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는 사랑입니다

[사회주의탐구영역] 'N포'는 누가 만들었나


저는 낭만주의자도 아니고, 낭만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도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때는 있었습니다. 근사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그럴 처지는 예나 지금이나 아니지만 말입니다), 하다못해 나란히 기대고 앉아서 TV만 보고 있어도 편안하고 마음이 따뜻해졌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이 사람만 옆에 있으면 버텨낼 수 있겠다’고 자만하기도 했죠. 솔로 동지 여러분, 벌써부터 핏발 세우고 분노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침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 김에 말하자면, 크리스마스 즈음에 차였거든요.

아무튼 눈물 좀 닦고 얘기를 이어가자면, 그 후 학교를 졸업하고 스스로 벌어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 속에서 연애에 관한 생각도 변해가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빠듯하다 보니, 한편으로는 ‘사랑은 사치’라는 드라마 속 유치찬란한 대사가 훌륭한 고증으로 느껴지기도 했죠. 하지만 그보다 우울했던 건, 주머니 사정 앞에 스스로 작아지는 모습을 발견할 때였습니다. 경제생활의 비전에 대해 나 자신조차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설령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한들 얘기라도 꺼내 볼 자신감이 사라진 거죠.

연애와는 거리가 멀어진 지 오래지만, 저는 여전히 사랑은 인간사에서 먹고사는 문제 못지않게 중차대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사회주의도 결국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보다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연말이라 슬슬 싱숭생숭해질 이 틈을 타, 이번 호에서는 사랑과 사회주의를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1. 당신의 사랑을 위한 계획, 사회주의

아주 당연한 얘기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자본주의에서건 사회주의에서건, 연애 관계가 성립하려면 일단 서로 마음이 맞아야죠.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된다고 해서 모두가 연애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그럴 수 있다면야 좋기는 하겠습니다만) 황당무계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사회주의에서도 만약 서로의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아쉽지만 일방의 짝사랑일 뿐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음만 맞는다고 행복한 사랑의 꽃길이 열리는 건 아닙니다. 단적으로, 2010년대 들어 젊은 세대를 가리키는 표현 중 하나로 ‘N포 세대’라는 게 있죠.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생계 자체도 불안하니,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에서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된다고 해서 붙은 표현인데요. 그리 오래된 말은 아니지만, 연원을 따지면 이 ‘N포 세대’라는 표현의 시작은 ‘3포 세대’였습니다. 여기에서 ‘청년들이 포기하는 대표적인 3가지’로 꼽힌 게 바로 ‘연애, 결혼, 출산’이었죠.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먼저 옥죄는 것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게 참 잔인하고도 미묘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게 마련이고, 누군가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 사랑을 이어가기도 하지만,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가진 것도, 줄 수 있는 것도 이 노래밖에 없는’ 사랑은 노래로 듣고 영화나 드라마로 볼 땐 감동적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물질적 현실 속에서 당장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사람에게는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닌 것도 사실입니다(더군다나 노래도 못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비극적이죠). 더군다나 연애를 넘어 결혼하고 애까지 생긴다면,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의 이른바 ‘풋풋함’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무게가 부부의 어깨를 짓누릅니다. 자가는 고사하고 전세든 월세든 일단 살 곳을 마련해야 하고, 당장 부부의 생계를 이어나가는 동시에 아이의 육아부터 교육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20년에 걸쳐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렇게 아이를 다 키우고 나면, 부부에겐 빚이나 안 남으면 다행입니다. 어떤 이는 ‘고난 속에서의 사랑’을 칭송하기도 하지만, 왜 굳이 사랑을 고난 속에서 해야 하나요?

사회주의에서는 최소한 경제적 문제 때문에 사랑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간 이 지면에서 몇 차례 다뤘지만, 사회주의에서는 각자의 노동시간을 대대적으로 줄이고 그만큼 일자리를 늘리면서, 충분히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보수를 제공하기에 생계 걱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내 집 마련’에 대한 걱정도 사라집니다. 이미 지금도 차고 넘치는 수많은 주택과 건물을 사회화해서, 매매가 아니라 공적 책임으로 관리비 수준만 받고 거주자가 원하는 기간만큼 임대하죠. 아이가 있어도 영유아 때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국 공유화된 기반 시설과 확충된 인력,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차별 없고 수준 높은 국가 책임 보육과 교육을 제공합니다.

자, 지금까지 대체 자본주의가 여러분의 사랑에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고난을 뿌리고 훼방질을 놓기는 했겠죠. 하지만 바로 위에서 읊었듯, 사회주의는 다릅니다. 여러분이 서로의 마음만 확인했다면, 사회주의는 계획이 다 있습니다. 비록 상대방의 마음까지 얻어다 줄 수는 없지만(이건 저세상에서도 불가능할 겁니다), 행복한 사랑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인 지원은 누구에게나 충분히 보장함으로써, 사회주의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을 응원할 겁니다.

#2. 사랑을 막는 사회

경제적인 족쇄 외에도, 혹은 이와 함께 작용하면서 오늘날 자유로운 사랑을 옥죄는 질곡이 있으니, 바로 ‘차별’입니다. 가령, 이 나라는 동성혼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죠. 그런데 남이사 여자를 좋아하든 남자를 좋아하든, 둘 다 좋아하든 둘 다 안 좋아하든 아니면 어떤 성적 지향을 갖고 있든 당최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랑을 하든, 폭력이나 강제를 수반한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극히 일부 유명인을 제외한다면(그들도 종종 조롱이나 멸시의 대상으로 괴롭힘을 당합니다만), 많은 성소수자가 일터나 삶의 공간에서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 사랑을 이유로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경우도 많죠.

한편, 이성애자라 하더라도 여성의 경우에는 사랑 때문에 차별받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앞서도 거론했던 결혼과 출산이죠.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애는 낳을 거냐’는 면접관 질문부터 시작해, 실제로 결혼을 하거나 특히 아이를 갖게 되면 유무형의 퇴직 압력을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한 번 끊긴 경력은 좀처럼 복구되지 않죠. 그렇기에 많은 여성에게 사랑과 결혼, 임신과 출산은 때때로 자기 나름의 인생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하는 가혹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사회주의에서는 각자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대로, 혹은 사랑하고 싶지 않은 대로 자유롭게 살면 됩니다. 법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그 무엇으로도 그들의 사랑을 제약하지 않습니다. 그건 철저히 당사자들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희생하도록 강요받는 일 따위도 없습니다. 아이를 낳더라도 가정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지고, 어떤 곳에서 일하더라도 임신 출산 시 충분한 휴식과 함께 복직을 보장하며 (사회주의에서 일터는 국가나 지역공동체 등이 관할하는 국 공영기업 형태로 존재하기에, 개별 기업의 자의적 판단에 맡기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임신 출산 여성의 복직을 철저히 보장함을 의미합니다), 당사자의 정신적 신체적 변화를 고려하되 보수를 비롯한 노동조건에서 어떤 부당한 차별도 두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따금 ‘사랑은 희생’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요. 그 ‘희생’이 차별에 근거한 것이라면, 혹은 사회가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건 ‘고결한 희생’이 아니라 ‘사랑’의 이름을 훔친 사회적 고문일 따름입니다. 두려움 없이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곳, 바로 사회주의입니다.


# 3. 내가 좋아한다는데, 왜 국가에 보고해야 하나?

지금까지 이 글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존재한다는 걸 전제하고 얘기를 끌어왔습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보자면, 내가 다른 누군가와 서로 좋아해서 같이 살겠다는 걸 왜 국가에 보고하고 확인까지 받아야 하는 걸까요? 심지어 국가가 요구한 특정 형식의 결합(다른 사람과 혼인 관계에 있지 않은, 한 쌍의 남성과 여성)이 아니면 승인조차 해주지 않는데 말이죠.

최근에는 법률혼이 아니더라도 동거를 비롯해 다양한 방식의 결합 형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회복지제도나 보험 혜택, 자녀의 법적 사회적 권리 등을 온전히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혼인신고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죠. 그런데 국가가 사회구성원을 ‘누군가의 남편 부인 혹은 자녀’가 아닌 동등한 각각의 권리 주체로 인정하고, 가족이 아닌 각 개인의 상황에 따라 보육부터 교육, 의료와 노후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사회복지를 보장한다면, 굳이 ‘누가 누구를 사랑해서 결혼해 같이 사는지’ 같은 사생활 관계는 알 필요도 없고, 추적해서도 안 되지 않을까요?

좀 더 나아가봅시다. 법률혼이든 사실혼이든, 자본주의에서 가족(가정)은 체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능을 떠맡고 있습니다. 먹고, 자고, 씻고, 쉬면서 다시 일하러 나갈 수 있도록 충전하는 것, 그와 동시에 미래 세대 노동자(자녀)를 낳고 기르고 가르쳐 노동시장에 투입하는 것, 바로 ‘노동력 재생산’이라 부르는 역할이죠. 여기에는 주거, 보육 교육, 의료, 그리고 취사 세탁 청소 돌봄 등 각종 가사노동이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막대한 비용과 노력, 시간이 들지만, 자본은 이 재생산 책임을 가정에 떠넘겨 자신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노동력을 공급받습니다. 반대로, 각각의 가정은 주거비를 포함해 막대한 비용을 감당해야 하고, 더군다나 가사노동 붙박이로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주로 부인이나 어머니, 즉 여성이죠).

따라서 사회주의에서 가족(가정)의 의미와 형태, 구성은 여러모로 바뀌게 될 겁니다. 재생산은 더 이상 개별 가정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책임으로 전환되죠. 주거와 교육, 의료는 물론이고 가사노동이 어떻게 사회화된 형태로 바뀔 수 있는지 역시 그간 이 지면에서 다뤄온 문제였습니다. 개별 가정은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짐을 벗어 던지고,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자유로운 결합으로 변화합니다. 강제된 의무를 지고 국가에 등록되는 ‘단위’가 아닌, 좋아하면 같이 살고 그게 아니라면 따로 살아도 삶을 영위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가볍고도 자유로운 관계의 일종이 되는 것이죠.

#4.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듯

‘영원히 너만을 사랑해.’ 모두가 한 번쯤 (노래 가사로라도) 들어봤지만, 아마 대부분이 거짓말임을 알고 있을 말이죠.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평생토록 사랑하는 것,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서로의 감정이 영원불멸하리라는 것에 아주 회의적입니다. 이건 누구를 탓할 문제는 아닙니다. 처음에 얘기했듯 어쨌든 사랑의 전제는 서로를 향한 감정이 들어맞아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이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죠.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그 감정이 어긋났을 때 자유롭게 이별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의 감정과 그에 따른 ‘계약’(결혼도 계약의 일종이죠)에 묶여 있어야 한다면 자유로운 사랑이 아니겠죠.

사회주의에서도 이별은 공기처럼 곁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때도 이별은 여전히 힘든 일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에서는 지금처럼 이혼 한 번 하려면 상대방에게 합의서를 받거나, 합의가 안 되면 법원 판결을 받아내야 하는 제도를 철폐할 겁니다. 함께 살기로 할 때 국가의 ‘확인’을 받지 않듯, 헤어짐도 어느 일방의 의사로 별도의 절차 없이 자유롭게 가능한 거죠.

한편, 지금의 체제에서는 제도적인 구속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쉽사리 이혼을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특히 주부로 살아왔던 여성들은 이혼하고 싶어도 경제력이 없으면 이혼 이후의 삶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지레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있죠. 사회주의는 이 근본적인 토대 자체를 바꿉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누구든 간에,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일자리를 보장함으로써 생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불행한 공동생활을 이어갈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것이죠.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어떤 굴레도 없이 진정 각자의 감정에 충실하며 온전히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세상. 그게 사회주의를 꿈꾸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지면과도 이별을 전할 때가 왔습니다. 보고 들은 것도 부족하고 상상력도 얕았지만,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질서가 우리 모두를 위해 더 매력적인 세상을 그려낼 수 있다는 걸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지 30년이 흘렀지만, 그 시간 속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을지언정 이 새로운 질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상상했던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노력에 혹여 누가 되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무엇보다, 부실한 원고를 심지어 매번 가장 늦게 보내는데도 한결같이 응원해주셨던 《워커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