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 곁엔 ‘천리마마트’가 없을까

[워커스]사회주의, 세상을 향한 유쾌한 시나리오


#1. 이런 직장 어디 없나

얼마 전에 쌉니다 <천리마마트>라는 웹툰이 드라마로 각색돼 방영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막 닻을 올렸으니 얼마나 흥행할지는 알 수 없지만, 주변에서 1회를 시청한 사람들은 ‘참신하고 재밌다’며 꽤 괜찮은 반응을 보이더군요. 저는 몇 년 전 원작 만화가 연재되고 있을 때 한 번 보고 이번에 다시 보게 됐는데요. 스스로의 처지가 달라져서 그런지, 만화를 보면서 드는 느낌도 달랐습니다. 학생 시절 이 만화는 그저 심심풀이로 보는 코믹물이었죠. 그런데 학교를 마치고 생활 전선에 서 있는 지금, 몇 년이 지나 다시 이 만화를 보게 됐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작품 제목이 드러내듯, 이 만화는 한 마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냅니다. 유통업계에 종사하겠다는 생각을 딱히 해본 적이 없는데도, 현실에 이런 곳이 있기만 하다면 그 마트 점원으로 일하고 싶더군요.

이 작품은 약간 엉뚱한 배경에서 시작합니다. 한 재벌그룹 중역이었던 ‘정복동’이라는 인물이 그룹 회장의 말도 안 되는 경영 방침에 반대하며 직언을 날리지만, 이 때문에 좌천당해 그룹 유통계열사인 ‘천리마마트’ 사장에 부임하게 되죠. 그런데 ‘재벌 유통계열사’라는 허울 좋은 이름과 달리, 이 마트는 체인점도 없이 달랑 본점 1곳뿐이었습니다. 또 손님도 없고, 장사할 의지나 제대로 된 상품도 없는, 적자투성이에 그룹 내에서는 ‘유배지’로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사실상 ‘사표 쓰고 나가라’는 것과 다를 바 없던 이 좌천에 분노한 ‘정복동’은 독특한 방식으로 복수를 계획합니다. 자신이 발령받은 천리마마트를 완전히 망쳐놓음으로써 그룹 본사에 ‘폭탄을 투척’하겠다는 거죠. 여기서부터 ‘기상천외한’ 경영이 시작됩니다. 초장부터 정규직 직원을 대폭 채용하는데, 이력서 제출도 없고 그저 지원자들이 면접장에서 자신이 살아온 기구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것만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합격’ 통보를 하죠. 가난에 쪼들리던 젊은 음악인, 과거 은행에서 일하다 정리해고된 대리기사, 건달 출신 백수, 해고당한 청소업체 노동자, 외부의 침략으로 쫓겨 온 이주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직원으로 채용합니다.

‘쇼핑하기 좋은 마트’가 아니라 ‘일하기 좋은 마트’를 내세우는가하면, ‘1+1 증정행사’ 대신 ‘1+1 채용’을 표방하죠. 카운터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선 채로 일하니 아예 카운터에 온돌을 깔아 앉아서 일하게 하고, 고객센터에서 불만을 접수하는 노동자에게는 곤룡포 같은 옷을 입히고 왕좌에 앉혀서 손님이 진상을 부릴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납품업체에 지급하는 대금을 3배로 올려주고, 인근 대형마트들이 줄지어 들어선 바람에 위기에 처한 영세상인들을 아예 마트 안에서 장사하도록 입점시킵니다. ‘직원용 휴식공간’이라며 대형 풀장을 짓고, 시민들에게 개방하기도 하죠(이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각종 기행을 벌입니다).

하지만 ‘정복동’의 의도와는 반대로 점원들과 납품업체, 소비자들이 호응하면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마트에는 활력이 넘치게 되고, 큰 손실을 만들어내려고 꾸민 계략(?)들은 하나같이 이미지 개선과 매출 폭증으로 이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천리마마트는 더 이상 직원들에게 단순히 ‘생계를 위한 직장’이 아니라 아웅다웅하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 변해갑니다. 작품 초반, ‘지역의 흉물’ 취급을 받던 마트는 갈수록 인근 노동자들이 부러워하고 지역 주민들이 즐거워하는 공간이 되죠. 한때 그룹 본사에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일로 괴로워하던 ‘정복동’ 역시, ‘마트를 망하게 하려는’ 집념에서 벗어나 조금 엉뚱한 방식이긴 해도 마트 직원들을 지키려는 사람으로 변해가면서 작품은 훈훈함을 물씬 풍겨냅니다.

#2. 사회주의 직장생활

이제 현실로 돌아오면, 갑자기 ‘현타’가 오죠.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이런 마트는 없습니다. 애초에 ‘정복동’이 생각했던 것처럼, 자본주의에서 저런 경영은 ‘회사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 취급을 받기 십상이죠. 아무리 사장이 ‘선의’를 갖고 있다 한들, 결국 경쟁에서 뒤처지고 이윤을 충분히 남기지 못하면 기업 자체가 살아남지 못합니다. 요새는 기술발전과 함께 첨단산업을 필두로 직장문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고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그 한계는 아주 뚜렷이 드러납니다. 가령 선도적인 전기차업체 테슬라에서 정규직 직원 수천 명을 해고하는가 하면, 아마존은 창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우리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외치며 파업을 벌일 만큼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유명하죠.

혹시 여러분은 지금 출근길이 행복하신가요? 일요일 해가 저물 무렵부터 아쉬움과 아득함이 밀려오고, 빨리 다음 금요일이 찾아오길 바라지는 않으신지요? 위로부터는 실적 압박, 아래로부터는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눈치, 거기에다 동료들과의 성과 경쟁까지. 조금 엉뚱한 얘기를 하면 면박당하기 일쑤고, 불만이 있어도 혹여 불이익을 당할까 눈치를 봐야 하는 오늘날의 직장에서, 누군가는 ‘이 회사를 언제까지 계속 다닐 수 있을지’ 걱정하고, 다른 누군가는 ‘잘 퇴사하는 법’을 궁리합니다. 하루의 시간 중 상당 부분을 보내고, 한 사람의 일생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한 일터. 정녕 직장은 ‘천리마마트’가 그리는 것처럼 생기발랄하고 즐거운 놀이터가 될 수 없는 걸까요?

사회주의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장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구성원들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해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더 이상 이윤 생산에 목을 매지 않게 되는 만큼, 직장의 일상은 지금과는 달라집니다. 사회주의에서 노동은 그 결과물로 사회의 필요를 충족함과 동시에, 노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고통을 최소화하고 노동자의 만족감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재구성될 것입니다. 이윤을 뽑아내야 하는 기업주와 주주, 그리고 그들의 지시를 받들어야 하는 경영자와 관리자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직접 자신들의 노동을 어떻게 수행할지 고민하고 결정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이윤을 회수하고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족쇄가 사라지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직장에서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천리마마트’가 거의 전적으로 사장 ‘정복동’의 ‘엉뚱한’ 지시에 의존했다면, 사회주의에서는 그 직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모두가 이 ‘엉뚱한’ 생각들을 함께 내놓고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서서 일하는 게 불편하다면 정말 온돌을 설치해 앉아서 일할 수도 있고, 점심식사 후 노곤함 때문에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면 낮잠을 잘 수 있는 쾌적한 시설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서로 횟수나 시간을 정해 노동자 누구나 자신이 만들고 싶은 물건을 만들거나 아이디어를 구상해볼 자유시간을 배정할 수도 있겠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만우절처럼 타 부서와 업무를 바꿔서 해볼 수도 있고(이를 통해 다른 부서 동료들의 고충도 이해할 수 있고, 내 회사가 전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도 있겠죠), 동종업계 다른 기업체나 아예 다른 산업계 회사들과 교류로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원하는 노동자는 직장을 통해 다양한 일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겁니다.

동료 노동자들과의 관계도 변화합니다. 지시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결정하고 수행하는 관계가 뿌리내리게 되죠. 직장은 ‘경쟁과 불안의 공간’이 아니라, 내가 일하고 싶다면(직장 내 범죄 같은 특정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얼마든지 계속 일할 수 있는 삶의 공간이 됩니다. ‘언제 잘릴지 모르니 먹고살려면 더러워도 일단 참아야 하는’ 시간은 끝납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당사자들이 명실상부하게 그 일터의 주인으로 결정권을 가지며 자신의 노동과 시공간을 스스로 만들고 바꾸고 꾸밀 수 있죠. 직장에서의 위계가 사라짐으로써, ‘동료보다 더 많은 실적을 쌓아 이윤 창출에 복무한 대가로 경쟁에서 승리’하는 시스템도 없어집니다. 대신, 사회적 필요치 만큼 생산하는 데 기여하면서 이 노동공동체를 어떻게 더 즐겁게 만들 수 있을지가 ‘성공적인 직장생활’의 기준이 되죠. 오늘날 동료들과 함께하는 회식조차 ‘업무의 연장’ 심지어는 ‘위계와 폭력’으로 연결된다면, 그래서 ‘칼퇴근’을 기다리며 조금이라도 빨리 직장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사회주의에서 직장생활은 거꾸로 ‘다채로운 삶의 연장’이 될 것입니다.

#3. 모두의 ‘천리마마트’를 위해

물론 ‘천리마마트’는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전혀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천리마마트’가 부닥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은 작품 속에서 ‘작가의 설정’과 ‘기막힌 운’으로 메워질 따름이죠. 대표적으로, 적자투성이라는 마트에서 괜찮은 조건의 정규직 직원들을 대거 고용하고, 노동자들의 복지나 앞에서 열거한 사장의 각종 ‘기행’에 들어가는 비용을 어디서 충당하는 걸까요? 작품 속에서는 그룹 본사로부터 자금 지원을 끌어온다는 설정을 하고 있지만, 이것만 보더라도 현실의 자본주의에서 ‘천리마마트’를 구현하기 어렵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설령 현실에서 ‘정복동’ 같은, 혹은 그의 희한한 계획에 아낌없이 자금을 대는 ‘선량한 자본가’가 있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가령 ‘천리마마트’는 해당 지역 상권 중심부에 위치한 3곳의 경쟁업체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죠. 이 대형마트들은 나날이 성장하는 ‘천리마마트’를 꺾기 위해 납품업체를 꼬드겨 물량을 빼내는가하면, 출혈을 감수하면서 대폭적인 저가 할인행사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천리마마트’가 이 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은 대개 운이나 ‘꼼수’ 덕분이죠. 사장의 기상천외한 행동이 의도치 않게 소비자들을 끌어들인다던가, 상대 마트의 비상식적 수준의 저가 공세에 알바를 대량으로 고용해 역으로 그 할인상품을 몽땅 사들여 ‘내 물건이 팔리지 않아도 좋으니 경쟁 상대방의 막대한 출혈을 유도하는’ 방법을 쓰는 겁니다. 요행으로 ‘천리마마트’가 이 경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다른 3곳의 인접 대형마트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천리마마트’ 직원들은 여전히 행복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경쟁업체의 모든 노동자들이 ‘천리마마트’의 행복을 나눠가질 수는 없죠.

결국 ‘천리마마트’가 자본주의의 파도 속에서 고고한 섬으로 존재하길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도 ‘정복동’과 함께 마트를 이끌어가는 점장 ‘문석구’는 때때로 ‘인력효율화’의 유혹을 느끼죠(물론 ‘정복동’에 의해 번번이 좌절될뿐더러, 마지막엔 점장 본인도 ‘경쟁 승리’가 아닌 ‘마트 직원들과 함께하는 일상’을 지키려 하지만 말입니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특정 기업에 한정한, 그것도 언제 어떻게 침식당할지 모를 ‘불안하고 제한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사회주의에서는 개별 기업들이 각자 이윤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맞춰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개별 자본이 기업을 소유하지 않고, 국가나 지역 공동체 등 사회가 소유하면서 노동자들과 함께 운영과 통제를 맡게 되죠. 같은 품목의 재화나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체는 여러 곳일 수 있지만, 각자의 이윤극대화 계획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조율된 계획에 따라 생산하는 만큼 서로를 짓밟고 누르기 위해 아웅다웅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처럼 출혈경쟁과 과잉생산, 마케팅에 막대한 비용을 낭비할 필요가 없고, 호시탐탐 노동자를 비용 절감 대상으로 노리는 근본적 원인도 제거하죠. 만약 한 기업체에서 노동과정의 편의나 제품의 질을 높이는 혁신을 이뤄냈다면, 다른 기업체 노동자들이 함께 공유해 자신의 직장에서도 도입하면서 확산시킬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는 목적의식적으로 노동자와 소비자의 만족을 높이는 데 자원 투입을 계획하고 집행함으로써, 특정 자본의 자금력이라는 우연적 요소에 의존해야 했던 자본주의보다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혁신의 기반을 제공할 겁니다.

‘천리마마트’를 보면서 재미를 느꼈던 건 그저 이 작품이 ‘코믹 만화’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작품 속 인물들이 자신의 일터를 자신들만의 독특한 일터로 만들어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유쾌하고 즐겁죠. 이 만화 혹은 드라마를 꼭 보라고 광고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나는 일터에서 행복한가, 불행한가’하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누구에게나 먹고 살 수 있는 일터가 제공돼야 하고, 인생이 즐거워야하는 만큼 일터 역시 재밌어야 한다는 것. 사회주의는 그런 세상을 향한 유쾌한 시나리오입니다. [워커스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