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가, 박서련

[인터뷰] 조선 여성노동자 《체공녀 강주룡》에서 현재의 청년 여성을 그린 《마르타의 일》까지

1931년 5월 29일 새벽. 한 여성노동자가 평양 평원고무공장 임금인하 반대를 요구하며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랐다. 조선 최초의 고공농성 수행자로 기록된 이 여성의 이름은 강주룡이다.

소설가 박서련 씨는 2018년 《체공녀 강주룡》이라는 장편소설을 통해 87년 전 그의 투쟁을 현재로 소환해냈다. 그의 소설은 어째서 이토록 치열하게 세상과 맞섰던 여성의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 했다. 부족한 사료와 씨름하며 역사적 사실을 복원했고, 여기에 상상력을 더해 기존에 없던 ‘싸우는 조선 여성’의 캐릭터를 구축해 냈다.

그리고 지난해, 작가는 현실사회로 돌아와 청년 여성의 삶에 침착했다. 2019년 발간한 장편소설 《마르타의 일》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린다. 젠더폭력과 차별, 불평등과 경쟁에 내몰린 그들의 싸움은 절박하기 때문에 이기적이다. 끊임없이 ‘싸우는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상과 싸우고 있는 박서련 작가를 만났다.

  박서련 작가 [출처: 은혜진 기자]

《체공녀 강주룡》에서는 조선의 여성노동자를 그렸고, 《마르타의 일》에서는 현 시대의 청년 여성의 이야기를 썼다. 작가에게 있어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

쉬우면서도 어려운 질문이다. 이것(여성의 이야기) 말고는 다른 얘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역으로 말하면 나에게 디폴트(기본값)는 여성의 이야기다. 소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성 주인공이 먼저 떠오른다. 강주룡 같은 여성인물에 끌리고 나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나에게 있어 여성은 ‘사람’이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사람’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최근 숙명여대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누군가 여대가 존재하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대나 총여학생회 등은 존재와 동시에 해체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자 단체다. 지금은 너무 필요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사회가 돼야 하는 것들이다.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 필요한 존재들이 있기 때문에 여성이 ‘사람’이라는 당연한 말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주룡은 독립군에 가담했다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동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고 희롱을 당한다. 종국에는 남편마저 그녀를 배제한다. 무리에서 배제된 채 백리 넘는 길을 걸으면서 주룡의 마음은 어땠을까.

친구의 사례이기도 하고 활동하는 여성들이 겪는 일이기도 한데, 같이 활동을 했는데도 ‘걔는 누구누구의 여자친구’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다. 나도 같이 헌신했고, 나름 기여했고, 같은 동료이자 일원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누구의 부인’ 혹은 ‘누구의 애인’으로 호명되고,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나의 공로가 오롯이 인정되지 않는 거다. 당시 주룡은 전빈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을 넘어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감각을 찾아갈 무렵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겪으니 박탈감이 들었을 거다. 내가 동등하게 여겨지지 않았나,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작품에서는 그런 감정을 절절하게 교차시키려 했다.

“부대 결속을 해칠까봐 저와 제 아내를 업신여기는 말을 듣고도 웃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따위 결속이 다 무어란 말인가. 여자 하나를, 어린 남자애 하나를 우스개로 만들지 않고서는 유지할 수없는 결속이라면 그따위 것 없는 게 백번 낫지 않은가.”

《체공녀 강주룡》 P79


독립군 부대 내에서 희롱과 차별을 당했으면서도 주룡은 참고 무시한다. ‘싸우려고 태어난 사람’인 강주룡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어떤 것들이 그가 피해를 드러내거나 싸우지 못하도록 막은 걸까.

‘내가 피해사실을 말하면 조직 분위기를 해치는 것 아닐까’, ‘남편에게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인정적인 감정이 그를 얽매였을 거다. 주룡은 당시 그 혼란스러운 기분을 표현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집단에 소속돼 활동한 것도 처음이었고. 피해사실을 털어놓을 만한 가까운 여성동지가 옆에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그냥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집단적인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남편 전빈은 권위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주룡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결국 주룡의 피해에 눈을 감고, 주룡을 독립군 부대 밖으로 내몰게 된다. 어째서 박해받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워야겠다고 결심한 그가, 주룡의 상황에는 공감하지 못했을까.

전빈이라는 인물은 선비 같은 소년을 상상하며 썼다. 순수하고, 자기가 숭고하다고 여기는 것에 몸과 마음을 바칠 각오가 돼 있고, 모험심과 호승심을 갖고 있으며 정의감이 투철한 인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범하는 잘못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못했다. 동경하던 집단에 들어왔고, 애국을 위해 헌신하는 형님들의 모습을 따라해야 했다. 형님들이 하는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감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썼다. 현실에서도 많은 새내기 활동가들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내처 한마디 덧붙이자면 여러분은 그네들의 사상이 어떤지 궁금해본 적두 없을 거입네다. 내심 아녀자의 무학무식이 당연하구, 여러분이 공산자인가 공산주의자인가 하는 거이니 부인도 도매금으루 공산 부인인 거이 당연하다 여기시디요. 이 말이 옳지 않다면 시비 가려주시라요. 틀렸다 하신들 여러분이 부인에겐 이런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고 혼차서 예와 있는 것은 변하지 않습네다.”

《체공녀 강주룡》 P202


[출처: 한겨레출판사]

소설의 서사에서 주룡이 주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 드러난다. 여성 노동자가 된 주룡은 자신보다 어린 여공을 보며 ‘앞으로 너는 네가 바라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주룡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을밀대 고공농성에 오른 주룡이 바란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도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주룡은 어떤 삶을 살고 싶었을까. 다만 처음에 강주룡이라는 캐릭터를 해석하기 위해 그의 인터뷰 자료를 봤다. 최초의 캐릭터 해석은 ‘이 사람은 엄청난 사랑꾼이구나’였다. 당신의 인생을 이야기해 보라고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인터뷰 절반 넘게 먼저 가 버린 남편 이야기를 했다. 굉장히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런 사람이니까,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과 싸우면서, 그렇게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원하지 않았을까.

강주룡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료가 많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다.

남편인 최전빈이 강주룡보다 먼저 사망했고, 독립운동에서의 공로도 다르다고 본다. 역사적 공로가 강주룡보다 적을 수밖에 없는 최전빈 조차 건국훈장 애국장(1995년)을 받았다. 그런데 강주룡은 2000년대 와서야 건국훈장 애족장(2007년)이 추서됐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여성들이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 최초의 고공농성 수행자, 강주룡을 설명하는 것은 그 딱 한 줄이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그에 대한 업적이 인정되기까지는 정말 오랜 기간이 걸렸다.

사실 그런 조건들 때문에 남성 등장인물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강주룡에 대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와 스쳐갔던 또는 스쳤을 법한 남성 인물들의 연구 자료나 사료는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그래서 강주룡과 분명히 스쳤던 정달헌, 그리고 스쳤을 법하다고 짐작이 되는 백광운 등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남성들의 이름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광운이 주룡을 총애했을 것이라는 상상이 더해졌고. 이외의 여성 인물들, 같이 파업을 하고 농성을 했던 여성들은 모두 가상 인물들이다. 당시 고무공장 상황을 찾아보며 이런 인물들이 있을 것이라 상상하며 썼다.

“회사에서는 노상 그렇듯 무식한 여공들이 저희들끼리 시시덕대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시하겠지. 우리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변혁을 준비하고 있는데. 난방을 거의 끊어서 얼음 창고처럼 된 겨울의 공장 안에서 주룡이 웃는다.”

《체공녀 강주룡》 P211


강주룡은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 매력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나.

나는 그의 유머러스함, 너스레에 반했다. 그의 인터뷰 자료를 보면서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유머러스함을 재현하고 싶다는 충동 같은 것을 느꼈다. 잡지사 기자와 꽤 긴 인터뷰를 했는데, 강주룡으로서는 첫 인터뷰였을 것이고 인터뷰 질문도 체계적이지 않았을 거다.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살아온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하니, 강주룡은 마치 타고 난 이야기꾼처럼 ‘내가 중국 감옥에서 일주일까지 굶어 보았는데, 사흘 단식이 별 것이겠나’라고 농담을 한다. 그 배포와 유머러스함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주룡은 가족을 벗어나고서야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수아는 부모가 연출하길 원하는 ‘가족의 이미지’를 거부하는 존재다.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의식이 드러난다.

일단 나의 경험적인 측면이 크다. 대학을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우울증 등의 정신적인 문제가 누적돼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가족 내에서 ‘누구는 어떻다더라’ 같은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일상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라도 온전해질 수 없다. 가족과 물리적 거리를 두고 나니 해결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족끼리 떨어져 살면서 해결되는 문제도 많다고 본다. 이제 더 이상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아, 같은 감정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같이 살면서도 화목한 가정의 이야기를 듣거나 보는 것이 일종의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공식적으로 경아의 죽음은 자살이었고, 실제로 경아가 했던 행동들을 복기해보아도 거의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아는 살해당한 것이었다. 자살했지만 살해당했다.”

《마르타의 일》 P192


[출처: 한겨레출판사]

익명은 《마르타의 일》에서 가장 위태위태한 캐릭터다. 범죄의 위험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경아와 그 애인의 관계에 집착하는 듯 보인다. 경아를 한명의 동등한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마리아와 같은 순결무구한 인물로 상상하고 신성시한다. ‘스토커’와 ‘조력자’ 사이에서 위태로워 보이는 익명은 어떠한 존재인가.

작가로서는 가치판단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괴짜 같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익명의 행동에 대해 좋게 평가를 하거나 심지어 감정이입을 하는 분들도 계신다. 하지만 다른 상황에 놓였을 때는 그가 경아를 위협하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위험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가해자라고 해서 항상 나쁜 면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기에도 무리가 있다. 익명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 가해의 가능성 또한 드러나는 복잡성이 있다고 본다.

조선시대 여성 노동자 주룡이 계급과 체제에 맞서 싸웠다면, 현재의 청년 여성 수아는 임용고시라는 제도 안에서 자신의 ‘공정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복수를 감행한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주어진 까닭은 무엇이라고 보나.

수아는 이기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주룡과 같고도 다를 수 있는데, 주룡에게 대의에 가까운 노동운동의 지향이 있었다면 수아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이 사회에 대해 자포자기한 거다. 수아는 머리가 굉장히 좋은 인물인데도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택한다. 안정적이고 실패하지 않을법한 직업을 선택한 거다. 사회로부터 체념이라는 정서를 체득해 온 인물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은 일치감치 포기하고, 할 수 있는 것만 한다는 정서가 강하다. 거시적인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지금 닥친 내 동생에 대한 복수만을 감행하는 캐릭터다.

“동생이 예쁘고 착하다고 다들 나와 비교한다고 나는 느꼈지만, 경아 역시 공부 잘하는,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야무지고 빈틈없는 언니와 끊임없이 비교를 당해왔을 것이다. 얼굴이야 뭐, 그렇게 태어난 걸 어쩌라고? 라는 생각으로 넘겨온 나와 다르게, 경아는 자기가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자책했을 것이다.”

《마르타의 일》 P134


《체공녀 강주룡》은 매우 힘들게 쓴 소설이라고 들었다. 작가로서의 삶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당시 상황은 어땠나.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책을 쓰고 나면 꼭 생색을 내야겠다고 다짐했고, 지금 한 네 번째 생색을 내는 중이다.(웃음) 소설 초안을 잡았을 때는 스타벅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일을 잘 못하더라. 반년 정도 일을 했는데 안 되겠다 싶어 그만 뒀다. 때마침 국비 지원을 받게 돼서 당분간은 버틸 수 있겠다 싶어 소설만 썼다. 그러다 2017년 말 즈음 사촌언니가 있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며 약간의 수입을 충당했다. 사실 일주일 내내 나가는 업무가 아니어서 수입이 불안정했다. 그러다 응급실에 실려 가면서 출근을 못하게 되고, 이런 저런 일들이 겹쳐 많이 힘들었다. 스타벅스 아르바이트 하기 전에는 청소년 문학행사에서 대본을 쓰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것도 부정기적인 수입이어서 힘들었다.

그리고 2018년 3월에 《체공녀 강주룡》을 완성했다. 일을 하지 않고 글만 쓴다고 하면, 신기해하거나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전업작가’가 아닌 ‘실업작가’ 상태다. 매번 글을 써서 구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랄까. 그럼에도 계속 쓸 수밖에 없는 건 다른 것을 할 수 없어서다. 사무보조 알바나 스타벅스 일을 할 때도 힘들었고, 글을 쓸 때도 힘들지만, 이왕 똑같이 힘들 거면 잘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최근 문학계가 시끌시끌하다.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문단의 불합리한 관행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나온다. ‘문단’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올해로 등단 6년차를 맞았다. 그런데 아직도 문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문단에서 모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이런 사람을 두고 ‘문단’이라고 하는구나, 라고 감각할 수 있었던 자리는 시상식 뒷풀이 자리 정도. 그때가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모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문단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 그 실체도 잘 모르겠다. (문단 내 관행도)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원래 이런 걸까, 원래 그런 거야, 라는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굳어져 온 것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쳐다보는 것 같다. 문단이라는 곳도 두루뭉술하고, 그런 식의 관행도 두루뭉술하다. 이상한 일이지 않나. 등단이라는 제도와 출판 시장은 딱딱 각이 잡혀있고 실체적인데, 이를 두루뭉술한 것이 좌지우지 하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것 아닌가. 좀 더 선명해졌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난 후에야 힘들게 승리를 거둘 수도 있다.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승리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이를 바라는 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고 싶은 것이나 다름없다. 최악은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임금 감하도 끝내 막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싸움을 시작한 이상 최악만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더 무엇이 나빠지겠는가.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는데.”

《체공녀 강주룡》 P220


소설 속의 ‘싸우는 여성’을 반가워하는 독자들이 많다. 마지막으로 싸우고 있는 여성, 그리고 싸움을 준비하는 여성들에게 한 말씀 해 달라.

우리 조선여자들은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을 학습해 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런데 그러지 말고 그냥 이길 때 까지 싸우셨으면 좋겠다. 또 마음먹고 하면 잘 하는 게 조선여자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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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저씨

    심사평을 보면 한반도의 노동소설을 잇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소설의 내용이 좋다면 연재를 해보아도 괜찮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