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그린뉴딜, ‘이미지 메이킹’이 되지 않으려면

[녹색 스트라이크] 정부 발 그린뉴딜과 한국 기후정의 운동의 숙제

지난 5월 13일 문재인 대통령은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국토교통부 등 4개 부처에 그린뉴딜 관련 서류 보고서를 요청했다. 그러더니 20일에는 정부가 추진하기로 한 ‘한국판 뉴딜’에 그린뉴딜을 포함하기로 했다. 6월 초에는 226개 지자체들의 ‘기후위기 비상선언 선포식’이 열릴 예정이며, 각 언론사는 ‘한국판 뉴딜’ 혹은 그린뉴딜에 관한 칼럼들을 쏟아내고 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에서 그린뉴딜이 현실화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과연 기후운동은 성공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많은 이가 이러한 흐름을 반기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린뉴딜을 녹색 성장주의가 아닌 지속가능한 탈탄소 평등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구조변화의 프로그램이라 여겼던 이들의 우려는 크다. 그린뉴딜을 채택하게 된 문제의식 자체가 어떤 철학이나 비전 없이 “요즘 그린뉴딜이 화두”라는 대통령의 얕은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그린뉴딜을 한국판 뉴딜에 포함한다고 브리핑하던 날, 한 기자가 그린뉴딜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해달라는 질문을 던졌다. 청와대 대변인은 버벅거리다가 (이명박 정부 때의) 대규모 토목 공사와는 다르지만 ‘녹색성장’을 “지금 시대에 맞게 강화한 업그레이드 버전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라는 궁색한 답변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확인된 정부의 계획과 발언을 보면, 정부 발 그린뉴딜은 경제 성장률 회복과 ‘기후 악당국’으로 낙인찍힌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 개선이 주된 목표일뿐이다. 정부 계획에는 온실가스 감축과 생태계 보존의 기본 방향성(‘그린’), 회색 성장주의에 기반한 불평등한 사회경제체제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기에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사회상을 그려야 한다는 문제의식(‘뉴’),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전환 과정에서 영향을 받는 여러 당사자들의 참여와 합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과제(‘딜’)라는 그린뉴딜 구성요소 중 어느 하나 제대로 들어있지 않다.

정부가 그린뉴딜을 수용한 것 자체가 기후운동의 성공을 반영한 것이며, 이제부터 그린뉴딜의 내용을 채워나가면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목소리도 있다. 실제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진 만큼, 유엔 기후변화협약(UNFCCC)에 탄소감축 계획을 올해 안에 제출해야할 임무가 있는 정부가 의미 있는 탄소감축 계획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해외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에 대한 금융지원 중단 요구를 일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정부 정책이 뚜렷한 철학이나 비전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진행될 것이라 예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대내외적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요즘 ‘화두’인 그린뉴딜을 브랜드로 소비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정부 여당이 거대 의석을 확보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그린뉴딜의 문제의식을 정부에 강제할 사회운동이 약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운동의 주체가 돼야 할 풀뿌리가 조직돼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런 조건에서 민주당 외곽의 기후 전문가들이나 그린 테크놀로지로 돈을 벌어보려는 사업가들은 정부의 그린뉴딜을 환영할지언정, ‘기후정의’를 외쳤던 활동가들은 자칫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로 전락해버릴 공산이 크다.

어떻게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 기후정의 운동의 주체를 굳건히 세우는 일이다. 길지 않은 역사를 가진 한국의 기후정의 운동은 풀뿌리 대중조직이 아닌 몇 환경운동단체나 전문가 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돼 왔다. 그러다 보니 대중조직 기층의 조직화나 중장기적 직접행동의 기획보다는 강연회나 토론회 등 교육 프로그램, SNS 홍보전, 정부 청원이 주된 활동 방식이었다. (몇 차례의 기후행동이 있었으나 중장기적 행동의 계획 속에 배치되지 못한 채 단발적인 수준에 그쳤다.) 이런 활동은 존재감을 드러내고 기후위기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제고할 수는 있었지만 운동의 조직적 확산을 이루지는 못했다.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 농민, 지역사회 등에 개입해 이들의 참여를 끌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운동성을 강화해야 한다. 여기서 ‘사회운동성’은 정부나 경제권력과 확연히 구분되는 영역을 구축하고, 시민사회 각 부문에서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행동을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기후의제는 전문가 집단을 중심으로 ‘상층’에서 주로 논의됐고, 그것도 ‘협치’니 ‘거버넌스’니 하는 영역에서 가장 활발히 진행됐다. 탈탄소 사회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민관협력’의 영역은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이해에 기반해 독자적으로 조직된 ‘민’이 없는 경우 ‘협치’는 결국 민주화 이후 시대의 ‘관변단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정부와 경제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집합적 정체성과 시민들의 공간 확보는 사회운동성 강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다.

또한 사회운동성을 강화하기 위해 기후정의 운동은 보다 전투적일 필요가 있다. 사회운동은 특정 집단의 이름으로 특정 권력을 타겟 삼아 지속적인 압력을 행사해 특정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집합행위의 형태를 말한다. 사회운동의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은 권력자들이 위협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짜증나고 골치 아프게 만들어 어떤 식으로든 대응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것에 있다. 권력기관이나 제도, 일상에 균열을 내는 전술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은 사회운동 이론의 한결같은 결론일 뿐 아니라, 많은 활동가들이 경험을 통해 체득한 원리기도 하다.

‘기후정의’ 의제가 사회적으로 활발히 논의되는 나라들을 봐도 이 점은 명확하다. 영국에서 태동해 세계로 퍼진 ‘멸종저항’ 설립자 중 하나인 로저 할렘은 평소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일상에 균열을 내는 것(disruption)이다. 일상에 균열을 내지 못하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며 제대로 된 변화를 위해서는 수천 명이 연행되고 수백 명이 감옥에 가야 한다고 설파했다. 실제 멸종저항은 다리를 점거해 차량을 막거나, 공항 펜스를 뜯고 진입해 비행일정을 정지시키는 등 다양한 시민불복종 행위를 전개해왔다. ‘기후변화를 막고 수백만의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젊은이의 군대 만들기’라는 모토 아래 전국적 풀뿌리 운동조직으로 성장한 미국의 ‘썬라이즈 무브먼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거리 시위와 행진, 워싱턴과 주의회 의원실 점거와 같은 시민불복종 행동을 전개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키워왔다. 무조건 따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성공한 기후정의 운동을 보며 배울 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후정의 운동은 정부나 시장권력에 포획되지 않을 독립적 담론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기후정의’를 표방하는 기후위기비상행동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370개 이상의 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들의 요구는 정부의 기후위기비상 선포, 기후위기대응법 제정, 국회 내 특별위원회 설치, 탈탄소 전환을 위한 제도적 기반 마련 등 모든 참여단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정해졌다. 이런 요구는 정부가 아무런 기후대책도 마련하지 않던 시기에는 유효했을지 몰라도, 그린뉴딜 정책을 선포한 현재에는 그 적실성을 다시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난 4월 인천시는 ‘기후비상사태’를 선포했는데 그 내용이 종이컵 대신 텀블러 쓰기,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따위여서 활동가들이 난감해 했던 일도 있었다. 정부가 별 내용도 없이 기후비상을 선포하고 시늉만 낸 채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하면 대응이 그만큼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한국의 기후정의 운동도 이런 문제의식 아래 새롭게 전략을 짤 채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 한국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기층 대중조직들이 기후문제를 당면과제로 삼고 행동하지 않는 한 정의로운 탈탄소 전환은 요원하다. 사회운동성 강화와 연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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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저씨

    기후, 환경과 상품의 연관성을 연구해보는 것이 낫겠네요. 이런 종류의 기사는 수없이 나왔지만 <진보된? 제자리>에 머물고 있잖어요. 기사도 이렇게 연구를 하여 쓰게 되면 기업과의 경쟁력도 올라갈 것으로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