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구치소로 진숙이 언니가 왔다.

[기고] 김진숙의 복직, 350대의 희망차

진숙이 언니가 왔다.

내가 5507번으로 사형수와 같은 빨간 이름표를 달고, 국가보안법 사범으로 0.7평 독방에 격리되어 특별보호를 받던 1990년, 주례 구치소로 진숙이 언니가 왔다.

나는 1층 오른쪽 끝 방이었는데, 언니는 2층 왼쪽 끝 방으로 배정됐다. 언니가 배정된 방은 여덟 명이 함께 쓰는 합사 방이었다. 그 방에 빨간 이름표를 단 5010번 사형수가 있었는데 사형이 확정 됐다는 이유로 24시간 수갑을 채워놓고 있었다.

언니는 구치소에 들어오자마자 5010번 수갑을 풀어주라고 강하게 항의했고, 운동도 면회도 변호사 접견도 다 안 되는 징벌방에 손발 다 묶인 채로 던져졌다. 말 그대로 던져졌다. 많이 맞기도 했다. 그때 학부 출신들은 아무도 맞지는 않았는데 노동자라서 좀 심하게 대하나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니는 정말 대차게 싸웠다. 교도관들이 겁이 날 정도로 무서운 눈을 하고 있었기에 감당할 수 없어서 때린 것 같기도 하다. 그 이후에도 많이 맞고, 징벌방에도 여러 번 들어갔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꼭 개선을 시킨다.

구치소 측과는 무섭게 싸우면서도 동지들에게는, 또 재소자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했다.
어느 날 구치소 소지가 언니가 보낸 편지를 전해주고 갔다. 볼펜도 종이도 방안에 들일 수 없는 그 곳에서 언니는 내게 어떻게 편지를 썼을까? 감방에서 감방으로 이렇게 긴 글을 받아 본 사람은 아마 내가 처음이었으리라. 우유 곽 안쪽 은박지에 빈틈없이 꽉꽉 채운 편지를 언니는 자주 보내왔다. 그 편지를 보면서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본 그 어떤 글보다 너무 좋다고. 좋은 시절 만나서 문학을 업으로 삼았다면 훌륭한 작가가 되었을 거라고. 이 은박지 편지는 집 대청소한다고 가족 중 한사람이 버렸다. 이중섭 은박지 그림보다 더 귀한 예술품을.

“미경아! 잘 자라!”

저녁 점호를 다 마치고 좀 쓸쓸한 기분이 드는 해질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언젠가부터 전체 여사를 울렸다. ‘그래, 나는 5507번이 아니라 미경이지.’ 미경아 잘 자라, 언니가 목소리를 높일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다들 마음속으로 그리운 이들 이름을 불렀으리라. 혹은 자기 이름을….

은박지 편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편지를 전해준 소지가 생각난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회장님과 엮여 들어왔는데 죄수복을 입어도 너무 예쁜 사람이었다. 그 소지가 출감 이후 언니가 일하는 단체 사무실로 찾아왔단다. 정장 차림의 보디가드 몇 명이랑. 언니가 하는 일을 금전으로 지원해주고 싶다고. 언니가 고맙지만 괜찮다고 하니 그럴 줄 알았다면서 엄청 큰 다이아 반지를 급할 때 쓰라고 주더란다. 언니는 그것도 돌려줬다는데 그 예쁜 소지 언니는 진숙언니에게 언제든 한번은 크게 도와주고 싶다고 명함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갔단다. 나는 그 예쁜 소지 마음에 진숙 언니가 무엇을 던진 지 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을 늘 챙기는 따뜻한 사람, 그것도 거침없이, 자기 몸 하나 안 챙기는 제대로 된 사람 하나를 알아봤던 거다.

긴 세월 언니를 만나지 못했다. 2011년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309일, 그 기간에도 나는 겨우 한번 언니를 찾아갔다. 내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출처: 노동과 세계]

“언니한테 부끄러워서 찾아오기가 힘들었어요.”

“무슨 소리고? 니가 행복하면 된다. 행복하게 살어!”

언니가 항암전을 하느라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2019년. 가끔 만나 온천천을 함께 걷고 병원도 함께 갔다. 암에 대해 나름 공부도 했다. 항암전을 하려면 언니가 부산을 떠나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많은 걸 잊고 이제 좋은 공기 마시며, 마음 편히 살아야 항암전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갈 곳도 알아봤다. 영경 언니는 갑사를, 정향 언니는 옥천 청산에 있어도 된다고, 그래야만 된다고 했다. 언니한테 몇 번 이야기를 했더니 조금 수긍하는 듯 하다가도 늘 결론은 ‘부산을 떠날 수 없다’였다. 부산을 떠나면 마음이 편치 않단다.

‘처자식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죽고 못 사는 연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부산을 와 못 떠나는데요?’ 몇 번이나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온천천을 같이 걷는데도 언니는 늘 대구 영남대 병원 박문진 위원장 걱정, 마사회에서 자살한 문중원 기수와 기수 가족 걱정, 고공 농성중인 삼성 노동자 걱정, 늘 걱정이다.

‘저리 늘 걱정인데, 우예 몸이 좋아지겠노?’ 또 속으로만 생각한다,

검색도 안 되는 5년도 더 된 휴대폰을 들고, 부산 구포에서 영남대 병원까지 또 혼자서 걷겠단다. 비바람이 불면 옥상 천막이랑 박문진 위원장이 함께 날아갈까 봐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온단다. 대구까지 걸으면서 언니는 많이 밝아졌다. 역시 언니는 사람들과 연대할 때 제일 행복해 보인다. 그 아픈 몸으로 거사를 마쳤으니 이제 좀 쉬겠지, 했더니 언니가 말한다.

“이제 내 복직 투쟁을 해야겠어. 늘 마지막으로 미뤘던 내 복직, 한 번도 잊지 못했던 내 복직 투쟁을!”

언니 복직만 빼고 단체 협상이 끝났을 때, 언니 복직만 늘 안됐을 때, 다른 동지 복직을 환히 웃으며 축하 해주고 집으로 돌아간 밤에 혼자서 어땠을까? 그 지독한 밤을 어떻게 누그러뜨렸을까?

유방암이 재발되어 수술한 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이제 또 다른 암 수술을 의사랑 의논해야 한다. 이런저런 일정을 생각하고 맞추다 보면 수술은 또 한참 미뤄질지 모르겠다.

언니는 꼭 복직을 해야 한다. 한진중공업에 일 분 일 초를 다니더라도 한진 노동자로 발을 디뎌야한다. 그 발걸음은 고 박창수, 고 김주익, 고 곽재규, 고 최강서 열사들이랑 함께 내딛는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그 발걸음에 함께 하기 위해 12월 19일 다시 350대의 희망차들이 부산으로 온다고 한다. 모두 같은 마음들일게다.




12/19 부산 한진중공업으로!
전국 350대 김진숙 복직 드라이브스루 희망차 참가 신청 링크: https://bit.ly/김진숙희망차참가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미경(1991년 김진숙 감옥 동기)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참세상 독자

    90년! 아 30년짼가보네요. 송경동 시인님이랑 가셔야지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하고 잘 어울려지면 바랄나위도 없겠지요. 김진숙분은 머리가 좋고 똑똑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만 있다가 혼자 불쑥 터뜨립니다. 다른 분들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언론만 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진숙분의 지난 날들을 봐서는 공장으로 가지 않을 것 같은데 공장으로 갔네요. 단체들하고 잘 맞지 않아서 그런지, 공장 위주라서, 개혁 위주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본기사 내용은 별로지만 김진숙분은 이미경분의 마음 안에 있어서 좋겠습니다. 서로 의지가 될 때는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