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절 한 번에 정치인생 끝난 허인회, 20년째 ‘운동권 대부’ 꼬리표

[1단 기사로 본 세상] 어느 쪽이든 과대포장은 위험해

[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2000년 4.13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민주당) 서울 동대문구 후보로 출마해 11표 차로 낙선하고, 일주일 뒤인 4월 20일 청와대 오찬에 초대된 허인회 씨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이 한 장의 사진이 허인회의 정치 인생을 끝장냈다. 단순 해프닝이었지만 ‘넙죽 큰절’은 이후 386세력의 운명을 결정했다.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대통령에게 큰절한 것을 예쁘게 봐줄 수 있다는 긍정론도 돌았지만 지나친 아부라는 비판이 많았다.

지금 같으면 미래통합당 같은 극우세력과 극우 언론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겠지만 당시엔 동년배 진보층이 더 많은 비판을 쏟아냈다. 그의 홈페이지엔 기득권에 대항해 싸우던 민주투사가 기득권 세력에게 너무 쉽게 영합했다는 실망의 목소리가 많았다. 민주당 386그룹들도 대부분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에겐 절대권력 앞에 충성을 다하는 나쁜 사람 이미지가 각인됐다. 3년 뒤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똑같이 서서 악수하기가 송구스러워” 그랬다고 했다.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서 독재타도를 외치던 삼민투(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위원장 허인회는 그렇게 시작도 못해보고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20년 전, 이것이 가능했던 건 당시 정치는 극우정당과 자유주의 정당, 재야 민주화 세력으로 삼분할 된 구조여서다. 재야 민주화 세력은 지금보다 훨씬 왼쪽에서 노동자와 도시빈민, 농민의 손을 잡고 두 제도권 정당에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재야 세력은 87년 대선 때 일부가 김대중을 지지했지만 그것도 ‘비판적’이란 단서를 단 제한적 지지였다.

넙죽 큰절 때만해도 민주당에 들어간 386 세대는 계파정치 타파와 당내 민주화를 외치며 소신 정치를 폈다. 적어도 입으로는. 그들 눈에도 허인회의 큰절은 불편했다.

허인회는 1년 뒤 동대문 재보궐선거와 2004년 두 번의 대결에서 모두 홍준표 후보에 패했다. 특히 2004년 4.15 총선은 열린우리당(민주당)이 152석이라는 단독 과반을 획득할 만큼 아무나 당선됐는데도 그는 1천여 표 차로 패했다.

지금은 어떤가. 민주당 안에 허인회의 큰절을 불편해 할 세력이 있는가. 386세대가 당권을 좌우하고 행정부를 장악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기득권이 됐다. 비록 몸은 비록 민주당에 들어갔지만 들판에 비 맞고 선 민중과 함께 민주당을 견인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온데간데없고, 자유주의 정당과 한 몸이 돼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이라고 기염을 토하며 자신을 뺀 좌우 모두를 공격하는데 혈안이다.

삼분할 정치는 사라지고 거대 보수 양당만 남아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부끄러운 건 오롯이 시민들 몫이다.

  동아일보 8월 7일 5면

천하의 허인회가 이번엔 도청 탐지기 제조사에서 수억 원의 수수료를 받고 정치권 인맥을 동원해 정부 부처와 지자체에 제품을 납품하도록 도와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결국 구속됐다. 일전엔 서울시 태양광 발전소 사업과 관련 불법 하도급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직원 임금과 퇴직금을 주지 않아 수사를 받기도 했다.

이번에도 언론은 허인회에게 내린 20년 전 낙인을 거두지 않았다. 매일경제는 8월 7일 25면에 ‘386 운동권 아이콘 허인회’라는 제목을 달았고, 동아일보도 같은 날 5면에 ‘운동권 대부 허인회’라고 제목 달았다.

어쩌면 386의 위선은 그보다 역사가 더 오래 됐을지도 모른다.

여기 삼민투 위원장 허인회가 연루된 1985년 미 문화원 점거사건 재판을 기록한 글이 있다.(월간조선 1985년 9월호, 11월호) 서울지역 대학생 73명이 1985년 5월 23~26일까지 서울 을지로에 있던 미 문화원을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전두환 정권은 삼민투를 배후로 지목하고 학생 25명을 구속했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겸 전학련 의장이었던 김민석(현 민주당 의원)과 함운경, 홍성영 등이 그들이다.
변호인단도 화려했다. 박찬종, 신기하, 이택돈, 목요상 등 현역 야당 의원들과 조승형, 홍남순 같은 재야 변호사 22명이 참여했다. 검찰은 영화 ‘1987’에 나왔던 최한 서울지검 공안부장과 최연희 검사(훗날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등 4선 의원)가 나섰다.

  매일경제 8월 7일 25면

1985년 7월 29일 열린 공판에서 박찬종 변호사는 “삼민투란 조직이 검찰 발표와 달리 하부 구조가 없는 가공의 조직”이라고 변론했다. 피고인 김민석도 “삼민투는 애초 전학련의 연구기관으로 발족했고, 고려대 총학생회장 허인회가 삼민투 위원장이지만 34개 대학을 연결하는 조직은 없는데 검찰이 각 대학별 조직을 삼민투로 한데 묶어 발표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자다”라고 말했다. 함운경은 점거농성을 푼 이유를 “5월 27일부터 롯데호텔에 북한 적십자 대표들이 투숙한다는 기자들 얘기를 듣고 농성이 북한에 이용되는 걸 막으려고 농성을 풀었다”고 했다. 함운경은 미 문화원에서 나올 때 태극기를 받쳐 들고 나왔다.

독재정권의 검·경과 사법부, 언론이 그들을 지나치게 과대포장해 준 게 화근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공안당국이 태극기를 받쳐 들고, 스스로 자유민주주의자라고 말하는 학생들을 국가보안법으로 몰아 한 건 올리려고 무리수를 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과대포장은 늘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