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속에 살아요

[유하네 농담農談]

  풀속에서 블루베리를 따는 유하 세하 [출처: 이꽃맘]

‘쑥쑥’ 풀 자라는 소리를 들어 봤나요

장마철입니다. 심했던 봄 가뭄이 끝나고 비가 온다는 소식에 유하네는 설렙니다. 작물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할 때 오는 봄 가뭄은 유하네 마음도 태웁니다. 뜨거운 태양아래 반나절이면 밭은 바짝 말라버립니다. 연신 스프링클러를 돌리고 물이 닿지 않은 곳에는 직접 호스를 들고 물을 줍니다. 봄 가뭄 동안 농부의 일과는 물주는 일이 시작이고 끝입니다. 초보 농부 유하 엄마는 물주는 일을 잘 하지 못해 기껏 심어놓은 작물을 죽이기 일쑤입니다. 이런 와중에 하늘이 비를 내려주면 이래서 농부는 땅을 밟고 하늘을 이고 산다고 하는구나, 합니다.

봄 가뭄이 지나고 장마가 오면 이제 풀과의 한판 싸움을 시작합니다. 유하 엄마는 매년 풀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전쟁을 선포할 것까지 있느냐, 하겠지만 올해는 반드시 풀을 몽땅 뽑아 내가 심은 작물들을 지켜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렇게 풀에 싸움을 걸지만 유하 엄마는 어느새 평화선언을 하며 풀을 이기겠다고 한 어리석은 생각을 반성하죠. 땡볕에 자라는 속도가 느려졌던 풀들이 수시로 내리는 비에 본격 활동을 시작합니다. 장마가 한차례 지나가고 뒤돌아보면 어느새 밭에는 작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풀들이 자라납니다. ‘쑥쑥’하고 풀들이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열심히 풀을 매보지만 돌아보면 다시 풀들이 고개를 듭니다.

풀을 키우는 거야? 고구마를 키우는 거야?

유하네는 약을 치거나 비닐을 깔아 풀이 자라는 것을 막는 농법을 하지 않습니다. 풀과 꽃이 어울리고 작물과 풀이 서로를 의지하며 자라길 바라죠.

한창 가문 날 고구마 밭에 물을 주고 있으니 앞집 할머니가 “왜 물을 주는 거야? 풀 잘 자라라고 물을 주는 거야?”하고 유하 엄마 가슴에 화살을 콱 박고 가십니다. 이랑은 물론 고랑에도풀하나 나지 않게 제초제를 뿌리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밭을 기어 다니며 풀을 매던 부지런한 할머니 농부에게 유하네 밭이 엉망으로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영양분도 많지 않은 유하네 밭을 보며 작물이 먹어야할 양분을 풀들이 다 먹어버릴 거라는 걱정이기도 합니다. “여기 고구마 있잖아요. 고구마 잘 자라라고 주는 거죠”하고 웃었지만 유하 엄마도 이 많은 풀을 언제 뽑나 한숨이 절로 납니다.

고추밭 풀을 매주던 날, 커다랗게 자란 개비름을 보며 “얘는 언제 이렇게 자랐대”하며 낫으로 베려는 순간 개비름 줄기에 하얗게 진딧물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옆에 있던 고추에는 진딧물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에요. ‘개비름으로 진딧물이 모이나보다’하고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개비름을 자르면 고추로 진딧물이 옮겨갈 테니 말이죠. 풀하고 작물하고 어울리며 산다는 것이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망초와 어울려 크는 해바라기 [출처: 이꽃맘]

스스로를 지키는 힘을 잃어가는 채소들

풀을 진지하게 들여다봅니다. “사실 우리가 키우는 모든 채소는 풀에서 시작한거야” 유하 파파가 말합니다. 절로 나던 풀에 열린 열매를 따먹다 먹을 만한 풀들을 개량해 지금의 채소와 과일들이 탄생한 거죠. 더 많은 수확물을 위해 개량을 거듭하면서 열매들은 커지고 달아지고 맛있어졌지만 작물이 스스로 가지고 있던 적응력은 약해지고 있습니다. 벌레 한 마리 들어오지 못하는 하우스에서 자라거나, 각종 살충제, 제초제와 화학비료로 자란 작물들은 스스로 가지고 있었을 각종 힘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란 작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강하게 가지고 있던 향마저 잃어갑니다. 유하네를 방문해 바비큐를 즐기던 한 친구가 유하네 텃밭 상추에 고기를 싸먹으며 “아니 원래 상추에 향이 나는 거야? 식감이 왜 다르지?”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비닐하우스에서 곱게 자라 마트에 예쁘게 진열된 보들보들한 상추만 먹어봤던 친구에게는 유하네 상추가 낯설었나 봅니다. 풀과 경쟁하고 스스로 벌레를 쫓으며 자란 작물들은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하네는 이 힘이 사람에게도 스스로를 지킬 힘으로 전달될 거라 생각합니다.

풀이 영양분 가득한 흙으로 풀이 가득한 밭에 유하 할머니가 앉습니다. 앉은키만큼 자란 풀숲에 앉아 쓱쓱 풀을 뽑기 시작합니다. 한창 풀을 매다 할머니는 “여기는 너희가 사는 곳 아니야. 저리 가”라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함께 풀을 매던 유하 엄마가 놀라 “무슨 일 있으세요?” 물으니, “여기 뱀이 있잖아. 새끼인 것 같은데 내가 한마디 했더니 저리로 갔어” 하십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풀 숲 그늘에 뱀이 쉬고 있었나 봅니다. 혹시나 유하, 세하에게 해가 갈까 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알아챈 뱀이 스스로 자리를 피해줍니다.

장마 사이 할머니와 유하 엄마가 열심히 뽑아놓은 풀을 한쪽에 쌓아 놓습니다. 옛날에는 집마다 두엄장이 있었다고 하지요. 두엄은 풀 등을 쌓아서 썩혀 만든 거름을 말합니다. 지금은 화학비료나 포장된 퇴비를 사서 사용하기 때문에 시골에서도 두엄장을 보기 힘듭니다. 유하네는 밭에서 나온 각종 풀을 비롯해 깻대, 고춧대 등 작물 부산물들을 모아 한쪽에 쌓아 썩힙니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비료나 퇴비가 아니라 스스로 만든 건강한 퇴비, 두엄을 작물들에게 주려고 하는 거죠.

올 봄, 마을 도정공장에서 나온 왕겨에 각종 풀과 유하네가 먹고 남은 음식물 찌꺼기 등을 넣어 썩힌 두엄을 밭에 뿌렸습니다. 두엄을 뒤집으니 어른 엄지손가락보다도 큰 굼벵이들이 잔뜩 나오기도 했습니다. 유하는 닭 밥으로 준다며 얼른 통에 주어 담았지요. 옆에 있던 세하가 “여기도 궁뎅이가 있어”라고 해 한바탕 크게 웃기도 했습니다. “이거 잡아서 팔면 돈 되겠는데.” 요즘 사슴벌레며 장수풍뎅이, 굼벵이를 작은 상자에 넣어 판다는 얘기에 유하 파파가 웃으며 농담을 합니다. 실제 며칠 후 유하는 학교에서 자연과학시간에 받았다며 굼벵이를 상자에 담아오기도 했으니 영 농은 아니었습니다. 두엄을 뒤집으니 질긴 풀들은 사라지고 포슬포슬 흙이 나왔습니다. 풀이 썩어 다른 식물들에 꼭 필요한 영양분을 가득 가진 흙이 된 것입니다. 두엄장에는 유하네가 먹고 버린 단호박 씨가 넝쿨을 만들고 다시 단호박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두엄 한 수레를 퍼 넣고 심은 맷돌 호박도 줄기마다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겠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영양분을 가득 가진...” 풀 속에 사는 유하네는 어느새 개똥 철학가가 되기도 합니다.

유하네는 오늘도 풀숲을 헤치고, 잘 자란 풀을 베어 눕히며 들깨를 심으러 나섭니다. 풀들이 스스로 만들어 낼 유기물과 영양분이 가득한 땅을 기다리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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