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투어리즘 overtourism

자본주의 성장과 함께한 투어리즘의 역사적 기원


오버투어리즘은 과잉관광으로 번역된다. 우리는 그 현상을 명소가 된 장소에 그 지역의 생태와 인프라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일어나는 부작용 정도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오버투어리즘은 예측하지 못해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과잉’과 ‘유동성’에 의해 지탱되는 후기 자본주의 경제에서 목적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굴뚝 없는 산업’이라 불렸던 관광은 이제 ‘비물질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창조적 영역이 됐다.

최근의 관광 상품은 단순한 구경을 넘어서 체험, 답사, 기행, 순례 등의 형식으로 문화 상품 및 지식 상품과 결합돼 ‘복합 인문상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원래 있던 길도 스토리를 추가하면 새로운 순례자의 길로 탄생하고, 원래 있던 마을도 재생의 붓칠을 더하면 인스타의 핫 플레이스로 재탄생한다. 이렇게 새로운 신상을 끝없이 만들어내고, 숱한 파생상품들과 결합이 가능한 것이 바로 관광 상품이다. 파생 상품의 시대에 이만큼 적합한 산업도 없다.

미디어는 오지 탐사, 미식 기행, 인문 답사, 농촌 체험 등 끊임없이 새로운 테마로 이동하며 새로운 관광수요를 만들어낸다. 한곳의 효용이 다하면 다른 새로운 것을 찾으면 될 뿐이다. 제주도가 포화되면 이제 강원도로 가자고 한다. 새로운 경관과 분위기를 찾는 ‘장소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다. 문제는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상품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라는 것이다. 관광지가 되면 주민들의 삶터는 관광과 여행을 중심으로 도로, 편의시설, 상점 등 지역의 모든 자원이 재배치되기 시작한다. 심지어 주민들 스스로도 자기가 사는 곳을 투어리스트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인스타 핫 플레이스가 되기 위해 오랜 시간이 쌓여서 만들어진 고유한 문화, 환경, 삶의 방식과 기술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한 지역이 ‘무시간적 장소’ 또는 ‘역사 없는 장소’가 돼 ‘장소성’을 상실하게 되는 이런 일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자연을 예술적으로, 또는 어떤 장소를 미적 체험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과 ‘낯선 것’에 대한 과도한 탐미주의는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투어리즘의 역사적 기원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식민지 시대의 유산과 연관돼 있다. 18세기 유럽 상류층에서는 ‘유럽 일주’가 유행했다. 타국으로의 장거리 여행은 젊은 부자들의 이국적 취미와 재력이 결합된 산물로,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엘리트 문화에 속했다. 그런 여행에는 운송수단, 곳곳에서 시중을 들어줄 인력 네트워크,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신분적 특권이 필요했다. 특권적 소수가 전달하는 여행지의 자연이나 원주민의 풍습을 기록한 기행문은 부르주아 사회의 인기 있는 교양도서였다. 19세기에는 보다 대중화된 관광이 생겨났다. 1816년 프랑스에서는 투어리스트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고, 1841년에는 투어리즘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1841년은 최초의 여행사인 ‘토마스 쿡’이 영업을 시작한 해다. 돈을 내면 여행지의 날짜와 동선을 짜주고, 그에 맞춰 교통, 숙박, 식사를 예약해주며, 현지의 가이드를 알선해주는 여행업체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투어리즘은 귀족적 특권을 돈으로 평등화했던 부르주아적 취미에 속하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여행은 짐꾼, 하인, 노예의 경험이었다.

초기 관광산업의 성장은 산업화, 도시화, 서비스의 상품화, 그리고 교통수단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관광 상품화에서 ‘장소의 개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시간의 단축’이었다. 이 분야에서도 제조업과 마찬가지로 효율성의 원리가 적용됐는데, 소비자들이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데 드는 시간은 불필요하며 최소화돼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정해진 시간과 비용 안에서 관광 시간을 최대화하려면 이동 시간을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도로가 확장되는 만큼 시간은 줄어들었다. 특히 항공 노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9년 파리-런던 간 항공 노선이 여객기 운항을 개시한 이래로 항공 여행은 꾸준히 늘어났지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세계화 이후다. 여행자유화의 시기는 노동유연화 및 금융자유화의 시기와 일치한다.

1924년에는 이탈리아에서 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고속도로는 국가가 건설했지만 최대 수혜자는 자동차 업체였다. 1936년 프랑스에서 유급휴가제도가 도입되자 내륙지방의 노동자들이 처음 바다를 볼 수 있게 됐다. 전후 경제호황기에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동차 없이는 갈 수 없는 ‘리조트’와 ‘놀이동산’이 만들어졌다. 더 많은 도로가 ‘휴양지’를 향해 최단 거리로 건설됐고, 노동자들은 돈을 벌어 차를 사기 시작했다. 이후 영광의 30년이라 불리는 경제성장기 동안 관광산업은 자동차 산업, 항공, 선박, 건설 등 수많은 산업을 연결하는 복합 산업이 됐다. 이 시기의 관광산업은 ‘성장하는 경제’ 속에서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 관광산업은 ‘성장할 수 없는 경제’를 지탱시키는 ‘비물질 자본주의’를 대표한다. 그것은 화폐를 수혈해서 수치와 지표로만 성장하는 경제다. 관광시장은, 부동산, 투기자본과 결합한 파생상품 시장으로 금융위기라는 뇌관을 장착하고 다가오는 붕괴의 시간을 시한폭탄처럼 기다린다. 그걸 막으려면 더 많은 사람이 계속 돈을 쓰면서 돌아다니게 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새로운 대상에 돈을 쓰도록 유인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새로운 것을 찬미하는 ‘혁신’의 담론과 문화 담론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여기에는 내구성이란 개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낯선 것으로서의 경관 가치라는 것은 한 번 본 순간,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으로 지역의 입장에서는, 처음에는 아무리 핫플레이스가 돼 사람을 끌어들여도 얼마 안 가 금방 싫증나고 식상해질 장소가 될 위험이 아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과 장소는 새로운 곳으로 계속 창조돼야 한다. 영국에서 ‘창조경제’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관광산업을 뜻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공적 재원을 끊임없이 경관 치장에 쏟아 붓게 만든다. 정부나 지자체는 도시재생이나 농촌재생, 마을 살리기 같은 정책으로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고, 투자자들이 일정 정도 부담해야할 인프라와 개발 비용은 물론 손실보전까지 모두 떠안아준다. 관광 자원 개발은 ‘지역발전’이란 명목으로 이루어지고, 지역 엘리트들은 다른 지역들과 경쟁하면서 관광을 통해 자기 지역의 성과를 과시하고 입증하고자 한다. 오늘날 지역 발전의 척도는 주민들의 삶의 질보다 관광객들의 선호에 달려있다.


문제는 관광 산업이 중심 산업이 되면, 공공 예산과 공적 개발 계획이 주민 삶의 개선보다 관광객을 위한 인프라에 집중되고, 그것은 관광객들의 생활방식과 취향을 반영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관광지가 되면 한 지역의 자원과 환경이 ‘돈을 쓰러 온 사람’의 편의와 취향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재편된다. 대부분 그것은 도시 부르주아의 취향과 수요를 반영한다. 순수한 자연, 야생지의 탐험을 위해 동남아시아를 찾는 유럽인들을 위해서는 깨끗한 물이 찰랑거리는 수영장과 새하얀 침대 시트, 그리고 서양식 욕실이 있는 호텔이나 리조트가 있어야 한다. 도시풍의 카페와 레스토랑,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서고, 이질적 거리가 생겨나면 원주민들의 주거지와 삶의 방식들은 새로 나타난 경관 속에서 낙후되기 시작한다. 낙후는 또다시 개발의 필요성을 만들어낸다. 제주도와 강원도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도시의 권력자들에게는 가시적 성과를 가장 빨리 보여줄 수 있고, 개발업자와 투자자들에게는 투자금을 가장 빨리 회수할 수 있는 종목이 바로 관광 개발 분야다. 투자 회수가 빨리 되기 때문에, 오늘날 관광산업은 투자자들에게 단기 고수익을 돌려줄 수 있는 최고의 먹잇감이자, 치고 빠지는 창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 달려들어야 할 제1의 투자처가 됐다. 세계 곳곳에서 미개발지들이 포획돼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된다. 공정여행이든 생태여행이든, 시장은 그게 무엇이든 고객 만족 패키지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생태 관광’ 같은 것은 애초부터 모순적인 작명인지도 모른다.

관광은 생산보다는 소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연결된 산업 대부분이 교통, 여행, 레저, 숙박, 음식점 같은 서비스업이다. 여기는 공유 플랫폼 경제 등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IT기술들이 빠짐없이 적용되는 분야이기도 하다. 과잉 관광이 문제로 대두된 시기와 투기 자본주의, 플랫폼 자본주의, 문화 자본주의로 시장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에어비앤비나 우버 같은 공유 숙박, 공유 자동차가 ‘혁신’의 사례로 처음 알려진 때가 바로 한 달 살기, 농촌 살기, 어촌 살기 같은 지역 주민의 삶을 공유하는 여행 모델이 나타난 때이기도 하다. ‘공유’라는 단어는 플랫폼 기업들이 기존의 관광산업과 달리 관광을 위한 공공 인프라의 개발과, 유지·사용에 대한 비용은 전혀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묘하게 감추었고, 다른 공유경제 모델과 함께 ‘대안 라이프 스타일’로 포장됐다.

오버투어리즘은 사람들의 소득과 생활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중산층의 과시 욕구와 모방 심리를 이용해 돈도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까지 약탈하는 마케팅이 만들어낸 결과다. 특히 여기에는 ‘사치품을 싸게 공급하는 기술’이 큰 역할을 했다. 오버투어리즘의 이면에는 저가 항공과 저가 여행이 있다. 그 ‘저가’ 뒤에는 ‘저가 노동’이 존재한다. 문화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문화적 상품들을 유사 사치재로 만들어 계속 공급하면서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잠재운다. 백화점 대신 가난한 사람들의 백화점, ‘다이소’를 주는 것처럼, 노동자들에게 ‘해외여행’이라는 사치재를 구매할 수 있다는 착각을 주면서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의 모욕적인 계급차별을 감내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저가의 노동자들이 생산한 저가의 상품을 저가의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상호착취의 경제일 뿐이다.

이 오버투어리즘의 실제 문제는 ‘오버’가 아니라 ‘투어리즘’ 자체에 있다. ‘오버’에 방점을 찍으면 투어리즘이 야기하는 환경 문제에만 집중하게 되지만 실은, 오버투어리즘이 야기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삶 자체를 투어리즘으로 만드는 것이다. 투어리즘은 후기 자본주의가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양식이다. 앞으로는 일생 수없이 많은 직업을 섭렵하며 살아야 하니, 그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우며 살라는 것이다. 이 평생 학습 이론은 결국 평생 자기를 개발하고 늘 새로운 존재로 재생시키라는 명령이다. 실제로는 평생 구직자로 살아가야 하는 불안정 노동의 현실을 ‘탐험가 정신’이니 ‘유목 정신’이니 하며 기묘하게 숨기고 미화시키는 것이다. 쫓겨날 걱정 없이 편히 쉴 수 있는 내 집 한 칸도 없는 ‘주거불안정’의 현실을, ‘유동하는 삶’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소설가들은 달콤한 수사로 여행을 찬미하고, 정치인들은 비행기를 타고 가서 순례자의 길을 걸으며, 환경운동가들은 크루즈 선상에서 기후위기를 걱정한다. 오늘날 인문학 프로그램은 답사, 기행, 여행을 포함한다. ‘삼시세끼’, ‘캠핑클럽’, 같은 TV프로그램이 주말마다 집을 떠나 농촌으로, 자연으로, 캠핑장으로 가도록 떠밀면서, 노동자들의 피 같은 돈과 시간을 대자본의 주머니로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 집이 더 이상 휴식의 공간도 될 수 없는 가난한 청년들과 노동자들에게 지저분한 집을 떠나 쾌적한 공기를 마시고 멋진 배경에서 사진을 찍으며 왕처럼 대접받는 하루를 선물하라고 부추긴다. 오버투어리즘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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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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