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새로운 것들의 세계, 뉴트로라는 하이브리드

[레트로스케이프]

[출처: 구글 화면 캡쳐]

레트로 경관의 탄생과 비판들

‘레트로풍’이 우리 주변을 휩쓸고 있다. 흔히 쓰던 표현법에 따르면 ‘복고풍’이다. 이는 새로운 재화나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차용한 이전 문화의 양식(style) 혹은 분위기(mood)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오늘날 지배적인 문화 생산 양식 중 하나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지겹도록 언급되는 〈응답하라〉 시리즈와 〈토토가〉와 같은 콘텐츠는 물론이고, 을지로체 같은 옛날 글씨체를 활용한 디자인, 라디오와 턴테이블 그리고 워크맨 같은 올드 미디어, 복고 패션과 빈티지 골동품, 노출콘크리트 등을 활용한 인테리어 등 주변에서 레트로가 아닌 것을 찾아내는 게 힘들어졌을 정도다. 이 정도로 레트로는 지배적인 문화 양식이 됐고 우리의 삶 곳곳에 침투해 있다. 이러한 기호와 사물들로 구성된 오늘날의 풍경을 ‘레트로 경관(retroscape)’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찍이 이러한 문화 현상을 비판적으로 포착했던 연구자들과 비평가들이 있다. 근대사회의 성격을 유통하는 액체로 포착했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문화 현상을 그리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라고 명명하면서 유토피아에 대한 이중 부정으로 봤다. 즉, 유토피아적 상상을 거부하는 입장에 대한 또 다른 거부로서, 새롭고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이미지의 유토피아 대신 오래되고 안정적인 것들을 유토피아로 제시하는 현상을 뜻한다. 동시에 이는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소비자 자아로의 회귀이기도 하다.

또한 음악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레트로매니아(retromania)’라는 호명을 통해 레트로 문화의 기술적인 조건과 문화적 실천의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21세기를 ‘재(re-)’의 시대라고 규정하면서, 디지털 테크놀로지 환경에서 이전의 대중문화들이 계속해서 재탕되고 과거로 회귀하면서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새로운 문화가 출현할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한다. 나아가 사회비평가 박권일은 이러한 ‘레트로필리아(retrophilia)’ 현상이 헬조선이라는 현재와 디스토피아적 미래 사이에서 과거의 공통경험을 환기하면서 쾌락을 얻고자 하는 대중들의 욕망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바우만이 레트로라는 현상을 통해 소비지상주의적 동시대 문화가 어떤 시공간적 사고방식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논구했다면, 레이놀즈는 이러한 문화가 재생산되는 문화산업의 메커니즘을 파고들고 있다. 그리고 박권일은 과거에 열광하고 있는 대중들의 욕망을 해명하며 레트로 문화의 사회적 의미를 짚어낸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레트로 문화의 노스텔지어적 현상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동력이기보다는 과거로의 회귀이자 일종의 정치적인 퇴보다. 여기서 전위적인(avant-garde) 문화정치는 설 자리를 잃은 것처럼 보인다.

‘뉴트로’라는 하이브리드

하지만 이를 단순히 노스텔지어적 퇴행으로 봐야 할까? 문화란 사회의 여러 가지 축들이 뒤엉켜 있는 교차로이기 때문에, 이 문화적 현상을 단일한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판단할 수 없다. 특히 특정한 사회적 상태의 주체들마다 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계급, 세대, 젠더 등의 여러 가지 축들을 놓고서 이 현상의 복잡성을 보다 정확하게 분석해볼 필요도 있지만, 눈에 띄는 가장 흥미로운 문화적 징후는 레트로를 ‘뉴트로(new-tro)’라고 새롭게 부른다는 것이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마케팅을 위한 조어일 수 있으나, 레트로라는 과거 지향적 용어 앞에 새로운(new)이라는 모순적인 수식어가 붙었다는 사실은 이 현상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는 힌트를 준다.

한국에서 레트로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쓰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신문 기록에 의지해보자면 1990년대 초 대중문화의 성장과 함께 ‘레트로풍’ 혹은 ‘복고풍’ 패션들이 소개되며 용어도 함께 수용됐다고 볼 수 있다. 한 예로 1993년 7월 21일자 〈경향신문〉에 최초로 ‘레트로’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해외 디자이너들의 패션을 소개하는 수사로 함께 쓰였다. 문화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있던 시절, 레트로는 전위적 문화를 말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응답하라〉, 〈쎄시봉〉, 〈토토가〉 등의 대중문화를 통해 레트로 문화가 다시 주목을 받고, 상품화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런 과정에서 레트로로 조명되고 있는 여러 기호와 사물들을 경험하지 않았던 세대들에게 레트로 문화는 말 그대로 새로운 문화다. 가령, 타자기나 축음기 같은 로우테크는 기술 자체의 관점에서는 낡고 오래된 기술이지만, 수용자에 따라 올드미디어로 받아들여지기도 뉴미디어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기존 이용자들에게 이러한 미디어는 추억의 매개체이지만, 다른 세대의 이용자들에게는 새로운 사물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일찍부터 인터넷을 통해 국제적 감각을 익힌 세대에게는 더 이상 동시대 문화가 새롭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낡고 오래된 그 기호나 사물들이 더 신비롭고 흥미로울 것이다. 이것들은 그저 재미있는 상품이자 놀이문화이고, 이에 대한 어떠한 노스텔지어도 없다. 만약에 그런 감각이 존재한다면 이는 대중매체와 상품 소비를 통해 만들어진 노스텔지어일 것이다.

문화산업은 레트로 문화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걸 간파했다. 이런 면에서 레트로 산업은 다양한 세대의 대중들의 소비심리를 자극해 위기에 처해 있는 시장의 전화위복을 노리는 마케팅 전략이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이렇게 생산되고 있는 상품들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내용을 레트로한 형식이거나, 혹은 그 반대로 새로운 형식으로 레트로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대부분 식음료 같은 소비재고, 후자는 드라마나 대중가요 그리고 유튜브와 같은 대중문화 콘텐츠다.

그렇기 때문에 레트로 문화는 동시대 소비 자본주의를 지속시키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재에 맞게 기술적·문화적으로 갱신되고 새롭게 조립된 ‘리믹스(remix) 문화’이자 ‘하이브리드(hybrid)’다. 그렇기 때문에 레트로라는 문화적 취향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는 과거로 침몰하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레트로는 자신을 회고하는가?

레트로(retro)는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를 뜻하는 ‘회고하다(retrospect)’의 준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레트로 현상은 과거의 어떤 것들을 끄집어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시장으로 돌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섣불리 소비자본주의에 포섭된 문화라고 판단내릴 필요는 없다. 이런 흐름이 일시적일지 지속적일지 아직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고, 이러한 주체들의 누적된 문화적 취향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단칼에 베어버리기보다는 이 하이브리드한 기호와 사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적 현상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기술이나 경제, 그리고 정치적 측면 모두 고민해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레트로 혹은 뉴트로라는 무대에 어떤 기호와 사물들이 올라와 있는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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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저씨

    "경제비상시국"에 대해
    보수당은 "소득주도성장"을 집요하게 비판해왔다. 그런데 소득주도성장은 우파의 정책이었다. 그러니까 보수당의 비난은 자신들이 소득주도성장을 하면 아주 좋고 좌파당이 하면 잘못됐다는 식의 배아픔과 논리였다.
    경제비상시국은 좌파가 우파의 정책들을 지양하면서 불가피해진 측면이 있다. 이를 단순하게 보수당의 정책으로 선회할 할 때는 좌파당은 패배를 한다. 그 방향은 보수당의 집권을 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경제비상시국에서도 "친재벌"비판과 "친노동"비판을 고려하면서 일관되게 좌파의 경제정책을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좌파의 경제정책으로 경제성장률을 상승시켜서 좌파가 논리가 우파의 논리보다 더 낫다는 것을 현실에서 증명해보여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도 <조국정국> 등이 우파의 다양한 정책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 2, 3의 <조국정국>을 맞이할 때 우파를 구축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좌파가 패배의 길이 눈 앞의 불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국 정치판의 타협, 그것의 고스톱 정치와 작당은 항상 한쪽의 패배로 귀결이 되었다. 경제비상시국은 문재인 정부와 더민주당의 정치적-경제적 능력을 재점검하고 확인하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