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가루가 내려앉은 퇴직 광부들의 마을, 까막동네

[특별기획: 검은 땅을 먹고 살았다] 매일 탄가루 마시며 사는 사람들…주민 대다수가 진폐 등 호흡기 질환

[특별기획1] 까막동네: 쇠락한 탄광촌 마을 사람들

1) “35년간 탄가루를 마셨고, 폐암에 걸렸습니다”
2) 탄가루가 내려앉은 퇴직 광부들의 마을, 까막동네
3) 여성 광부①: 가난해서 데모도 못 했다
4) 여성 광부②: 선탄 작업 도중 산재사고…다리를 잃어도 삶은 계속 된다
5) 여성 광부③: 광부는 두 하늘, 여성 광부는 세 하늘을 덮고 살았다
6) 탄광 노동자 죽음과 산재로 쌓아올린 석탄 산업
7) 탈석탄 전환 사회’, 폐광촌 주민 목소리는 없다

  까막동네 주민들이 모여 탄가루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출처: 워커스 취재팀]

강원도 삼척 도계광업소 앞 작은 마을. 길게 뻗은 기찻길과 광업소 담장 사이에 자리 잡은 섬 같은 동네. 사람들은 77가구가 모여 사는 이 마을을 ‘까막동네’라고 불렀다. 저탄장에서 날아든 탄가루가 마을에 까맣게 내려앉았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주민들은 짧게는 30년, 길게는 60년간 매일 탄가루를 몸에 묻히며 살았다.

까막동네는 한창 탄광 개발이 번성하던 시기에 생겨난 마을이었다. 도계는 광산에 일자리를 찾으러 들어온 사람으로 넘쳐났고, 이들이 살 집은 항상 모자랐다. 그래서 광부들은 도계광업소 담장 앞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석탄공사, 철도공사 부지와 하천부지까지 뒤섞인 땅에 무허가 건물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그렇게 까막동네가 생겨났다.

한창때는 130가구가 북적거리며 살던 시절도 있었다. 주민들은 조그만 땅을 나누고 쪼갠 단칸방에 살림살이를 채워 넣었다. 좁디좁은 땅덩어리에 화장실 만들 공간이 없어, 손수 공용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했다. 저탄장에서 날아오는 탄가루와 먼지는 매일 마을 곳곳에 수북이 쌓였다. 탄을 실은 삭도1)가 마을길을 지날 때마다 탄가루가 풀썩거렸다. 주민들은 검은 탄가루가 눌어붙은 장화를 신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광부와 아내, 남편을 잃은 여성 광부,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이 모여 사는 동네는 늘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1989년 시작된 정부의 석탄 합리화 정책으로 문을 닫는 광업소가 늘어났고, 일자리를 잃은 광부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해가 다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줄었고, 빈집은 늘어만 갔다. 그리고 어디든 떠날 수 없는, 떠날 곳이 없는 77가구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아직도 까만 까막동네

“바람 불면 탄가루랑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니, 오죽하면 까막동네라 하겠어요. 도계 사람들이 까막동네라고 하면 다 알아.” 올해 여든두 살인 마을 주민 김덕희(가명) 씨가 정자에 내려앉은 탄가루를 닦아내며 말했다. 그는 까막동네에서 52년을 살았다. 여러 사정이 겹치고 얽혀 탄가루 날리는 동네를 미처 떠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떠나지도, 남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출처: 워커스 취재팀]

김 씨는 매 순간 숨이 가빴다. 그래서 오래 걷질 못했고, 자주 기침을 했으며, 항상 가래가 끓었다. 지난해 10월, 그는 규폐2) 7급을 받았다. 젊은 시절, 10년 넘게 대한석탄공사와 경동광업소에서 일을 한 탓이었을까. 처음에는 마스크 없이 일했고, 몇 년 지나서야 마스크가 지급됐다. 일이 고되고 답답해서 벗어 놓고 일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나는 십몇 년밖에 안 했잖아요. 그때 나랑 같이 광산서 일하던 사람 중 살아 있는 사람은 드물어요. 몸 안 사리고 오래 일한 사람들은 진즉에 다 죽었지.”

광산을 나와서도 이 마을에 살면서 매일 탄가루를 마셨다. 어찌 이렇게 평생을 사나 싶어 청와대에 진정을 넣고, 지자체에 여러 차례 민원도 넣어 봤다. 그제야 도계광업소 담장에 분진망이 설치되긴 했지만, 그 정도로 까막동네의 까만 탄가루가 사라질 리 없었다. 그저 석탄 합리화 정책으로 석탄 생산량이 줄면서 자연스레 탄가루와 먼지가 조금 줄었을 뿐이었다.

까막동네 주민들 대다수는 김 씨처럼 70~80대 퇴직 광부들이거나, 광부였던 남편을 잃은 여성 노인들이다. 마을에서 만난 이정섭(가명, 61) 씨는 자신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 역시 이 동네에서 20년을 산 퇴직 광부였다. 그나마 아직 살아갈 날이 많아 조만간 이 마을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불편한 건 말도 못 하죠. 바람 부는 날에는 방문을 닫아 놔도 방바닥이 새까매져요. 집 외벽 좀 보세요. 새카맣잖아요. 새로 칠을 해놔도 저 지경이니 아예 칠도 안 해요. 집도 안 고치고 있어요. 딴 곳으로 갈 겁니다.”

예전에는 주민들이 시위도 하고, 요구도 하고, 민원을 넣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패배감이 짙어질수록, 젊은이들은 마을을 떠났고, 노인들은 더 나이를 먹어갔기 때문이다. 그 사이 정부를 향한 분노와 실망감만 가슴 한편에 시커멓게 쌓였다. “보상이요? 몇 년 전에 연탄 몇백 장 한 번 주더이다. 6~7년 전인가에는 전체 동네 주민을 상대로 검진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상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다 정상이랍니다. 탄가루 마시면서 콜록거리는 사람들이 천지인데도 아무 문제가 없대요. 그냥 우리를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뿐입니다.”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니는 동네

1960년부터 20년간, 석탄 산업이 큰 호황기를 맞았던 시절. ‘도계’라 하면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니는 동네라고 했다. 석탄을 파낼수록 돈도 일자리도 넘쳐나는, 보릿고개 속의 낙원이라 했다. 오죽하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도계년’이라는 노래를 유행가처럼 부르고 다녔을까. “달려라 달려라 삼척역까지, 도계년들 밥만 먹고 똥만 싼다”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민요는 탄광촌 여성들의 삶을 혐오하고 비웃었다. 광부 남편을 둔 숱한 여성들이 도박에 빠지고, 춤바람이 나더라는 소문도 흉흉했다.

[출처: 워커스 취재팀]

까막동네에서 50년을 산 여든네 살 박이분(가명) 씨는 광부의 아내였다. 그의 남편은 20년간 흥전항에서 광부로 일했다. 막장에 들어가 탄을 캐 실어 나르는 일을 하며 숱한 사고를 겪었다. “뭐 굴이 무너졌다, 뭐가 무너졌다 그러면서. 말도 못 했지. 한번은 굴이 무너져서 안 죽으려고 구석에 쪼그리고 있다가 사람들이 억지로 구조해서 병원에 실려 가고.” 쉰둘에 정년퇴직한 남편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치료하느라 긴 세월 병원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퇴직 후 10년 만에 진폐증3) 판정을 받았고, 그 병으로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니는 시절을 보냈는데, 왜 이 동네에 홀로 남았느냐 물으니 박 씨가 웃는다. 석탄도 돈도 넘쳐났다던 그 시절, 박 씨는 왜 그런지 항상 돈이 모자랐다고 했다. “남편이 광산 다니면서 이 집을 얻었어. 그땐 돈이 없었지. 한 달 만근하고 보너스도 탔는데 왜 그런지 돈이 항상 모자랐어. 우리는 아홉 식구야. 자식만 일곱이지. 그때는 아이도 많이 낳았잖아. 애들이 한 달에 쌀 한 가마니씩을 먹었어.” 큰아들은 군대를 전역해 광산에 들어갔다. 박 씨의 남편이 쉰둘에 정년퇴직한 것도, 먹고 살기 막막한 아들이 아버지의 직장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고되고 거친 광산 일을 버티지 못했다. 결국 3개월 만에 일을 관뒀다.

자녀들이 출가하고,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박 씨는 까막동네에 홀로 남았다. 뒤돌아서면 새카매지는 집을 닦고 또 닦으며 과거와 다름없는 삶을 산다. “우리라고 진폐가 왜 없겠어. 이제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다 가고 할머니들만 남아있어. 얘기하는 사람도 없고, 얘기해도 듣질 않으니 그냥 사는 거지.”

낮은 언덕의 좁은 샛길들을 따라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중 유난히 대문이 작은 집에서 오명석(가명. 53) 씨를 만났다. 그는 객지에서 일하다 허리를 심하게 다쳐 어머니 집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허리가 성치 않은 그는 잘 걷지도, 서 있지도 못했다. 그의 어머니 역시 다리를 쓰지 못한다. 어머니는 60년을 까막동네에서 살았고, 이곳에서 오 씨를 낳았다. 탄광촌에서 자란 삼 형제는 모두 광부가 됐다. 오 씨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광산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원체 몸이 허약해 광산 일을 버티기 힘들었다. 결국 2년 8개월 만에 막장을 떠났다.

환갑이 넘은 그의 형은 아직도 광산에 다닌다. 올해 쉰이 된 동생도 20년간 광부 일을 하고 있다. 남들은 광산에 돈이 넘쳐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일하는 것이나 근속에 비하면 그리 넉넉하게 버는 것도 아니란다. 처음부터, 그리고 오래도록 켜켜이 쌓인 가난은 까막동네에 내려앉은 탄가루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현재 오 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생계급여를 지급받아 살아가고 있다. 광산이 싫어 떠났던 그는 오십이 넘어 다시 탄광촌으로 돌아왔다. “빨래를 널면 탄가루 때문에 시커메져요. 빨랫줄도 시커멓고요. 천막(분진망)을 쳐도 바람이 불면 탄가루가 날리는 건 똑같습니다. 그렇다고 이주를 요구하지도 못해요. 다른 곳에서 이만한 집에 살려면 돈이 훨씬 많이 드니까요. 그러니 그냥 말을 안 하는 거죠.”

까막동네의 기침 소리

세 살배기 때 까막동네에 들어온 한민복(63, 가명) 씨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오래전, 석탄 산업 호황으로 먹고살 만했던 시절을 얘기해달라고 하니 대뜸 화부터 낸다. 한 씨는 17년간 광산 생활을 한 퇴직 광부다. 그는 한 번도 풍족한 시절을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잘 살긴 뭘 잘 살아. 여기 다 판자촌 비슷하게 작대기 세워놓고 가건물 지어 살았는데. 그때 벽지는커녕 신문지도 없어서 벽에 뭘 바르지도 못했어. 다 허사고 헛소리야.”

[출처: 워커스 취재팀]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 일찍 밥벌이를 해야 했기에 열일곱의 나이에 입사 서류를 위조해 광산에 취업했다. 하루하루가 고달팠지만 굶지 않으려면 별수 없었다. 처음에는 정규직이었지만 나중에는 하청노동자로 도계광업소와 경동광업소를 전전하며 일을 했다. 광산 발파작업 중 사고를 당해 다리에 장애를 입기도 했다. “몸이 안 좋아도 일을 했어. 배고픈데 어떡할 거야. 일할 사람이 없어서 오야지(관리자)들이 쌀 줘가며 부탁을 했지. 먹고 살 정도로만 주면 괜찮게? 그런데 그놈들은 그 정도도 (임금을) 주지 않아.”

한 씨 역시 광부들의 직업병인 진폐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 더 일할 수 있는 몸도 아니다. 가뜩이나 호흡이 가쁜데, 도계광업소에서 날아오는 탄가루와 먼지 때문에 하루하루가 고역이다. “맨날 아침에 캑캑거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광산도 안 다닌 여동생도 집에서 맨날 캑캑한다니까. 옛날에 여기 장화 신고 다녔어. 비 오면 탄가루가 질퍽거리고. 마을이 아주 새카매. 지금도 여름에 문도 못 열어놔. 민원 넣으면 뭐 해. 석공에서 자기 사람들 불러다가 소음기 측정 몇 번 하다 가 버리는데. 믿을 수가 있어?”

그런데도 한 씨는 진폐 급수를 받지 못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퇴직 광부들이 진폐증 급수를 받는 일은 더욱 요원하다고 했다. 까막동네에는 한 씨처럼 급수를 받지 못한 진폐 재해자들이 많다. 그들은 탄광에서 일하며 진폐증을 얻었지만, 공단에서 급수를 내주지 않아 보상연금을 받지 못한다. “진폐 검진 지정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으면 정상이래. 정상이 어디 있어? 광산에서 몇 십 년 일한 사람들도 급수 잘 안 줘. 우리가 광산에서 일할 때만 해도 꽤 줬는데, 이제는 아니야. 목에서 피가 올라와야 그때 급수를 주지. 폐에 완전히 고름이 꽉 차서 다 죽어가야 줘. 그렇게 급수받으면 뭐해. 3개월 입원했다가 죽어버리는데. 너무 억울해. 무식하면 빨리 죽어야지 뭐.”

30년간 도계광업소에서 광부로 일한 백경남(가명) 씨도 진폐 급수를 받지 못했다. 수십 년의 광부 경력도 무용지물이 됐다. 병원마다 진폐 급수를 주는 기준이 달라, 서울로, 동해로, 장성으로 병원을 찾아다녀야 한다. “진폐 의증은 받았는데 급수는 못 받았어요. 여기 나 같은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서울 가면 급수가 잘 나온다고 해서 지난달에 서울까지 올라갔는데 차비만 더 들었어요. 여기에 살면 탄가루를 비롯해 먼지, 돌가루, 모래를 많이 마셔요. 그런 먼지가 폐에 쌓이면 더 안 좋아지는데, 민원 넣어도 바뀌질 않아요. 싸울 사람도 없고, 싸운다 해도 약자들이 이기지도 못하고.”

한때 광부들이 산업일꾼으로 칭송받던 시절이 있었다. 태백시에는 탄광에서 죽어간 광부와 가족들을 기리기 위한 ‘산업 전사 위령탑’도 조성돼 있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퇴직 광부들은 과거와 현재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까막동네의 광부들은 세월이 지나도 까마득한 어둠을 지워내지 못한다. 한때 ‘도계년’이라는 조롱을 받았던 탄광촌 여성들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남성중심적 문화가 뿌리 깊었던 탄광촌에서, 살기 위해 광부로 나섰던 선탄부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역사의 뒤편으로 내몰린다. 기록되고 기억돼야 할 이야기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야 할 모든 것들이 폐광산 안에 같이 묻히고 만다.

<각주>

1) 공중에 설치한 강철선에 운반차를 매달아 사람이나 물건 따위를 나르는 장치
2) 규산이 많이 들어 있는 먼지를 오랫동안 들이마셔서 생기는 폐병. 채광, 채석, 야금 따위의 일을 하는 사람이나 도자기공, 석공들이 많이 걸린다
3) 폐에 미세한 먼지인 분진 등이 쌓여 폐의 조작 반응으로 폐가 굳어져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는 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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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세상 독자

    기사를 이렇게 쓰면 우울증 걸리기 딱 좋은 것 아닌가요. 정서적으로 풍부한 사람이야 얼마든지 딛고 일어나겠지만
    1편에서 7편까지 제목만 봐도 우울증이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

  • 참세상 독자

    코로나 세상

    1
    우익은 박근혜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이 차례차례 구속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인과 군대에 우익으로 나설 만한 인물이 없었다. 끝내 전광훈 목사가 "문재인 코로나"라고 하며 우익을 대표하여 나섰다.

    경제는 만시지탄이었다. 단지 문재인 정부와 더민주당은 중도적 입장에서 자영업자와 임금노동자의 계급성을 적절하게 고려하여 이해를 관철할 줄 알았다.

    노동계는 속수무책이었다. 자유주의도 길이 아니요. 인민주의도 길이 아니요, 사회주의도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동단체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자유주의 선비, 인민주의 선비, 사회주의 선비가 스스로 헤맬 뿐이었다.

    2
    문재인 정부는 그 반 이상이 지금도 보수의 종이다. 부동산 정책으로 노동정책으로 보수의 탐욕을 채워줄만큼 채워줬지만 매일 맘에 들지 않는다고 채찍질을 당한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부귀영화와 권력으로 등뼈에서 뇌골까지 반이상 녹아내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보수는 일찍이 문재인 정부를 향하여 신적폐라고 칭하였다. 그렇지만 보수는 궤변의 논리로 머무르는 한계를 보였다.

    정의당 등 중소정당들은 거대양당의 벽이 너무나 높았다. 의회주의를 보아도 구노선들을 보아도 잘 되지 않아서 제자리로 머물렀다.

    3
    그러나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여기가 자본주의의 종착역입니다"하고 선언할 수 없었다. 또한 "여기가 역사의 종착역입니다"하고 선언할 수 없었다. 사실 자신들도 자신들의 운명을 모른다.

    그렇지만 젊은이는 여기가 생이 끝이 아니요, 자본주의가 전부가 아니요, 지금이 역사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늘을 살아가는 계급들은 시대를 찍는 시점과 역사를 찍는 시점이 제각각 다를 수 있을 뿐 다음 세기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