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성차별’에 맞섰던 여성노동자들

[이슈_ 여성은 노조위원장 하면 안 돼요?] 유옥순 콘트롤데이타지부 전 부지부장 인터뷰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은 창립에 앞서 “남녀평등의 실현을 위해 가열차게 투쟁할 것”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현재. 민주노총은 정말 가열찬 투쟁으로 성평등을 실현했을까? 아니, 적어도 조직 내부의 성평등 정도는 실현해내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상하다. 성평등을 실현하고 여성노동자를 대변할 노조 여성간부가 보이지 않는다. 역대 11명의 민주노총 위원장 중 여성은 단 한명도 없다. 16개 지역본부의 역대 본부장 중에도 여성은 전무하다. 15개 산별노조 역대 위원장 중 여성 비율도 6%에 불과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여성은 노조위원장 하면 안 돼요?”

  1980년 콘트롤데이타 투쟁 현장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경향신문 1989년 12월 23일자]

1973년 12월 20일. 8명의 여성노동자가 구로공단에 위치한 컴퓨터 부품 생산업체인 콘트롤데이타에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노조 설립 3일 만에 조합원이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미국에 본사를 둔 100% 외자기업 콘트롤데이타는 타 공장에 비해 근로조건이 좋은 편 이었다. 게다가 직원 중 95%가 여성인 공장에서, 여성노동자 중심의 노조 결성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은 때였고, 으레 여성들은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떠나던 시절이었다.

노조 설립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인 유옥순 씨 역시 입사 초기만 해도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몰랐다. 심지어 노조는 회사가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회사 관리자에게 ‘우리 회사에는 노조가 언제 생기느냐’고 묻자 ‘직원 천 명이 있어야 노조를 만들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때도 그저 그런 줄로만 알았다.

‘성차별’에 반발해 노동조합 결성

그런 그들이 이름도 생소한 ‘노동조합’을 결성한 까닭은 바로 ‘성차별’ 때문이었다. 노조가 결성된 그 해 12월, 회사는 성별에 따라 임금을 차별적으로 인상했다. 여성 생산직 노동자보다 남성 관리자의 임금이 높은 상황에서, 차별적 인상은 임금 격차를 더욱 확대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유 씨는 입사 후부터 지속적으로 여성노동자의 권리가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왔다. 회사는 한 달에 하루 씩 보장되던 생리휴가 제도를 점차 무력화 시켰다. 생리휴가를 받으려면 양호실에 가서 생리 중 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그마저도 관리자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됐다. 회사 안에서는 5%의 남성 관리자가 95%의 여성 노동자를 관리했다. 여성노동자의 승진은 늘 ‘반장’에서 그쳤다. 감독과 관리, 행정직은 모두 남성들 차지였다.

신생 노조인 금속노조 콘트롤데이타분회는 여성노동자의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주도했다. 유옥순 씨를 비롯한 노조 간부들은 여성노동자의 적정 임금과 기초생계비를 산출하기 위해 직접 뛰어다녔다. 한 달 동안 구로시장과 영등포시장 등지를 돌며 갈치와 배추, 시금치 등 식재료와 생필품의 물가를 조사했고, 하루에 연탄이 몇 장 필요한 지, 수도세는 얼마나 드는 지 등을 조사해 1인 자취생계비를 산출했다. 나아가 조합원들의 부양가족이 평균 2.7명이라는 통계를 기반으로 기초생계비를 산정했다. 노조가 제시하는 임금요구안은 언제나 최저임금을 크게 웃돌았다.

유옥순 씨는 지금도 그 시절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여성학이 보편적이지도 않았고, 여성 인권이나 노동권을 이야기하는 시대도 아니었다. 심지어 고등학교 취업반 에서도 현모양처로 ‘취집’하라는 교육만 주구장창 받았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젠더 문제로 선도적인 투쟁을 벌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콘트롤데이타 노조의 요구와 투쟁은 언제나 젠더 문제와 맞닿아 있었다. 이들은 더 큰 여성의 권리에 대해 고민했고, 실제로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다.

결혼퇴직제를 없애다

1974년 어느 날 만원 통근버스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통근버스 앞좌석은 언제나 남성 관리자들 차지였다. 그날따라 몸이 좋지 않았던 한 여성 조합원이 버스 앞좌석에 앉았다가 남성 관리자로부터 “싸가지 없다”, “재수 없다”라는 폭언을 들었다. 피해자는 노조 사무실로 찾아와 억울함에 눈물을 터뜨렸다. 노조는 공식적인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노조가 가해자 사과와 처벌을 요구하자, 남성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태업을 벌이며 맞섰다. 통근 버스에서 일부러 앞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생산량이 떨어지자, 결국 회사는 두 손을 들었다. 회사는 가해자 사과와 1개월 징계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회사 안에서는 여성노동자에게 경어를 사용하는 문화가 정착됐다.

당시 만연했던 ‘결혼퇴직제’에 맞선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공무원, 은행원 할 것 없이 여성노동자는 결혼과 동시에 퇴직을 해야 했다. 생산직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근로기준법에 60일의 출산휴가제도가 명시돼 있었음에도 무용지물이었다. 남성 관리자들은 결혼 후에도 퇴사하지 않는 여성 노동자들을 압박했다. “남편이 그렇게 돈을 못 버냐”, “남편이 그렇게 가난하냐” 는 식으로 비아냥대며 창피를 줬다. 당시만 해도 여성이 결혼 후 직장을 다니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합원들은 그 창피함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노조 대의원 한 명이 나섰다. 결혼 후에도 공장으로 꼬박꼬박 출근했다. 관리자가 남편을 들먹이며 시비를 걸면 “우리 남편은 돈을 못 번다”며 응수했다. 노조 운영위원이던 한 조합원은 처음으로 출산휴가를 썼다. 보란 듯이 만삭의 몸으로 출근을 했고, 관리자의 비아냥에 코웃음을 쳤다. 그 때부터 조합원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기혼 여성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근속년수가 늘어났다.

하루는 노사협의회에서 사측이 “여자화장실에서 담배꽁초 때문에 불이 났다. 어떻게 여자가 담배를 피우느냐”며 길길이 날뛴 적도 있다. 노조는 “우리도 남자화장실에 있는 모래항아리를 설치해 주면 될 일 아니냐”며 따졌다. 결국 얼마 후 여자화장실에도 큼지막한 모래항아리가 설치됐다. 생리휴가 사용을 단체협약에 명시하고, 조합원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생리휴가 사용을 독려하기도 했다. 교섭에서는 가족수당 지급과 회사 내 탁아소 운영을 요구했다. 사무직의 경우 남아 출산 시 5만 원, 여아 출산 시 2만 원, 생산직은 무조건 2만 원을 지급하던 회사의 출산 축의금 방침을 직종과 자녀 성별에 관계없이 5만 원 으로 통일시킨 것도 노동조합이었다. 임금 인상 뿐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이뤄내기도 했다. 노조 설립 후 주 48시간을, 70년대 말에는 주 42시간을 쟁취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엄혹했던 전두환 정권 시기, 8박 9일 간의 공장 점거 파업

이들의 노동조합 운동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터다. 노조 간부들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되거나, 사회정화 대상이 돼 간부 자리에서 쫓겨났다. 회사의 태도도 달라져 노조의 임금 및 단체협약 교섭을 거부했다. 심지어 노조가 태업을 벌이자, 유옥순 당시 부지부장을 포함한 지부장 및 간부 6명을 해고했다.

가장 엄혹했던 시절, 콘트롤데이타노조는 가장 빛나는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1981년 3월 15일, 조합원 수 백 명이 해고된 간부들을 둘러싸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마이크를 잡은 당시 한명희 직무대행은 전면 파업을 선언했다. 이를 시작으로 조합원 전원이 공장을 점거하고 8박 9일 간의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농성중인 조합원들을 향해 욕을 하거나, 심지어 농성장에서 성기를 노출한 채 방뇨하는 남성 관리자도 있었다. 회사가 공장 안에 에어컨을 가동시켜 임신한 조합원이 하혈을 하기도 했다. 파업농성 이틀이 지나니 회사는 식사 반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8박 9일간의 파업농성이 끝날 때까지도, 조합원들은 노조 간부 해고가 공장 폐업의 전초전이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이듬해 6월, 미국 본사는 한국 공장 폐쇄를 결정했고, 한 달 여 만에 회사는 공장 폐업을 발표했다. 노조는 폐업 반대 투쟁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남성 관리자들은 폐업이 노동조합 때문이라며 노조 간부에게 폭행을 휘두르기도 했다. 노조는 철수반대 투쟁을 벌였지만 폐업을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유옥순 씨는 지금도 그 시절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바뀐 듯 바뀌지 않고, 변한 듯 변하지 않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고 진취적인 투쟁을 벌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무엇이 그리 변했나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현장은 소규모 사업장으로 찢어지고, 비정규직, 특수고용으로 내몰리는 여성노동자를 만날 때마다 아직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여성노동자의 처우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요.” 유옥순 씨가 아쉬운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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