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는 두 하늘, 여성 광부는 세 하늘을 덮고 살았다

[특별기획: 검은 땅을 먹고 살았다] 여성 광부 이야기③ 70살에 한글 공부해 시집 낸 전옥화(75) 씨

[특별기획1] 까막동네: 쇠락한 탄광촌 마을 사람들

1) “35년간 탄가루를 마셨고, 폐암에 걸렸습니다”
2) 탄가루가 내려앉은 퇴직 광부들의 마을, 까막동네
3) 여성 광부①: 가난해서 데모도 못 했다
4) 여성 광부②: 선탄 작업 도중 산재사고…다리를 잃어도 삶은 계속 된다
5) 여성 광부③: 광부는 두 하늘, 여성 광부는 세 하늘을 덮고 살았다
6) 탄광 노동자 죽음과 산재로 쌓아올린 석탄 산업
7) 탈석탄 전환 사회’, 폐광촌 주민 목소리는 없다

제가 70살까지 글자를 몰랐어요. 아주 어렸을 때 동네 야학이 있었는데 엄마 뒤에 숨어서 어깨 너머로 ‘기역니은’ 배운 게 다예요. 그러다 70살에 문예 학교를 알게 됐어요. 남편이 6년 전 사고로 죽고 나서 집 안에서 콕 박혀 있으니까 사촌 동생이 저를 끌고 가데요.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하나 싶었는데 학교가 내심 궁금했어요. 의자 있고, 책상 있는, 선생님이 수업하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그런 학교요. 실제로 가니까 머리가 허연 어른들이 나름 진지하게 공부를 하는데 생경하면서도 좋아 보이더라고요. 선생님이 저를 되게 반가워해 주셔서 그것도 좋았네요.

만 4년을 배우고 나니 내 삶을 찾은 느낌이에요. 농협 가서 혼자 돈도 찾을 수 있고, 남편이 죽고 생긴 우울증도 없어졌어요. 2018년엔 시집을 냈어요. 일기처럼 쓴 글인데 선생님이 시라고 하더라고요. 묶어서 책을 냈죠.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고 중학교 입학을 해야 하는데 딱 코로나가 터졌네요. 지금도 발을 동동 굴러요. 빨리 입학해서 공부해야 하는데, 올해 1학년 다녔으면 내년에 2학년 됐을 텐데 하고 말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 살았나 싶어요. 큰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 책받침에 구구단이 있더라고요. 애한테 물어봐서 구구단을 5단까지 겨우 외웠어요. 그 뒤부터는 도통 외워지지도 않았고요. 5단까지 외운 거, 그걸로 평생 계산하며 살았어요. 학교를 못 다닌 건 집 형편이 안 좋아서 그랬죠.


우리 집에 원래 열세 식구가 살았어요. 사람이 많으니 농사를 지어도 쌀이 모자라요. 봄이면 칡을 캐서 먹고, 나물 뜯어다 먹고, 죽 만들어서 먹고, 그러다가 나 배곯지 말라고 어른들이 열일곱 살에 결혼시켰어요. 이웃 마을에 살던 남편은 열일곱, 저랑 동갑인 남자였어요. 남편이 6년 전에 사고로 죽었는데, 그때까지 사이가 참 좋았답니다. 시부모님 모시면서 둘이 함께 혼나고, 일이 안 풀릴 때 같이 힘도 내고 의지하면서 살았어요. 그래서 남편이 죽었을 때 우울증이 왔어요.

남편은 나하고 결혼할 때 광업소에서 석탄 옮기는 차의 운전 조수로 일했어요. 저는 열여덟에 첫 딸을 낳고 살림을 하다가 스물두 살 때 거마 광업소 선탄부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또래 중에서 광산에 안 다니는 여자들이 없었어요. 결혼 안 한 여자들도, 결혼한 여자들도 다녔기 때문에 부끄럽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일은 힘들더라고요. 탄 고르는 작업도 작업인데, 삽질을 엄청나게 해야 하거든요.

근데 제가 그때부터 손이 차고, 저리고, 아팠어요. 그때는 추위를 많이 타는 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레이노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이에요. 아픈 건 무지 아픈데, 약이 없어요. 일 다녀오면 손이 저려서 잠을 못 잘 정도였어요. 그래도 부지런히 다녀서 살림에 보탰죠. 그때 일 끝나고 나면 탄 덩이를 하나씩 품에 넣고 왔어요. 탄을 발라서 나무를 떼면 방이 절절 끓었거든요.

참, 어제는 서울 고려대병원에서 난청 검사받으라는 연락이 왔더라고요. 태백 병원에서 난청 검사를 세 번 받았는데 난청이 확인됐나 봐요. 서울 병원에 가서 마지막 확인을 해야 해요. 귀는 선탄부 일했을 때부터 안 좋아진 거죠. 난장에서 귀마개도 없이 모터 돌아가는 소리, 마끼(권양기) 소리 들으면서 일했는데 엄청 시끄러웠어요.

그래도 어려운 거 참고 부부가 같이 돈을 버니까 그제야 좀 살림이 나아지는 듯했어요. 그때 남편 월급은 쌀 한 가마니였어요. 쌀 한 가마 가져오면 우리 가족 먹을 것만 남기고 다 팔아요. 그땐 다 외상으로 사니까 그 돈으로 외상 빚 갚는 거죠. 한 번도 넉넉했던 적은 없어요. 집안 제사가 1년에 네 번이에요. 거기다 시부모님 생신, 가족 생일 꼬박꼬박 챙기고 명절 준비하고, 벌초하려면 정말 끝도 없이 돈이 들어요. 그래서 이집 저집 돈도 참 많이 빌렸네요. 그래도 한 번도 안 떼먹고 성실하게 사니 다들 잘 도와줬어요. 도와주신 돈으로 살았죠.

우리 아들은 스물여섯에 낳았어요. 큰 애를 열여덟에 낳았으니 8년 동안 애를 못 낳은 거죠. 집안에서는 죽을 죄인이 됐어요. 제가 애를 못 낳으니까 시아버지가 우리 남편을 새로 장가보낸다고 했어요. 우리 집안에선 시아버지가 왕이에요. 남편도 시아버지한테 벌벌 떨어요. 우리 부부가 집에서 쫓겨나서 교회 담 밑에 주저앉아 같이 울고 그랬어요. 상황이 이러니까 남편이 나가서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말을 못 해요. 오죽하면 젊은 이웃 사람들이 나보고 집 버리고 도망가래요. 그래도 첫딸이 눈에 밟혀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땐 집안 여자들이 다 불쌍했어요. 우리 시어머니는 한 달에 20일을 맞고 살았고요. 말한다고 때리고, 말 안 한다고 때리고. 제가 우리 어머니가 너무 불쌍해서 밤새 시아버지 말동무를 했어요. 나하고 밤새 말하고 있으면 어머니를 안 때리니까요. 새벽 2, 3시쯤 돼서 아버님 인제 그만 주무시고, 내일 노시라고 하면 저보고 죽으라 한다며 화를 냈어요.


월급관리도 다 시아버지가 하셨어요. 남편이 월급을 받으면 그대로 아버님께 가져갔어요. 그 자리에서 돈을 딱 세보고 ‘수고했다’ 한마디 하세요. 그리고 저한테 생활비를 떼어서 얼마간 주신 다음 ‘알뜰히 써라’ 한마디 하시고요. 시아버지가 79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에 통장을 쥐여주시더라고요. 저는 아버지님한테, 온갖 험악한 얘기를 많이 들어온 터라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 안 날 줄 알았는데 통장 받고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이제야 며느리로 인정받는구나 싶었어요.

아무튼 둘째를 낳고 한 5개월 정도 아이를 돌보다가 시어머니한테 맡기고 다시 일했어요. 그때는 선탄은 아니고 감 장사였어요. 선탄부 일을 하면서 다치는 사람, 죽는 사람 보니까 다시 갈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요. 저도 거기서 발목을 한번 삐끗했고, 아는 형님도 그때 손을 다쳐서, 손을 못 쓰게 됐거든요. 감 장사를 8년 했어요. 여기 감나무가 많은데, 감을 삭혀서 홍시를 만들어 통리로 넘어가서 팔았죠.

참 억척같이 살았어요. 셋째, 넷째 낳으면서도 일을 쉬지 않았어요. 집안 형편도 그렇고, 시부모님을 35년 모셨는데 어디 간다고 이야기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딱 한 번 계 모임에서 갔던 온양온천 여행이 첫 여행이었죠. 거짓말을 하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울산에 친구 한 명이 있는데, 그 친구가 그 지역에 먹고살 만한 게 있다고 해서 거기 좀 알아보러 다녀오겠다고 거짓말을 해 1박 2일 시간을 뺐던 게 기억나요. 어른들 돌아가시고는 실컷 다녔죠. 예전에 광부들을 보고 ‘두 하늘을 덮어쓴다’고 했어요. 갱내가 또 다른 하늘이라는 거예요. 나는 세 하늘쯤 덮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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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곤드레 만드레

    지연님 남동생이 세발 자전거 타고 내일도 또 오려나

  • 스케이트 소원 푼 인간

    우와, 감 장사를 하셨네요. 나도 중학생 때 10대 후반 때 해봤는데요. 전 우려서

  • 문경락

    말씀이 시가 되어 살아나는 삶을 살고 계십니다........늘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