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정치경제적 구조

여성혐오와 트랜스젠더혐오는 가부장체제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2011년부터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혐오’는 2020년 현재 하나의 사회적 키워드가 됐다. 특히 최근에는 트랜스젠더혐오가 부각되고 있다. 한 여성의 숙명여대 입학 포기 과정에서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발생했고, 이는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 글은 이런 맥락에서 여성혐오와 트랜스젠더혐오를 중심으로 혐오의 구조와 정치경제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페미니즘 경제와 혐오의 관계, 그리고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운동이 혐오의 가해자가 되지 않는 길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또한 혐오의 구조를 만드는 사회체제에 대한 공동의 싸움과 성적 투쟁의 방식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혐오는 사회적, 정치적 효과가 있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경제적 효과가 있는 감정이다. 공기처럼 존재하다가 어떤 계기로 사회적으로 부상하는 혐오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감정구조다. 이런 혐오의 성격을 ‘혐오의 정치경제’라는 말로 접근해 보자. 혐오가 정치경제 체계 속에 있다는 말은 구조적인 성격을 띤다는 말이다. 혐오는 그 자체의 연결 구조를 갖는다. 혐오는 차별과 배제로, 때로는 폭력과 살해로, 때로는 착취와 수탈로 이어진다. 혐오는 차별-배제-폭력-살해-착취라는 고리를 형성한다. 이 고리 중 일부가 나타나기도 하고 전체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사회적 소수자가 혐오의 대상으로 부상하기 쉬운 것도 혐오가 구조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편견과 낙인이 전면화 돼 드러날 수 있다.

가부장적 사회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혐오를 내장해 왔다. 그 중 강력한 혐오는 ‘여성혐오’다. 지금까지 가부장체제는 여성을 ‘제2의 성’으로 간주해 차별하고 배제해 왔다. 그리고 이 차별과 배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여성혐오는 사회-정치-경제-문화적 여성 배제를 낳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낳고, 때로는 살해의 형태로 나타난다. 강남역 ‘여성 살해’는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그동안 가려진 여성의 죽음을 ‘여성 살해’로 명명하게 된 사건이었다. 여성들은 가부장체제에서 소리 없이 죽임을 당했고, 혐오-차별-배제-폭력-살해-착취의 연결 구조를 경험해 왔다.

3월 8일이 세계여성의 날이듯,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리는 날이다. 여성혐오처럼 트랜스젠더혐오도 가부장적 차별-배제-폭력-살해-착취의 구조를 갖는다. 여성혐오가 그렇듯 트랜스젠더혐오도 차별과 배제를 넘어 폭력과 살해로 이어질 수 있다. 원하는 대학의 입학을 포기하게 된 경우도 혐오·배제의 성격을 띤다. 그리고 최근 성전환 수술 후 트랜스젠더임을 밝히고 여군 복무를 원한 변 하사가 자신의 직장인 군대를 떠나 전역해야만 하는 상황, 즉 그에 대한 ‘강제 해고’는 트랜스젠더혐오와 맞닿아 있다.

이 추방은 정치경제적인 배제의 성격을 띤다. 우리 사회는 이 사건을 두고 국가가 노동자를 해고한 경우라고 보지 않는다. 여성들이 그래왔듯 정치경제적인 배제를 경험하는 트랜스젠더들은 노동시장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 취약성은 보이는 착취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착취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 사회는 공적인 공간 어디에서든 주민등록증을 요구한다. 주민등록증의 번호와 자신의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대면한 트랜스젠더들은 노동시장에서의 착취가 용이한 상태에 처한다. 여성과 트랜스젠더 혐오-배제에는 가부장적 남/여 성별이분법이 깔려 있다.

최근 여성과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갈등은 가부장적 국가와의 갈등 양상이 아닌, 여성과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갈등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같은 점에서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운동 그리고 여성운동을 돌아보아야 할 부분이 생긴다. 이 갈등은 ‘터프’(Transgender Exclusionary Radical Feminism, TERF, 트랜스젠더 배제 래디컬페미니즘)로 통칭하기도 하는 ‘래디컬’을 표방하는 입장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 입장은 ‘여성 공간 사수’를 위해 ‘퀴어 정치에 대한 페미니즘 반격’을 하겠다는 의사와 자신들의 행사 참여 자격을 ‘래디컬페미니스트’로 두겠다는 의사를 표명한다. ‘트랜스젠더리즘’이 ‘여성 공간을 파괴’한다고 보면서 퀴어 정치를 ‘남성지배전략’의 양상으로 본다. 그리고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전환에 대해서도 ‘비윤리적’이라고 보고 법적 ‘성별변경’도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대해 필자가 짚고 싶은 지점들은 많지만, 지면의 한계로 간단히 언급한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트랜스젠더 혐오가 정당화되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페미니즘은 여성운동에 영향을 미치면서 집단적-개별적 여성들이 가부장체제적 혐오 구조에서 해방될 수 있는 정치경제적 방안들을 제시해 왔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여성해방의 방법론으로 다양한 페미니즘적 사고들이 제시됐고, 그 출발점에 래디컬페미니즘이 존재한다. (래디컬페미니즘의 내용과 ‘트랜스젠더 배제 래디컬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이 필요하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래디컬페미니즘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방법론을 고민하면서 퀴어운동, 트랜스젠더운동과의 접점을 찾으면서 퀴어페미니즘, 트랜스젠더페미니즘까지 페미니즘의 영역으로 연결했다. 그 이유는 여성해방이 기존의 ‘여성’을 넘어서야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존의 ‘여성’을 함께 변해가야 할 주체로 고려했기 때문이며, 여성해방은 가부장체제라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야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동지들은 ‘여성’만이 아닌 여성을 포함한 다양한 페미니스트, 그리고 페미니즘 사상을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운동은 기존의 혐오에 힘을 실을 것이 아니라 혐오를 타파해나가는 데 힘을 싣는 운동이어야 할 것이다. 혐오의 정치경제적 구조를 바꾸기 위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그리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구조변혁을 고민하는 것이 페미니즘운동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를 여성 공간의 침해자로 보는 시선이 갖는 문제는 여성운동이 타파하고자 한 가부장제 혹은 가부장체제를 무엇으로 보는지와 관련이 있다. 지면상 짧게 이야기하자면 가부장체제의 성체계는 남성중심체계이면서 동시에 이성애중심체계다. 이 체계는 성별이분법을 토대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위계를 만들고, 이 위계는 이성애적 관계만을 정상적이라 여기는 구조를 통해 유지돼 왔다. 퀴어와 트랜스젠더의 정치는 이 ‘정상성’에 도전하면서 고정된 성별이분법과 이성애중심성을 비판하고, 타고난 것으로 여겨지는 ‘남성’과 ‘여성’의 성별화와 이성애적 성적지향 자체에 도전해 왔다. 이런 점에서 여성과 트랜스젠더 혐오구조를 형성해 온 가부장체제에 맞선 싸움은 ‘여성’과 ‘트랜스젠더’의 공동 싸움일 수밖에 없다. 현재 성적 혐오를 생산하는 남성-이성애-자본 중심 가부장체제에 대한 ‘성투쟁’은 한국에서 그리고 지구지역적으로 전면화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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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에 나를 잇기

    "생물학적 여성" "XX 염색체" 등의 단어는 너무 사람의 마음을 무너지게 합니다. 대학을 다니며 나자신에 대해 고민하던 시간들까지 납작해지는것 같아서요. 숙명여대의 사례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앞으로도 그곳이 일상인 사람들 중 젠더퀴어, FTM 와 MTF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퀘스쳐너리 등의 일상과 안전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내가 나일수 없다는 점에서 현재의 폭력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XX 염색체의 경우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그러면 제가 아무리 가정폭력 가해자인 아버지와 싸워도 결국 저의 유전자는 친부와 99% 일치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들에 논리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로 인생을 사는 저는 뭐가 되는건지 제가 뭘하든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고 성차별적인 제도에 목소리 내고, 제가 원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을 해도, 어떤 노래를 좋아하든 어떻게 삶을 꾸리든간에 결국 그저 저는 제 친부와 99% 유전자 일치한 존재라는게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인지, 가부장제적인 호적제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서조차도 유전학적? 생물학적? 꼬리표로부터 너는~~ 00. 하는 판단하려는 시선에 저는 평생 벗어날수가 없는건지 환원론적인 이야기들에는 뭐라 반박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경우 동성애자로 저를 정체화할때 아 나는 이렇구나 에서 시작해서 이후 논의들을 접해왔는데 가장중요한 질문인 한 사람의 자기자신에 대한 Gender Identity가 나를 찾아가는 소중하고 멋진 질문인 정체성이 이렇게도 어렵고 복잡한 질문이 되어야하는지 속상합니다. 저는 트랜스젠더 분들의 이야기로 저 자신의 무지개를 더 넓게 찾아가는 길을 배우게 되었고요. 그리고 차별적인 사람들의 시선, 자라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음, 가정폭력, 국가는 통계조차 만들지 않음, 어려운 병원찾기, 의학/제도 차별, 화장실 문제, 행정기관의 차별, 가깝고 먼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 수없이 여러번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하는지, 국가의 차별적이고 무지한 사회제도가 만든 문제를 도대체 왜 어느 누가 무슨 권리로 계속해서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고 그러면서 배제하고 외면하며 힘들게 하는지 속상합니다...

    포비아들이 자라고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인 교육을 받아온건 국가교육 잘못인데 왜 퀴어 개인에게 모든 설명을 요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구린 교육을 받았지만 노력하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사람들아 모르면 모르는채로 조용히 있던지, 찾아서 공부를 하고 알아보려고 노력을 하던지, 설명을 해주면 무지를 인정하고 겸허히 들을 일이지 아니 남의 인생사 설명을 맡겨두기라도 하셨는지... 페미니즘 접하고 탈가정한 저에게 페미니즘이 점점 어렵고 먼 말이 되어가는것 같아요.. 사람이 억울하고 화가 나면 답답해져요...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트랜스젠더 혐오가 정당화되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 이말에 너무 공감이 되었습니다. 많이 긴 댓글이 되었지만..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은 달라지겠지만, 타인의 시선으로 나의 삶이 판단되는것, 그것이 어떤 고통이고 마음을 다치게 하는지 저는 페미니스트가 모를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한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하고 규정하는 폭력과 혐오를 멈추고 주변의 페미니스트에게 그것이 잘못된 일임을 말해주세요. 트랜스젠더의 이야기에 대해 타인의 이야기에 대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사회구성원들이 존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아 저 씨

    1
    성에 대해서 "뻥" 뚫린 이론을 볼 수 없었나 봅니다. 글을 많이 보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접했을 수도 있는데.

    이론만이라도 "뻥" 뚫린 글을 한번 보기를.

    댓글은 글쓴이 자신이 "다람쥐 쳇바퀴"를 쓴 것 그 이상은 아니네요.

    언어가 아무리 나아져도(새로 나온 좋은 옷을 아무리 많이 입어도?) 남녀의 몸은 제각각 똑같지 않나, 바뀔 수가 없어. 남녀의 성도 마찬가지야. 보통 사람들은 글쓴이의 심각한 <글의 내용>을 성의 유희 정도로 볼 것 같은데.

    2
    한국은 성도 가부장제에 대한 비난 서린 시선으로만 볼 수 없을 만큼 법률적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한편으로 볼 때 글쓴이 자신이 퇴행적이야.

  • 아저씨

    제아무리 엉켜 있는 실타래도 한 가닥의 실만 잘 찾아서 풀면 풀리지. 성에 대해서도 그런 글이 있느니라ㅎㅎㅎㅎㅎ 아저씨는 90년대 초중반에 가끔씩 봤느니라ㅎㅎㅎㅎㅎㅎ일간지 있잖어, 거기에도 성에 대해서 잘 구슬해 놓은 글이 나올 때가 있다. 아마 수십년에 한번이려나. 그냥 80년대 서적을 다 찾아서 한번 봐라. 그게 더 빠르겠다. 이렇게 말하면 귀는 있으니까 알아듣겠지ㅎㅎㅎㅎㅎㅎ그렇지 핵심뽀인뜨는 80년대 서적이니라ㅎㅎㅎㅎㅎㅎㅎ

  • 아 저 씨

    댓글 아한테

    아니 그런데 야가 좀 "욱기는데"ㅎㅎㅎ니 댓글은 <<알량한 지식이 몸을 겁탈하다>>구만. 그게 뭔지는 알겠구만. 저런 꼬맹이가! 하루속히, 너의 엉킨 성의 실타래를 풀거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