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이 복직하겠다던 날, 참 많이 울었습니다”

[김진숙 쾌유와 복직으로 가는 희망버스] 단식 중인 정홍형 리멤버 희망버스 집행위원장을 만나다

사람들이 간이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다. 담요 한 장 의자에 깔아둔 것이 방한의 전부였다. 비닐 한 장 들어갈 때마다 경찰과 어떤 실랑이를 하는지를 들었다. 여기까지가 청와대가 ‘허락한’ 인권이었다.

추위도 냉대도 막아줄 것 없는 청와대 앞 농성장에 내가 인터뷰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정홍형. 당시에도 곡기를 끊은 지 스무날이 넘었다. 지칠 만도 한데 단단해 보였다. 자기소개를 부탁하자, 자신을 “20년 동안 노동조합에서 상근 활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라 한다. 공식 직책은 민주노총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수석부지부장. 현재는 리멤버 희망버스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정홍영 위원장 [출처: 희정]

밥 굶는 일을 밥 먹듯

그에게 이야기를 듣던 도중 물었다.
“이번이 처음하는 단식은 아니시지요?”
아무래도 그런 듯해서.
“단식이야 밥 먹듯이 했지요.”

밥 굶는 일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이라. 이런 삶으로 진입한 것은 스무 살 때부터다. 대학 때부터 소위 ‘운동’이라는 것을 하다가 감옥에 갔다.

“85년도에 5.18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투쟁하다가 들어가게 돼서 다음 해 출소했어요. 공장에 들어갔다가, 양쪽 귀에 중이염을 앓으면서 급격히 안 좋아져 현장 생활을 하기 어렵게 되고. 부산에 내려와 89년도에 부산노동자연합(부노련)에 들어갔는데, 그때 의장이 김진숙 지도위원이었어요. 거기서부터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자신이 만난 젊은 시절 김진숙을 말해준다. 알려진 대로 카리스마와 의리가 있는 사람. 그런데다가 노력파다. 글 한 줄 허투루 쓰지 않는다고 했다. 허튼 글을 쓰지 않아 사달이 났다. 김진숙은 어용노조를 비판한 유인물을 쓴 혐의를 받고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그 길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와 만났을 때 이미 해고 3년 차 노동자였다.

전노협 시절 만난 두 사람은 1995년 민주노총 출범 이후, 한 이는 민주노총 상근 활동가로 다른 이는 민주노총 지도위원으로 나란히 그러나 조금은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 시간이 30년이다.

그 시간동안 그는 자신이 본 김진숙의 해고 투쟁을 이야기한다. “그 시절 중공업 경비들은 거의 폭력배 수준”이었고, 김진숙은 그 앞에서 시위를 하며 “육탄전을 벌였다”. 잘 싸웠단다. “발차기도 막 하고 그랬어요.” 그래봤자 저쪽이 다수다. 김진숙도 다른 해고자들도 많이 다쳤다.

이런 일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인생에서 보자면 귀여운 수준의 에피소드다. 징역 2번, 수배생활 5년, 그리고 91년과 2003년에 동료를 잃어버리는 일까지. 그 시절은 정홍형 씨에게도 무거운 기억이다.

김진숙은 안 된다

2002년 한진중공업은 ‘인력체질개선작업’이라는 이름으로 650명을 정리해고한다. 이를 반대하던 지회(노조)엔 7억 원의 손배가압류가 걸렸다. 지회장 김주익이 크레인에서 목숨을 끊었다. 농성 129일 만이었다. “6백에서 7백으로 움직이던 대오(조합원)들이 당시엔 100명도 안 남아 있던 상태”였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어 조합원 곽재규도 투신한다. 당시 정홍형은 수배 상태라 크레인 아래서 머물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시신을 수습했다.

  김주익 열사(왼쪽), 곽재규 열사(오른쪽)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사람 둘이 죽어나가자 궁지에 몰린 회사는 정리해고 계획을 철회한다. 노동조합과 교섭을 하고, 1986년 이후 해고된 9명의 복직까지 이뤄진다. 다만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노동조합 요구가 100개 있다면 아흔 아홉 개가 다 해결됐어요. 딱 하나 남은 것이 김진숙 복직.”


회사는 김진숙만은 안 된다는 것이 재계의 요구라고 했다. 당시 그는 열사대책위 집행위원장이었다. 노조에겐 두 가지 선택 길이 있었다. 99개 안에 동의한다는 회사 안을 받을 것인가. 김진숙 복직을 요구하며 교섭을(어쩌면 싸움을) 지속할 것인가.

전자를 택했다. 그는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지금 상황이 이래 되었습니다 하니, 김 지도위원이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 마무리하십시오. 그렇게 이야기한 거죠.”


복직을 기다리는 9명을 붙잡고 더 싸워보자 말할 순 없었으니까.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이 사건은 어떻게 기억될까. 이때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차마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없다. 내 앞에 있는 정홍형에게 이 결정은 후회로 남았다.

“제 일생일대의 오류였어요. 저 자신으로서는 그 오류를 이제야 바로 세우는 거지요.”


어떤 선택이나 사건은 시간이 흘러도 옛일이 되지 않는다. 20년 전 일이다. 그동안 김진숙은 자신이 한진중공업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그는 그날의 선택을 잊지 않았다.

지나간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향해 달려야 한다. 인생은 뒤돌아 갈 수 없으니까. 그는 2월 7일이라는 앞만 바라본다고 했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뚜벅이들이 청와대에 도착하는 날이다.

“버티자. 2월 7일까지만 버티자. 그 생각만 합니다.”


내 발로 걸어 나오고 싶다

타인의 복직이 자신의 숙원 사업이 된 사람이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나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 말과 글들을 찾아보았다. 이 문장에 줄을 그었다.

“하루를 일하더라도 내 발로 걸어 나오고 싶다.”

그 애절한 말 옆에 글자 하나를 썼다. ‘왜.’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하루짜리 복직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겨울 벌판을 걷는 이의 마음을, 타인의 복직을 위해 자신의 목숨 줄 일부를 잘라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단식이 무엇인지 잘 모르나 몸을 망가트리는 일임은 안다. 땀과 눈물을 다 뽑아내도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 살을 내놓고 피를 말리고 장기를 태워낸다. 2월 7일만을 바라본다고 했다. 그날이면 단식 48일 차다.

왜 그렇게까지. 그를 만난 날 ‘왜?’를 묻고 싶었다. 묻고 싶어 달싹거리는 입을 닫아 물었다. 버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앞에서 왜 버티는지를 묻는 것은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하지만 결국 며칠 뒤, 다시 농성장을 찾았다.

그 마음을 어떻게 아느냐고

두 번째 만남. 며칠 사이 그의 안색이 더 좋지 않다. 전날 쌓인 눈을 치우다 보니 혈압이 올라갔다는 말을 옆에서 주워듣는다. 수치를 듣고 있자니, 뭐 그리 대단한 것을 묻겠다고 29일을 굶은 사람에게 말을 시키려 왔나 후회가 됐다. 질문도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왜?’는 나의 마음이지, 질문이 아니었다.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다가, 그래도 왔으니 슬그머니 그의 옆에 앉았다.
“저기, 집행위원장님.”

용기 내어 입을 연 순간, 타이밍이 안 좋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검진 받을 시간임을 알렸다. 단식자들 몸 상태를 살피기 위해 한의사 선생님이 온 것이다. “같이 가시죠” 이 말에 얼떨결에 동행을 했고, 내가 간 곳은 임시로 마련한 단식자들의 숙소였다.

작은 방에 이층 침대가 놓였다. 그가 자리에 눕자 한의사가 몸 곳곳을 누르며 통증을 느끼는 정도를 체크한다. 어딜 누르든 외마디 신음이 터진다. “아. 왜 이렇게 아프지?”

의사는 말조차 많이 하지 말랬는데, 누운 상태로 그는 인터뷰를 이어간다. 귀하게 얻은 시간이다. 하지만 보답은 고사하고, 나는 이상한 질문을 했다. 복직을 염원하는 김진숙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도리어 그에게 물은 것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아느냐고.

“해고되신 적이 없으시잖아요. 그런데 그 마음을 어떻게 아나요?”

버티는 일이란

그는 나의 우문에 다소 당연한 말로 답을 하기 시작했다.
“해고가 얼마나 삶을 파괴하고 일상을 파괴하는지. 너무 잘 아는 거죠.”

  농성장에서 정홍형 위원장 [출처: 송경동]

노동조합 활동가인 그는 해고자를 보는 일도 ‘밥 먹듯이’ 한다. 너무 잘 아는 일을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

“작년 일인데, 해고된 두 사람이 대법원까지 가서 3년 만에 복직 판정을 받았어요. 회사가 이 사람들을 공장에 안 넣어주는 거예요. 회사 인근 스터디 카페로 출근을 시킨 거예요. 그 길로 이 사람들이 저희(노동조합)를 찾아온 거죠.”


어처구니없지만 세상에 없는 일도 아니다. 긴 법정 공방 끝에 부당해고 판정을 받고도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 이야기는 흔하다.

“그 3년 동안 뭐 했냐 하니까. 조그마한 회사에 들어가서 생계를 해결하면서 원래 회사에 들어올 생각만 하고 끝까지 버텼다는 겁니다.”


버텼다. 그렇게 버틴다. 잘린 사람이 해고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버티는’ 일이다. 생계를 위해 다른 임시 알바를 전전하는 것도, 법정 싸움을 위해 각종 증거와 자료를 모으는 것도, 자책하지 않는 것도, 동료를 미워하지 않는 것도, 매일 회사 정문에 가서 경비들과 육탄전을 벌이는 것도 버티는 과정이다. 김진숙이 자신의 문제가 아닌 다른 노동자들의 사안에 손을 잡고 싸운 것도, 어떤 버팀이 아니었을까.

‘왜’를 묻고자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버티는지’를 묻지 못하는 까닭은, 버티는 행위가 갖는 치열함에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치열함이 만들어낸 희생과 그것이 지나간 후 오는 회한의 감정을 말해 달라 요구할 순 없다. 다만 그에게 기억에 남는 해고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냐고

“다 기억이 나지요. 그중에 91년도에 병영 특례 해고자 28명이 있었어요. 방산업체. 총 만드는 회사였는데, 당시에는 대우정밀이었어요. 노조가 임금단체 협상을 하는데, 정말 육해공군이 다 들어오듯. 회사 안에 호수가 있는데 보트 타고 경찰이 들어오고. 헬리콥터 뜨고 산에서 전경들 내려오고 동지들 다 끌려가고 이러면서. 이 친구들 해고가 제일 기억에 남죠.”


기억에 남는 까닭은 거센 탄압 때문만은 아니다.

“그중에 조수원이라 있어요. 민주당사(서울지부)에서 목을 맨 친구거든요. 결국은 자기가 죽음으로써 나머지 해고자들을 복직시킨 거죠.”


조수원. 그를 찾아보니 28세에 목숨을 잃었다. 해고된 지 4년째였다. “그때 저도 나이가 상당히 젊었거든요. 다들 20대. 그 친구들이 수배됐어요.” 해고 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수배가 되어 집에 가지 못하고 경찰 눈을 피해 전전하고, 한 달 넘게 단식을 하고 농성을 하고, 동료가 죽은 후에는 시신이 탈취될까봐 장례식장을 지키고.

그 순간들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니 어떻게 해고된 이의 마음을 모를 수 있겠냐고 했다.

참 몰랐구나

복직해서 자신과 같이 늙어가는 사람, 회사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 어렵게 들어갔으나 사직서를 쓰고 나온 사람.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같이 싸운 사람이 많다는 소리다. “치열하게 살아오셨네요.” 내 말에 끄덕이던 그가 문득 전혀 다른 톤으로 가족 이야기를 한다. 딸과 1년만이라도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했다. 젊은 시절을 거리와 농성장에서 보냈다. 그의 젊은 시절은 자녀들의 ‘어린’ 시절이기도 했다.

오롯이 굶어 2월 7일을 맞이해도, 김진숙 지도위원이 복직을 해도, 그가 지나온 시간마다 남겨둔 회한들이 말끔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함께 해고 투쟁했던 이의 죽음이 사라질리 없고, 지난 날 과오라 부르는 일조차 말끔해질 리 없다. 어떤 의미론 다른 후회를 남길 수 있는 행보다. 그럼에도 그는 단식을 선택했다.

  단식농성장 풍경 [출처: 희정]

내가 그에게 단식이 처음은 아니지 않느냐고 물은 것은, 밥 먹듯 하는 단식투쟁 대한 경외심 때문이 아니었다. 실은 수차례를 해온 단식이라 절박함이 덜 하진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사람들은 왜 (버티는지)를 묻고 절박함을 들으려 한다. 반면 나는 왜?를 물으면서 절박함을 의심하는 몹쓸 사람이었다.

하지만 치열함과 회한으로 점철된 세월이 그에게 듣는 귀를 주었다. 그는 타인의 절박함을 듣는 사람이었다.

“2003년도 김진숙은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지도위원이 가진 절박함을 별로 못 느꼈어요. 왜냐하면 김 지도는 언제나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왔기에, 그게 당연했기에.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절실함이 있는 줄은 몰랐죠. 309일 동안 농성을 할 때도, 우리는 김 지도가 정리해고 된 후배들을 위해서 투쟁하고 희생하는 거라고만 본 거죠. 지나고 나서 보니까 아무도 김 지도에게 ‘복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해준 사람이 없었던 거죠. 속 깊게 생각하는 게 정말 부족했던.

그런데 어느 날 저한테 밥을 먹자 하더라고요. 자신은 복직을 해야겠다고 하는 말을 들으며, 그날 제가 참 많이 울었습니다. 참 몰랐구나. 그런 마음을 정말 몰랐구나.”


그는 노조를 찾아갔고 회사와 협상을 했으나, 우리가 아는 대로 다시 희망버스를 찾았고 청와대 앞까지 왔다. 꿈쩍 않는 산업은행과 한진중공업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하진 않으련다. 다만 김진숙 지도위원의 말을 가져온다.

“저는 한진 중공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수백 명도 아니고 단 한 명인데. 이해할 수 없다가도, 그러니까 사람이 넷이나 죽었지. 그러니까 크레인에 309일을 매달려 있었지.” (2021년 1월 21일 국회 토론회 발언 중)

매각을 앞두고 있는, 자신들이 얻을 이익에 과연 0이라는 숫자가 몇이나 붙을 것인가 골몰하는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염원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심지어 이 복직이 상징하는 것이 ‘부당한 일은 언제건 바로 잡힌다’라면 더욱 그렇다. 부당함이 있어야 그들 손에 쥔 0이 늘어난다.

버티어내는 시간 옆에

그의 말이 끝나가는데도, 나는 여전히 타인의 절실함을 짐작하진 못했다. 그처럼 옆에 있고, 함께 굶고, 같이 쫓겨 다닌 시간이 없어 “어떻게 모를 수 있습니까?”라고 하지 못한다.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을 뒤로하고 희망버스를 찾아 올라오는 심정은 절박했다고 했다. 절망스럽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김진숙 복직이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전망과 조직‧단결이라는 거창한 말을 뒤로 하고 ‘함께’를 말한다. “함께 위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루만지고, 서로의 기둥이 되어주는 과정”을 줄 것이라 한다.

  인터뷰를 하는 단식자들 [출처: 김소연]

발차기도 하고 잘 싸웠다는 그 출근 투쟁, 김진숙 지도위원은 실은 무서워 꿈에서조차 울었다고 했다. 그래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했던 건 오로지 그들이 거기 오기 때문이었다.”(소금꽃나무, 2007)

함께해야 아는 것이 있다. 입술 달싹거리는 것도 힘에 겨운 사람을 두 번이나 찾아가 들은 이야기가 결국 이것이다. 그들이 오기 때문에 간다. 누군가의 절실함은 묻는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버티어내는 누군가의 시간을 함께할 때, “어떻게 모를 수 있습니까?” 하게 된다. 바로 정홍형, 그 사람처럼.

오늘(26일)로 단식 36일째다. 2월 7일까지 열사흘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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