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언급하기 싫은 ‘어쩌구’에 대해

[기고] 날 울게 한 톨게이트 노동자의 피켓


하긴 해야겠는데 막상 하기는 너무 두려운 일이 있다. 그것은 출근도, 설거지도, 머리 감고 말리기도 아닌, 안경 바꾸기와 신발 바꾸기다. 안경은 도수를 약간만 높여도 소주 마신 것 마냥 정신을 못 차리고, 신발은 떨어져 나갈 정도나 돼야 좀 신을 만하다. 근시가 심하고 내 발이 까다로운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과정은 무척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내일은 꼭 바꾸자, 다음 주는 꼭, 다음 여행 전에는 꼭! 안경은 기스도 나고 시야도 흐려져 울며 겨자 먹기로 렌즈를 바꾸게 되지만 신발은 사실 웬만하면 똑같은 걸 그대로 산다. 나는 새 신발에도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은 밑창에서 비가 새어 들어오니 새 신은 사야지.

뉴턴의 운동법칙에만 관성이 있는 게 아니다. 살아가는 것에도 관성이 있다. 나는 관성을 포기하고 한 달 전에 안경을 바꿨고, 열흘 전에 신발을 바꿨다. 요즘 나는 위아래로 말이 아니다. 단편적으로 관성을 거부하고 ‘적당히’, ‘쉽게 쉽게’를 포기했다. 반면에, 관성에 순응하는 ‘고인 물’들이 있다. BBC 채널에서도 ‘KKONDAE(꼰대)’를 ‘오늘의 단어’로 꼽은 것이 뇌리를 스쳤다. 이제 기성세대와 청년 문제는 어느 정도 노출되는 듯하다. 또 다른 물음이 전두엽을 때렸다. 청년 문제는 왜 회자되는가? 청년은 가장 핸들링 하기 쉬우며 머지않아 출산을 해야 하는 군집이기 때문이다. 출산은 왜 회자 되는가? 인구가 곧 국력이기 때문이다. 국력과 출산은 누구에게 가장 이득인가? 국가뿐이다. 그러니 청년 문제를 좀 다뤄야겠지. 왜 미디어에서 중년은 대상화가 되지 않는가? 중년이 조이스틱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청년 문제에 숟가락 얹는 기성세대에 대해 투덜거렸지만 이젠 그냥 그들에게 관심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건 이제 사치다.

왜 사치인고 하니, 이제 다른 이슈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질량이 클수록 관성도 커지는데 지면이 늘어가는 이 꼬락서니의 관성도 대단하다. 아니, 몇 만 명이 응원해주지 않아도 먹고 살아갈 걱정 없을 그들에게 왜 지면을 할애해주는 걸까? 지면과 돈을 투자한들, 이 게임이 어떻게든 끝난들 성소수자에게, 동물에게, 여성에게, 장애인에게, 노동자에게, 이주노동자에게, 난민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그 거대한 관성을 일단 무너뜨려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일은 꼭 안경을 바꾸겠다면서 ‘나중에’로 미루는 나와 다를 게 없다. 안경이야 나 혼자 마음 하나 먹으면 되는데, 원 이제 성소수자, 동물, 여성, 장애인, 노동자, 이주노동자, 난민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무소불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저들이 말하는 국민 중엔 너와 나는 간데없고 저들의 계획 속엔 너와 나의 미랜 없지.’
꽃다지 - 「주문」


「주문」이 나온 지 얼추 20년인데도 모든 정권에 들어맞고 있다. ‘저들’이 몇 번 바뀌었어도 ‘너와 나는’ 그대로다. 새 정권의 웃는 낯에 속지 않기로 다짐했다. 웬걸, 꼬락서니가 이럴 줄 알았지. 저들이 바뀌었는데 내 삶은 바뀐 것이 없으며, 동물권도 나아진 것이 없으며, 장애인 이동권도 제자리이며, 여성 성차별은 말할 것도 없으며, 노동자에게 좋은 세상은 저세상으로 가다 못해 이젠 노동자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으며, 성소수자는…. 말을 말자. 아니, 말을 하자. 개헌안 기본권에 성소수자는 고려되지 않았으며 ‘세상 모든 가족 함께’라는 행사에 동성가족은 없었다. 꼴이 이런데 오직 그 한 명에만 집중된 그 트래픽과 지면을 진짜 눈곱만큼이라도 주면 안 되겠나? 아니면 차라리 조국 청문회에서 나온 “동성애는 법적 사안이 아니나 동성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나라 상황에서 이르다”는 발언이라도 분석해 봤으면 좋겠다.

바꿀 안경은 바꿔야 하고 바꿀 운동화는 바꿔야 한다. 지금 안경과 지금 운동화가 아무리 편하다 하더라도 안 보이는 안경을 쓰다가는 미간에 주름이 지고 떨어져 나간 운동화는 비가 새어 들어온다. 그런데 낡은 안경과 운동화가 이제는 상당히 불어서 거대질량 블랙홀이 됐다. 거대질량 블랙홀은 엄청난 관성에 가속도까지 붙었다. 법무부 장관이 당장 입에 풀칠할 걱정을 하나? 아니 그런데 왜 그의 이슈에 솔선수범 숟가락을 얹는가? 다 관성 때문은 아닐까? 궤도를 바꿀 마음이 있는 사람은 없는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질량은 커버렸고 속도도 빨라졌다. 손닿는 데 관성 정지 버튼이 있는 사람은 관성을 저지할 마음이 없다. ‘저들’은 목숨과 주거에 걱정도 없고, 결혼도 할 수 있으며, 버스도 탈 수 있겠지. ‘저들’은 당사자가 아니니 손을 뻗지도 않을 테다. 한편 ‘너와 나’의 미래에 변수는 너무나 많고 그 변수에 희소식은 드물다. 무엇보다 ‘너와 나’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더욱더 넓어진다.

‘때’는 기다려서 오는 것이 아니며 분위기가 달궈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폭력의 기준을 토론하고 논의하지 않는 것처럼 ‘때’가 됐다는 분위기에도 기준이 없다. 때는 지금이라고 정하면 된다. 차별금지법을 지금 만들고 장애인 이동권을 지금 보장하고 동물권에 대한 법규를 지금 만들면 된다. ‘나중에’가 아니다. 박 시장의 배신, 문 후보의 나중에, “너무 힘들어요. 동료가 될 우리! 농성은 이제 그만!” 이 모든 것에 ‘저들’의 ‘나중에’가 드러난다.

배신과 ‘나중에’에도 별로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의 피켓에 울었다. “우리가 옳다! 소수자 동지도 옳다 응원합니다♥”라는 피켓을 든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사진이었다. 부산퀴어문화축제를 ‘저들’이 훼방을 놓아 부산으로 규탄 집회를 가는 길에 성소수자들이 톨게이트에 연대 방문을 했다. 절실한 사람들이 서로의 절실한 마음을 헤아려 처지를 알아준다는 것이 귀한 세상이 됐다.

사실 이 글을 본 누군가가 이 글을 두고 가타부타 말할까 두렵다. 그다지 논리적으로 반박할 능력도 없으며 사실 나도 ‘PC함’의 둑이 무너질 때가 종종 있는 사람이다. 내가 이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 의심되어 주저된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는 게 저들이 말하는 것밖에 없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나중에는 없으며 있는 것은 지금뿐이다. 새치기가 얼마나 화가 나는지 다들 잘 알면서! 이건 미루기며, 새치기도 관성적인 새치기고, 인터셉트하고도 일 처리도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