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된 무책임’이 만들어낸 위험의 일상화

[녹색스트라이크] 그리고 이를 깨기 위한 싸움


지난 10월 17일, 정부가 주관하는 ‘2050 장기저탄소발전전략(LEDS) 수립을 위한 국민토론회’가 열렸다. ‘2050 장기저탄소발전전략(LEDS)’은 2015년 파리기후협약에 따라 195개 정부가 제출해야 하는 2050년까지의 탄소감축 계획을 말한다. 파리협약 참가국들은 지구 기온상승의 마지노선을 2℃로 잡고 최대한 1.5℃로 온난화를 막아야 한다는 인식하에 2050년까지 탄소중립 혹은 넷제로(인간이 배출하는 탄소와 흡수되는 탄소가 0에서 균형점을 찾는 상태)에 도달할 것을 약속했다. 파리협약은 2016년 12월 국회비준을 거쳐 한국에서도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는 국제협약의 지위를 갖게 됐다.

지구온난화가 촉발한 이상기후 현상으로 폭염, 산불, 홍수 등의 기후재앙이 덮쳐오는 이 비상한 시점에 탄소감축의 과제는 지구상 모든 생명의 미래가 걸린 중차대한 사안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국민토론회’는 사회 각계각층이 모여 지금 당장 기후위기를 최소화 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산업계를 대변하는 전문가들이 모여 어떻게 ‘혁신’을 통해 기존의 산업과 에너지 체제의 이익을 극대화할 것인지를 놓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그나마 유튜브 실시간 방송 채팅창으로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으나 토론회는 지루하게 진행됐다. 그러다 두 시간 쯤 지날 무렵, 화면에는 안 잡혔으나 멀리서 비명과 사이렌, 꽹과리 소리와 함께 절규에 가까운 구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2050년 탄소중립 선언하라!” “NDC를 상향하라!” (NDC는 파리협약에서 LEDS에 더해 5년마다 법제화된 형태로 제시해야 하는 국가별 온실가스 감축계획을 말한다. LEDS는 권고사항이지만 NDC는 법적 의무를 수반한다.) 당황스러운 모습이 역력한 발표자는 목소리를 한층 키웠고 사회자는 예정에 없던 휴식을 선포했다.

토론회장에서 소동을 일으킨 이들은 청년 기후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토론회장으로 난입해 자신들의 주장을 외치고자 했 으나 저지당해 문 앞에서 구호를 외쳤다. 청년 활동가들은 토론회 진행 동안 조용히 있겠다는 조건으로 끝날 무렵 발언권을 얻었다. 5시간이 넘는 토론회가 끝나갈 즈음 마이크를 건네받은 한 청년 활동가는 “국민토론회인지 전문가 발표회인지” 알 수 없어 현장진입 시도를 했다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돈과 기술, 투자, 신산업 이야기로 도배된 그날의 토론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에 대한 이야기는 빠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부 부처와 전문가들의 연구결과에 생존의 가치, 생명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 생존이 위협받을 때의 비용과 위험은 어떻게 추산되는지를 되물었다. 그는 우리 사회의 논의에서 우선순위가 얼마나 잘못됐는지도 꼬집었다.

“현재 한국의 산업구조, 에너지 의존도가 지배하는 시나리오 결과로 2050년 탄소중립의 경제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2050년 우리 국민들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당장 오늘의 산업구조와 에너지 체계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뼈아픈 성찰의 말들을 오늘 토론회에서 주고받았어야 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물었다. “고도의 문명과 기술발전으로 인해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고 만다면 인류의 눈부신 진보와 성장은 무슨 소용일까요?”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에게 이들의 주장은 기후위기의 원인을 제공하고 위기대응마저 지체시키는 이 시스템의 근원적 문제, 또 위험을 일상생활의 일부분으로 만들어버린 현대사회에 대한 척진 비판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더 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이 출현하고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급증한 이래 인류의 역사는 스스로를 끊임없는 착취와 차별, 전쟁과 살상, 대형 원전사고와 점증하는 기후위기의 위험 속에 체계적으로 노출시켜온 역사가 아니었던가.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합리성과 과학, 근대 산업과 민주주의의 고도화에 비례해 인류가 처한 위험과 위협이 커지기만 했던 이 역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국의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즈는 1950년대에 이미 전문가주의와 비인격적 관료제에 내재된 “조직된 무책임”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밀즈에 따르면 고도로 전문화된 현대사회에 이르러 정책결정자들은 중립적인 양 행세하고 다수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정책들은 민주적 토론 없이 일반 시민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결과 시민들의 삶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문제가 발견돼도 개인은 미로처럼 짜인 관료제를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됐고, 해결은커녕 문제의 책임소재를 찾는 일조차 어렵게 돼버렸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도 체르노빌 사건으로 세계가 충격에 시달리던 1986년 출간한 《위험사회》와 이후 저작들에서 현대 위험사회의 본질을 ‘대규모 위험을 생산해내는 사회체제와 이러한 위험을 야기한 책임주체의 부재’라는 모순에서 찾았다. 2008년 나온 《위험에 처한 세계》라는 책에서 그는 정치인, 산업계, 연구자, 법조인 등 전문가 집단이 위험을 생존의 문제가 아닌 경제성에 따른 합리적 안전 관리의 문제로 둔갑시킨 결과, 인류는 영속적인 위험과 파괴가 ‘정상’이 돼버린 사회를 살게 됐다고 일갈했다.

물론 이와 같은 ‘조직적 무책임’은 기후위기 대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얼마 전 감사원은 1년 넘게 끌었던 월성1호기에 대한 감사결과를 발표했는데, 2018년의 폐쇄 결정이 경제성을 “불합리하게 낮게 평가”한 결과라며 사실상 폐쇄 반대 의견을 제출했다. 영광4호기 격납 건물 벽에 구멍이 발견되거나 월성3호기 냉각재 유출로 노동자들이 피폭을 당해도 관료들은 안전 관리를 말한다. 월성과 고리 등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몸에서 높은 수치의 방사능이 검출되고 갑상선암 환자가 계속 나와도 전문가들은 경제성을 말한다.

이 뿐인가?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시간과 강도를 가진 나라에서 매년 10만 명 넘는 산업재해와 2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와도 관료와 전문가들은 안전 감독 강화나 기껏해야 산재보험 확대를 말한다. 그런데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또다시 전문가의 결정을 목매고 기다려야 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주기 때문에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사람의 안전과 생명은 비용으로 처리되고 사고와 죽음은 통계상 숫자로 남는다. 미로와 같은 관료제를 통해 작동하는 권력과 통제 시스템 속에서 문제의 책임을 묻는 일 또한 요원하다.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문제는 시스템이 잘못 작동됐기 때문이 아닌, 시스템이 초기 디자인 그대로 작동되기 때문이라는 인식은 밀즈나 벡의 문제의식과 공통분모를 이룬다. 그러나 이들은 강고해 보이는 이 시스템이 영원할 것이라 보지 않았다. 밀즈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개인의 어려움을 공적 영역에서 이야기하고 시스템 바깥에서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벡도 전 지구적 위기의 시대는 조직된 무책임의 작동방식을 뒤흔들 새로운 정치적 행동과 제도화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 판단했다.

헤게모니를 깨기 위한 새로운 행동은 “기후변화 말고 체제변화”를 외치는 세계 각지의 기후정의 운동가들을 통해 그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무책임의 극치였던 국민토론회에서 한국 청년활동가들의 행동은 가장 단순하고 근본적이기에, 전복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고도의 문명과 기술발전으로 인해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고 만다면 인류의 눈부신 진보와 성장은 무슨 소용일까요?”

조직된 무책임을 무너뜨리기 위한 싸움은 이미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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