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노동의 귀환? 기술혁신 시대, 주체를 호명하는 방식

[레트로스케이프]


기술 혁신, 산업과 노동의 디지털화

지난 몇 해 동안 4차 산업혁명, 로봇경제, 디지털 공유경제, 플랫폼 노동, 긱노동, 크라우드 워크 등 산업과 노동의 변화에 대한 여러 담론이 논쟁의 수면 위로 올랐다. 산업혁명의 핵심 화두 중 하나는 제조업 혁신, 즉 제조업의 디지털화다. 잘 알려졌듯이 독일은 ‘인더스트리 4.0’을 통해 기존 공장을 지능형 생산시스템을 갖춘 스마트공장으로 전환시키고자 디지털화에 힘쓰고 있다. 미국은 ‘리쇼어링 전략’을 통해 값싼 노동력을 찾아 주변부 국가로 이전시켰던 공장들을 다시 자국으로 불러들이고, 공장·교통수단·헬스케어 등을 디지털화하는 ‘스마트 아메리카 챌린지’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도 ‘제조업 3.0’과 ‘제조업 르네상스’를 통해 여러 변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제조업의 변동 혹은 전통적인 산업도시의 쇠퇴라는 문제보다는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주로 문제가 되는 디지털 공유경제와 플랫폼 노동에 대한 논쟁과 대응이 비교적 더 활발하다.

변화의 동력은 단순히 어떤 새로운 기술의 출현이 아니라, 여러 기술들을 활용해 사회 전반을 광범위하게 디지털화(digitalization) 혹은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하려는 힘, 즉 기술혁신이다. 이러한 흐름은 중심부 국가들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었고, 다보스포럼이라고 불리는 세계경제포럼은 이를 묶어 ‘4차 산업혁명’으로 선언하며 모든 국가와 전 인류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라고 천명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 되는 CPS(Cyber-Physical System)은 생산 현장에서 실제와 가상세계를 연동하는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는데, 소프트웨어에 모든 기계요소가 연결돼 실시간으로 분산 제어가 가능한 지능형 시스템이다. 좁게는 공장의 모든 생산라인을 디지털화하는 것을 지칭하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넓게는 농업과 서비스업 등 여러 산업이 ‘스마트화’되거나 ‘플랫폼화’되는 전반적인 산업 변동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여러 노동들이 기계로 대체될 수 있다고 한다.

대부분은 새로운 기술이 인간을 편리하게 해주고 더 나은 삶을 제공할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통념을 가지고 있다. 노동의 기계화. 이는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계속 반복되는 주제다. 러다이트 운동 등과 같은 방식으로 이에 저항하는 흐름들이 있긴 했지만, 이러한 관념은 신기술이 나올 때마다 우리에게 다시 되돌아온다. 그래서 반대급부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SF 작품들이 재조명되거나 새롭게 만들어진다. 과학기술이 불러일으킨 정체성 혼란과 생태계 파괴, 그리고 파국 이후의 세계를 보여주는 여러 미디어 콘텐츠들이 주목을 받는다. 이렇게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각축을 벌이는 장면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풍경이다.

누가 육체노동을 죽였고, 왜 육체노동을 다시 소환하는가?

4차 산업혁명이 설파하는 담론들도 다시 돌아온 복고적인 탈노동의 신화일 수 있겠지만, 가만 보면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정보혁명 시기는 신경제나 지식기반경제 등 지식과 정보 중심의 새로운 경제체제를 제시했고, 이는 가치 생산활동의 헤게모니가 육체노동에서 지식노동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인간은 고통스러운 육체노동에서 해방될 것이고, 앞으로는 지식노동이나 문화적 활동에 전념하면 된다는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구체적인 양상은 다를지라도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 기존의 노동자들보다는 새롭게 부상하는 지식노동자 혹은 비물질노동자를 노동자의 중심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였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신자유주의에 휩쓸렸다.

이번 새로운 산업혁명 담론과 움직임은 인간이 육체노동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장밋빛 미래를 주장했던 정보혁명 때와는 다르다.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간의 일자리가 사라질 테니 다들 이러한 일자리 변동에 대비해야 된다는 거다. 하지만 저성장이 일상화되고 실업 문제가 만성화된 현실 속에서 존재 자체가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이 산업혁명이 던지는 메시지는 기계와 인간이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의자놀이’로 해석된다. 여기서 인공지능이 지적노동을 대체할 테니 인간이 육체노동만이 아니라 지식노동에서도 해방될 거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자들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 빅데이터 분석이나 프로그래밍 등의 전문적인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실제 이를 제작할 수 있고 인문학적 소양도 갖춘 창의융합인재가 돼 창업만이 아니라 스스로 직업을 창조하는 창직까지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호들갑을 떤다. 이게 지금의 풍경이다.

이전에는 노동자 임금 상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부 국가로 공장을 이전해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자국에서는 육체노동에서 해방됐다는 주장과 함께 지식노동자라는 새로운 노동 주 체를 강조했었다. 반면 지금 새로운 혁명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육체노동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일자리 경쟁에서 인간이 지능적인 기계와 차별화되려면, 육체든 지식이든 상관없이 창의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육체노동이 결합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이는 이전과 같은 육체노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전문적 지식으로 무장한 지적이고 창의적인 육체노동이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브라운 칼라’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이 용어는 육체노동자를 뜻하는 블루칼라나 사무직 노동자를 뜻하는 화이트칼라도 아닌, 블루칼라의 노동력과 화이트칼라의 아이디어를 결합한 ‘지적인 육체노동’ 혹은 ‘육체적 지식노동’을 행하는 노동자를 뜻한다. 예전 같은 전통적인 이분법으로는 새로운 노동의 성격을 지칭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말은 영국 언론에서 쓰이기 시작했는데, 고학력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집사 같은 육체노동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2013년 김난도 교수가 새로운 일자리 트렌드로 브라운 칼라를 제시했고, 각종 경제지를 포함한 미디어에서도 새로운 일자리의 성격으로 브라운 칼라를 조명했다.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공방, 목공, 농업, 관광업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브라운 칼라로 호명하기도 했다.

언제나 사회경제적 체제는 그에 적합한 주체 형태를 필요로 한다. 저성장이 일상화된 뉴노멀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리하고 극복하려고 제시된 기술혁신은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주체들을 필요로 한다. 이는 체제에 비판적이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주체들보다는,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창업하고 창직하면서 스스로 생존하는 주체들이다. 이렇게 기술혁신과 노동의 변화를 둘러싼 레트로스케이프를 살펴보자면, 기술의 발달로 인한 탈노동보다는 문 밖으로 쫓아냈던 육체노동을 다시 맞이하고 있는 재노동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 앞에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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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저씨

    네 매우 좋은 기사네요. 전에 노동의 종말과 같은 말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기사가 현실에 더 부합합니다. 연구원님이 매우 건강한 사회의식과 노동의식을 지녔습니다.

  • 아저씨

    총선전망 1

    코로나19와 세계경제의 불황이 겹쳐지고 있다. 한국은 가계빚(최소 800조 이상)이 높은 편이지만, 기업이 비축해 놓은 자금이 매우 많은 편이며, 외환보유고의 안정성과 비교적 안정된 재정으로 코로나19와 세계불황의 파고를 순탄하게 맞이하고 있다고 할 정도이다.

    4월총선의 다양한 여론 조사가 나오고 있다. 더민주당 30%대 중반, 미래통합당 20%대~30%대 육박, 정의당 3%~10%대, 국민의 당 3%~10%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나의 선험적 내지는 주관적인 기대치(4월 15일 투표결과)와는 크게 차이가 난다. 이 지지율만을 보면 미래통합당은 박근혜 탄핵의 여파를 완전히 회복하여 더민주당의 재집권을 위협하는 수위에 도달했다. 민중당, 노동당은 여론 지지율에서도 거의 잡히지 않고 있다. 이 지지율만을 보면 코로나19 정국과 각 계급의 지지율에서 군소정당의 정책과 실천이 큰 문제점이 보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가령 개량주의가 지지율을 올릴 수 있는 전부는 아닌 것이다. 군소정당들이 선거에 다가갈 수록 국회만을 지향하는 것은 보수와 민주의 가치를 그 안에 내재하게 되고 생산관계의 자본가들로부터의 지지와 임금노동자들로부터의 지지를 손쉽게 얻을 수 없음을 반영하고 있다. 곧 군소정당의 국회지향성이 다양한 계급으로부터의 그 지지율을 담보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코로나19 정국과 세계불황의 여파가 서서히 한국으로 몰려오고 있다. 지금까지의 여론조사만을 볼 때 미래통합당만이 성공적이라고 평가를 할 만하다. 그동안 더민주당과 군소정당은 촛불혁명에 도취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4월 총선을 한달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더민주당의 "자화자찬"은 어디까지 가고, 미래통합당의 지지율은 그 등락을 어떻게 그릴 것이며, 군소정당들의 정책과 실천은 또 그 어떤 포물선을 그리고 변화를 맞이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