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녹색 물결이 만든 임신중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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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피디아]

지난 1월 15일, 22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임신중지 접근권(Acceso a la interrupcio′n voluntaria del embarazo)’ 법안이 아르헨티나 관보에 게재됐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임신 14주까지의 임신중지를 법률로 보장하게 됐다. 2018년 6월 하원에서 통과된 관련 법안은 상원에서 부결됐으나, 지난해 11월 취임 1주년을 앞둔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새로운 법안을 발의해 후보 시절 공약을 이행했다. 2003년부터 일렁이기 시작한 ‘녹색 물결’은 2018년 높은 파고를 일으키며 결국 새로운 지형을 그렸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2019년 임신중지를 형사 처벌토록 한 형법 규정에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지난 2020년 12월 31일 해당 조항이 폐지됐다. 헌재 판결 이후, 임신중지 처벌 조항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저지하며 첫 번째 결승점은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낙태죄의 소멸은 긴 투쟁의 결승점이자 새로운 싸움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 같은 점에서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법안은 ‘낙태죄’ 폐지 이후의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접근권의 주체는 여성이 아닌 ‘임신한 자’

제1조(목적) 이 법은 여성 및 기타 성 정체성을 가진 임신 가능한 자의 인권과 공중보건에 대한 아르헨티나 정부의 책무를 수행하고 예방 가능한 질병률과 사망률 감소에 기여하기 위해 임신중지와 임신중절 이후의 의료적 처치에 대한 접근권을 법제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임신중지 접근권 법안 제1조는, 이 법의 적용을 받는 집단을 ‘여성’으로 특정하지 않는다. 여성과 함께, ‘여성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임신 가능한 자’를 명시함으로써 임신중지가 성 정체성과 무관하게 모든 임신한 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라는 점을 적확하게 표현한다. 이를 통해 흔히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개념으로 옹호되는 임신 중단의 권리를 모든 임부의 권리로 확장하며, 임신한 자가 곧 여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폐기한다.

이처럼 법률이 젠더 이분법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2012년 제정된 ‘성 정체성 법안(Ley de Identidad de ge′nero)’에서 비롯한다.

이 법안은 개인 스스로 인지하는 성 정체성을 법적으로 인정받고, 해당 성 정체성에 따라 인격을 발달 시켜 나갈 자유와 주민등록에서 성별을 개정할 자유를 보장한다. 다시 말해 아르헨티나에서는 다양한 성의 존재가 법률적으로, 제도적으로 확립돼 있다. 개인이 약물 혹은 수술을 통해 신체 기능에 변화를 줄 수 있으며, 신체 기능과 성 정체성을 도식적으로 일치시킬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과 ‘임부’의 동일시는 아르헨티나 법률 체계에서 성립할 수 없다.

200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는 젠더 이분법에 기초한 법률체제를 꾸준히 수정해나가고 있다. 2010년 민법 개정으로 결혼에 대한 정의가 바뀐 것이 그 시작이었다. ‘남성과 여성 간의’ 동의에 기반했던 결혼은 현재 ‘두 명의 당사자 간의’ 동의로 성립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법률 개정은 젠더 이분법과 함께 성 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폐지하는 흐름이다. 한편에선 이런 흐름을 최근의 경향으로 여기지만, 그 원류는 이미 오래전 대부분의 국가가 동의한 사회적 가치이자 법률적 원리에서 발견된다. 인권에 다름이 아니다.

임신중지 접근권의 법률적 근거는 인권이다

임신중지 접근권 법안 제3조는 다른 법령들과의 관계를 기술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다른 법령들은 아르헨티나 국내법이 아닌, 아르헨티나 정부가 조인한 국제 인권 협약들이다. 세계인권선언, 미주 인권협약,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1979년 유엔 채택),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1966년 유엔 채택) 등 성과 재생산 권리, 존엄성, 생명, 자율성, 건강, 성 정체성 등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협약의 범위 안에 임신중지 접근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명시한다.

이와 같은 내용의 제3조가 삽입된 이유는 1994년 개정된 아르헨티나 헌법 제75조 22항 때문이다. 이 조항에서는 인권에 관한 국제협약에 헌법과 동일한 위상을 부여했다. 오랜 독재와 인권탄압의 역사를 경험한 아르헨티나 사회가 마련한 하나의 장치였다. 즉 제3조는 임신중지 접근권이 상위법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명시하는데, 상위법의 핵심은 국제협약에서 보장하는 인권이다. 한국도 앞선 대부분의 국제협약에 가입돼 있으나, 국제협약 비준과 국내법의 불일치가 법률적으로 문제 되지 않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1921년 만들어진 형법상 낙태 처벌 조항이 한 세기 동안 유지된 배경에는 아르헨티나의 강력한 가톨릭 세력이 있다. 정치적 보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톨릭교회는 ‘생명’의 가치를 주장하며 임신중지에 반대해왔다. 그러나 임신중지 접근권의 보장으로 ‘종교적 의미의 생명’은 비로소 ‘법률적 의미의 생명’으로 온전히 전환됐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아르헨티나 사회는 ‘세속화’에 한 발 더 다가섰다.

임신중지는 건강을 위한 의료서비스이며 보험적용대상이다

제5조(건강권) 임신한 자는 모두 보건의료 서비스 시스템 내에서 임신중지권을 갖는다. 임신중지를 요청한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본 법안과 관계 법령에서 정한 바에 따라 임신을 중지할 수 있다.

제5조에 따라 의료인은 임신중지와 사후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특히 이 조항은 의료인이 가져야 하는 존중의 태도와 제공해야 하는 정보를 규정한다. 또한 제3자의 개입을 막기 위해 비밀유지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임신중지가 보건의료 시스템이 보장하는 의료행위가 됨으로써 제12조에서는 “진단비, 의약품, 심리지원 서비스”를 포함해 임신중지와 관련된 모든 의료서비스가 전액 건강보험 대상이라는 사실을 적고 있다. ‘합법적이고 안전한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는 무료 낙태 시술’을 요구했던 아르헨티나 페미니스트의 녹색 물결이 이로써 현실화했다.

의료인에게는 진료거부권이 있다

제10조(진료거부) 임신중절을 직접적으로 시행하는 전문의료인에게는 진료거부권이 있다.

다만 제10조와 제11조는 임신중절 시술에 동의하지 않는 전문의료인의 진료거부권을 인정한다. 의료인은 소속기관에 상관없이 진료를 거부할 수 있다. 다만 임신한 자의 생명과 건강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진료를 거부할 수 없다. 특히 의사가 진료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 해당 의료기관은 진료 의뢰인을 유사 기관으로 인도해 임신중지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이는 의사의 진료거부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한발 물러선 법안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직접’ 시술하는 의사에게만 진료거부를 허용해 약사의 경우 진료거부를 할 수 없도록 했다. 또한, 개별 의사가 진료거부권을 행사해도 임신중지권의 침해를 막기 위해 의료기관의 책임을 별도의 조항에 명시하고 있어 이 법안의 목적과 취지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조항은 아니다.

가치에서 법으로, 법에서 가치로

2018년 8월 8일 상원에서 법안이 부결된 후, 행정부 발의 법안으로 2020년 12월 30일 상원을 통과할 때까지 녹색 물결은 멈추지 않았다. 12월 30일 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를 메운 녹색 물결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녹색 물결은 ‘그것은 법이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십여 년 동안 임신중지권의 ‘권리’는 가치의 표현이었으나, 이제 법률적 개념이 됐다. 법이 제정됐다고 해도 임신중지를 향한 사회적 비난에 계속 맞서야 할 테지만, 이제는 그들의 손에는 제도적 무기가 있다. 이 무기로 임신중지권이 법률적 개념으로 소급되지 않도록, 화석화되지 않도록, 또 다른 가치와 권리를 지키기 위한 토대가 되도록 녹색 물결은 계속 흘러야 할 것이고, 흘러갈 것이다. 녹색 물결의 이러한 흐름이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와 어우러지길 기대한다.

* 법조문의 번역은 이해를 돕기 위해 의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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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어느쪽이 생명을 존중하는 것인가? 불가항력적인 태아의 생명과 자아존중권을 외치는 임산부와의 협의는 없는 것인가?....시소위의 법안결정에 울고 웃는 상황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