국 동북 지방 출신 주민들의 이주에 대해 연구했다. 대표 논저로 Making Order from Transnational Migration: Labor, Recruitment Agents and the State in Northeast China, Global Body Shopping, 『跨越邊界的社區―北京「浙江村」的生活史』와 이 책의 영문판인 Transcending Boundaries Zhejiangcun The Story Of A Migrant Village In Beijing 등이 있다.

[번역] 박석진 | 중국 칭화대清華大 역사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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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역주] 이 글은 대만에서 발행되는 학술지 <고고인류학(考古人類學刊)> 2015년 제83기에 게재됐던 글이다.
(2)[역주] “잔중(佔中, 점중)”은 중환(中環) 지역 점령을, “잔중(佔鐘, 점종)”은 금종(金鐘) 지역 점령을 의미. 이 둘의 중국어 발음은 ‘잔중’으로 똑같기 때문에 중국어로 ‘잔중’이라고 할 때에는 ‘중환 점령’을 의미하는 것인지 ‘금종 점령’을 의미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3) ‘중환’과 ‘금종’은 일상용어로는 이 두 동명의 지하철역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이 두 지역은 모두 홍콩섬의 중서구(中西區)에 속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중환은 홍콩 금융의 중심 지역이고 금종은 2011년에 홍콩정부청사 건물을 완공하면서 행정 중심 지역이 되었다.
(4) 9월 22일 월요일 홍콩의 25개 학교는 일주일 간 수업 거부를 시작하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8월 31일 결의와 다른 의견을 발표했다. 수업 거부는 중환 점령 계획의 일부분이 아니었고, 게다가 학생들의 요구는 중환 점령을 조직한 사람들의 방안과 비교적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학생들의 요구는 더욱 급진적이었고 중환 점령 방안보다 시민들의 지지를 적게 받았다. 26일 금요일 마지막 날에 학생들은 금종에 있는 정부 건물 근처 첨마공원(添馬公園)에 모였다. 같은 날 홍콩의 중고등학생 조직 학민사조(學民思潮) 역시 같은 이유로 하루 수업 거부를 진행하고 금종으로 모였다. 하지만 그날 다른 한 단체가 정부의 허가를 얻어 건국기념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시민광장(公民廣場)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시민광장은 원래 개방된 공공 공간이었지만 2012년 7월 ‘반국민교육’ 시위가 진행된 후 주변에 담이 쳐졌다. 26일 밤 100~200명의 학생들이 담을 넘어 광장으로 넘어 들어갔는데 74명이 경찰에 의해 포위되었고 학생 지도부 몇 명이 체포되었다.
본문의 ‘중환 점령’에서 ‘금종 점령’까지 발생한 일련의 정보는 홍콩과 각국(각 지역)의 중문 및 영문 매체, 특히 <남화조보(南華早報, South China Morning Post)>를 통해 수집했고, 나 자신이 10월 5일부터 8일까지 홍콩 현지에서 관찰한 것을 통해 취득했다. 그리고 탁가건(卓嘉健)과 량아천(梁雅茜)에게 중요한 도움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다.
(5) 경찰은 9월 26일부터 최루스프레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에 사람들은 우산을 들고 방어하기 시작했다. ‘우산운동’이라는 말은 27, 28일 사이에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했다. 우산의 사용 규모는 28일 이후 갑자기 증가했고, 심지어 시위대가 우산으로 경찰을 공격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6) 량국웅(梁國雄)은 현재(2015년 당시-역주) 입법회 의원이고, 홍콩혁명마르크스주의동맹의 핵심 성원이었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신봉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운동에 참여했고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입법회에서 여러 정치단체를 수차례 조직하고 탈퇴했다. 머리가 길기 때문에 별명이 ‘장발(長毛)’이다.
(7) South China Morning Post, ‘Occupy Central is on: Benny Tai rides wave of student protest to launch movement’(Sung et al. 2014) 
<남화조보(南華早報,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홍콩과 중국 본토,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온 기자와 편집단이 이번 운동을 보도하는 중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보여주었고, 각 주체들의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남화조보팀’은 홍콩과 중국 본토 사회가 긍정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좋은 선례를 보여주었다.
(8) [역주] 一國兩制, 중국이라는 한 국가에서 본토의 사회주의 체제와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가 일정 시기 동안 공존할 수 있다는 통일 정책
(9) 즉, 입법회 중에 ‘범민주파’ 진영을 주체로 해서 평소 야당 역할(반대)을 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선거 방안에 격렬히 반대하고 점령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민주파’라고도 불리고, 입법위원회 중 친북경 성향이라고 할 수 있는 ‘건제파(建制派)’와 대립되는 세력이다.
(10) [역주] 홍콩 기본법 23조는 국가전복과 반란을 선동하거나 국가안전을 저해하는 위험 인물 등에 대해 최장 30년 감옥형에 처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이와 관련한 법률을 제정하도록 규정했다.
(11) 종족론은 홍콩 사람은 특수한 한 종족(혹은 민족, ethnicity)이라는 주장으로, 이는 홍콩의 언어, 문화, 역사, 사회구조는 중국 본토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홍콩은 중국 본토와 명확한 경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12) 홍콩 사람들이 비난하는 ‘자유여행’ 정책은 2003년 ‘사스’ 후의 홍콩 경제가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했다.
(13) 본토론(localism) 논리에 따르면 홍콩은 당연히 주권을 가져야 한다. 급진적 본토론은 기본적으로 홍콩 독립을 주장한다. (본토론은 기본적으로는 추상적 측면에서 자기 지방의 역사와 문화 전통 등에 특별한 애착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여러 정치적 함의를 갖는 용어가 되었다.-역주)
(14) 2011년 10월부터 2012년 9월 사이에 소수의 홍콩 청년들이 홍콩상하이은행 총본부 건물 앞 광장을 점령하면서 ‘중환 점령’ 운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홍콩 정치경제 문제의 핵심을 직접 겨눈 운동이었지만 참여자는 보잘 것 없이 적었고 시민들에게는 전혀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2014년의 정치화된 중환 점령 운동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15) [역주] 愛國愛港, 나라(중국)와 홍콩을 사랑한다.
(16) [역주] 2014년 대만과 중국 본토 사이의 ‘서비스무역협정(海峽兩岸服務貿易協議, CSSTA)’에 반대해 일어난 대규모 항의 운동. 3월 18일부터 4월 10일까지 무려 23일 동안 대만의 국회에 해당하는 입법원을 대만 역사상 최초로 점거했다. 시위 참여자들이 대만에서 희망을 상징하는 해바라기꽃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면서 일명 ‘해바라기운동’으로 불린다. 이 운동에서도 반중국, 대만 독립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했다.
(17) ‘홍콩 민주화의 외향성’은 홍콩 민주화가 홍콩 사회 내부의 역량에 의해 추진된 것(예를 들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어서 민중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열망이 높아져서 정치 참여의 통로가 넓어진 것)이 아니라, 홍콩과 중국 본토를 구분하기 위해서 그리고 홍콩의 ‘국제도시’로서의 지위(따라서 ‘국제’ 기준에 맞춰야 한다)를 유지하기 위해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민주화의 동력이 홍콩 사회 내부의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거나 내부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 대한 요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민주화는 중국 본토에 대한 홍콩의 자기 보호 조치이자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조치이다. 소위 ‘외향성(externally oriented)’은 아시아의 많은 국가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8) 이 네 집단은 각각 (1) 공상금융업계 (2) 전문업계 (3) 노동, 사회, 종교계 (4) 정치계를 의미한다.
(19) 광주(廣州, 광저우)에 있는 중국 싱크탱크 ‘트리거 트렌드(智穀趨勢, Trigger Trend)’의 2014년 8월 보고에 따르면, 1997년 홍콩의 GDP는 중국 총 GDP의 15.6%를 차지했지만, 2013년에는 단지 2.9%만을 차지했다. 2010년 상해(上海, 상하이)의 GDP는 홍콩을 추월했고 2011년에는 북경(北京, 베이징)이 추월했다. 2017년이 되면 광주와 심천(深圳, 선전), 천진(天津, 톈진)이 모두 홍콩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Lu 2014)
(20)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이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홍콩의 본토주의파는 이것이 중국 본토가 고의로 홍콩을 모함함으로써 압력을 가하고자 하는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여전히 중국이 인민폐 역외 사업 개발 등에 대한 전략적 고려 사항에서 홍콩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홍콩은 과감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중국의 자본주의화 촉진에 대한 홍콩의 기능과 민주 가치에 대한 홍콩의 추구를 직접 연결시킨 것이다.
(21) 보따리 상인(水貨客)이란 자가 사용이라는 명목으로 홍콩에서 휴대전화, 가전제품, 트렁크 가방, 식품 등을 구매한 후 세관 신고 없이 중국 본토로 운송해서 개별 판매업자들에게 되파는 것을 의미한다. 보따리 상인은 국가 간 무역 중 오랜 역사를 지닌 현상이다. 2012년부터 중국 본토의 보따리 상인들이 홍콩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구매하면서 홍콩의 분유 부족으로 시민들의 사회적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임산부 조산실 침대 문제는 2001년 이후 중국 본토의 임산부가 홍콩에 와서 출산하는 수가 늘어나서 조산실 침대가 부족해 홍콩 현지의 임산부가 조산실을 이용할 수 없었던 문제를 가리킨다. 2011년 이후 문제가 심각해져서 일부 홍콩 시민들이 시위를 하거나 중국 본토의 임산부들이 홍콩에 오는 것을 제한할 것을 요구하는 광고를 싣기도 했다.
(22) [역주] Christopher Francis Patten, 彭定康, 영국인, 1992~1997년까지 홍콩 총독 역임
(23) 홍콩은 민주적이지 않고 ‘행정이 정치를 흡수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기본적 권익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모든 역사적 과정이 비정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70년대에 홍콩 사람들의 생활이 개선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중국 본토에서 진행된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1967년 폭력성을 동반해 일어난 ‘영국 폭정 반대’ 운동이었다. 홍콩의 영국 정부는 이 운동을 통해 교훈을 얻어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 조치를 채택했다.
(24) 홍콩 민주화의 외향성을 제기하는 것이 홍콩 시민들이 실질적 민주화를 일관되게 추구해 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시의 공공 업무에서부터 대학 캠퍼스 생활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에 대한 추구는 매일 존재한다.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정당의 부상으로 대표되는 공식 민주화와 2003년 이후 운동의 전개이다.
(25) 추당(鄒讜, TsouTang, 쩌우당)은 1990년 쓴 <천안문>(1994)에서 1989년의 비극적인 결과를 전능정치(全能政治, totalism) 체제 하 협상 체계의 결핍 때문으로 결론 내린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모든 주체가 후퇴는 곧 패배이고 패배는 곧 죽음이라고 믿기 때문에 정치 게임은 생사를 건 사투가 된다. 추당은 그 글에서 자신의 희망을 국가와 사회의 화해와 재건에 기탁하며, “당국은 도덕적 오류와 이데올로기의 고갈로부터 도덕적 구제와 자신의 갱신을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일부 학생들은 극단적으로 무책임한 태도에서 벗어나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들 자신을 새로운 시민이자 충성스러운 반대파로 변모시켜 결국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당-국가와 사회의 화해는 중국과 세계 여론의 화해를 촉진할 것이다.”라고 썼다.(추당 1994: 203) 이 점에서 홍콩은 1989년의 북경보다 훨씬 낫다. 추당의 글을 알려준 담동학(譚同學)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26) [역주] 1989년 ‘천안문 사건’에서 1992년 등소평(鄧小平,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사이를 의미. 등소평의 이 남순강화를 통해 중국은 ‘천안문 사건’ 이후의 혼란에서 다소 벗어나 개혁개방 정책을 더욱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로 평가된다.
(27) ‘정치 성격’은 역사적 투쟁을 통해 형성된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를 다루는 한 사회의 입장과 경향으로 초보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무장혁명을 경험한 사회는 통상 비교적 강한 정치 성격을 갖는데, 예를 들어 베트남과 태국, 남북한과 일본, 프랑스와 영국을 비교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비교적 강한 일체감을 요구하며 이미 형성된 정치 이데올로기가 있고 행동의 기회를 잡는 대신 입장을 두고 경쟁하는 데에 익숙하다. 하지만 정치 성격이 강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정치 성격이 강하면 부담이 될 수도 있고 사회가 큰 대가를 치뤄야 될 수도 있다. 정치 성격이 강하고 약한 것은 객관적인 역사 진행의 결과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이 처한 사회의 정치 성격과 그 역사적 형성을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야만 그에 대한 분석이 공허해지지 않을 수 있다.
(28) 강세공(強世功, 2007)은 이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해 결론을 내렸다. Ian Scott(1989)도 참고.
하지만 이와 동시에 홍콩의 주체성 결여는 중국 본토 측의 정책적 원인도 있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중앙 정부는 신중국 건립 후 홍콩을 ‘해방’시키고 자신이 주장했던 반식민주의를 관철할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홍콩에 더 큰 자주권과 더 많은 민주를 보장해줄 것을 포함해서 ‘탈식민화’ 정책을 영국 정부에게 요구하는 것에 대해 매우 경계하고 반대했다. 중앙 정부는 홍콩 문제를 중국과 영국 이 두 주권 국가 사이의 협상으로만 엄격히 제한하기를 희망하면서 홍콩 문제에 제3자가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 소위 ‘세 발 의자는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29) 강세공(2008a, 2008b). 중국 역사 상의 제국과 현대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는 근래 적지 않은 학자들이 글을 썼다. 왕휘(汪暉, 2004), 갈조광(葛兆光, 2011).
(30) 유럽의 고전적인 민족-국가 이론에 따르면, 현대 국가는 국가의 합법성이 동질적인 ‘인민’의 의지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족과 부락에 대한 초월이라기 보다는 그것들에 대한 연장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다.
(31) [역주] 중국공산당 내 잘못된 기풍을 바로잡기 위해 당 내에서 전개한 정치운동
(32) [역주] 분산된 다수의 지역에서 지역을 방어하며 무장투쟁을 벌이는 것
(33) [역주] 분산된 다수의 지역에서 지방소비에트와 혁명근거지 건립
(34) 이는 왕휘(2013)가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은 ‘초강력 정당(超級政黨)’과 ‘초월적 정당(超政黨)’이라는 이중적 요소를 갖고 있다고 지적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왕휘에 따르면 소위 ‘초강력 정당’은 경쟁 중인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이 모두 의회 내 경쟁형 정당 정치 형성을 목표로 두지 않고 헤게모니형 정당(혹은 지도적 정당) 체제 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소위 ‘초월적 정당’은 양자의 대표적 정치가 의회 내의 다당제 혹은 양당 정치와는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미래를 대표할 수 있는 그람시의 소위 ‘신군주’와 더 가깝다.
(35) 이와 관련해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1902), 모택동 <대중생활에 관심을 두고 사업방법에 주의를 기울이자>(1934), <신단계론>(1938), <우리의 학습을 개조하자>(1941) 등을 참조할 것.
(36) [역주] 강택민江泽民(장쩌민)이 2000년에 제기한 중공의 지도방침으로, 중공은 선진 생산력 발전의 요구,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 가장 많은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지침. 이러한 방침을 통해 자본가/기업가들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37) 많은 사람들은 지금 홍콩이 중국 본토보다 사회주의적 요소를 더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10월 7일 홍콩중문대학에서 토론할 때 한 학생이 나에게 “지금 중국은 국가 전체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상황인데 홍콩과 같은 도시 하나가 독자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했다.
(38)[역주] 司徒華, 쓰투화, 홍콩교육전문인협회 회장, 홍콩애국민주운동시민지원연합회 주석, 홍콩특별행정구 입법회 의원 등 역임
(39)[역주] 李嘉誠, 리카싱, 홍콩에서 가장 부자라고 알려져 있음. 장강그룹 설립자.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제정위원회 위원 등 역임
(40)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해 아랍 세계에서 파상적인 대규모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다. 이집트, 리비아, 예멘, 시리아, 바레인 등 국가의 정부 수장이 하야했다. 이 운동은 교육 수준이 높고 심각한 취업난에 직면한 도시 청년들이 주체가 되어 독재 반대와 민주 쟁취라는 구호로 대규모 시위와 인터넷을 통한 동원 및 조정을 주요 수단으로 진행됐다. 서양 언론들은 이를 새로운 민주화의 물결을 가져온 ‘아랍의 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2012년 중반에 이르자 아랍의 봄은 ‘아랍의 겨울’로 바뀌었다. 대중운동은 오랫동안 집권한 독재 정부를 신속하게 끌어내렸지만, 이 운동은 농촌과 노동자 농민에게 침투하지 못했고 효과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하지도 못했다. 혁명 후의 국가는 종교 근본주의 세력이 장악하거나 군대가 통제하거나 내전에 빠져들게 되었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원문의 전문(全文) 번역문이고, 축약문이 <역사비평> 2019년 가을호에 게재됐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참세상>, <레디앙>, <동아시아국제연대>에 공동으로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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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표(글, 영국 옥수퍼드대 교수)·역 박석진(역, 중국 칭화대 박사과정)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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