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기업 거짓 기후정책과 민중적 주체

[녹색 스트라이크]


1988년 6월, 기후학자 제임스 한센은 미국 상원에서 탄소 배출에 따른 온실효과와 지구 온난화 사이의 인과관계를 관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기후변화에 대한 전 지구인의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흥미롭게도 한센 박사의 발언이 있기 두 달 전, 헤이그에 본부를 둔 초국적 화석연료 기업인 셸(Shell)에는 〈온실효과〉라는 제목의 내부 연구용역 결과가 도착했다. 대외비로 분류된 이 보고서는 인간이 배출하는 탄소와 각종 질소 화합물, 메탄 등이 어떻게 온실효과를 가져와 기후변화를 일으키는지, 그리고 이것이 자연환경과 인간, 에너지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비교적 상세한 분석을 담고 있었다.

‘온실효과 워킹그룹’이 5년간의 연구 끝에 내놓은 결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다. 온실효과는 화석연료의 연소를 통한 대기 중 탄소 증가의 결과이며 모델링을 통해 온실효과가 어떻게 해수면 상승, 해류, 강수, 지역별 날씨, 인간 사회와 식량 문제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도 알려준다. 1990년 후반을 지나며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이와 더불어 모니터링을 잘하면 기후변화 이해와 악영향 경감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지구 온난화가 관찰 가능한 시점이 되면 온난화를 되돌리는 것은 물론 상황을 안정시키는 것조차 이미 늦어버릴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기후변화’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당시, 이 보고서는 기후변화에 관한 상당히 깊은 인식을 보여줬다. 연구를 발주한 셸은 보고서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기후변화 대응 작업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해수면 상승과 잦아질 태풍에 대비해 해상 석유 시추 설비를 강화하고 플랫폼도 더 높이 올리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철강, 자동차, 중화학을 포함하는 화석연료 산업의 대형 기업들과 글로벌 기후 연합(Global Climate Coalition)을 만들었다. 이들은 90년대 내내 교토 의정서 등 전 지구적 기후 행동을 반대하고 미국의 참여를 저지하는 활동을 벌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지구환경 보호라는 탈을 쓰고 진행됐다.

이렇게 시작된 그린 워싱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화석연료 기업 중 가장 먼저 녹색 치장에 나섰던 BP는 지난해 2월, ‘2050년 이전에 넷제로 달성’을 선언하며 기후 문제와 환경, 안전 문제를 다루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 문서는 지속가능성, 투명성, 안전 등 온갖 미사여구로 가득했다. 그런데 얼마 전, BP가 지난해 8월 인도양에서 일어난 유조선 대량 기름유출 사건의 배후였음을 폭로하는 내부 문서가 공개됐다. 이 문서에는 사용 연료가 엔진 결함을 유발할 것이라는 등의 심각한 문제 제기에도 BP가 안전점검 없이 항해를 강행하고 선박 연료 조사까지 방해했음을 보여주는 정황들이 담겼다.

이는 화석연료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탄소 중립을 선언하고 하이테크 산업의 녹색 이미지를 만들어왔던 구글과 아마존은 지난해 초, 수 km의 땅을 파 암반층 틈새의 석유나 천연가스를 추출하는 프랙킹 공법을 돕기 위해 화석연료 기업들에 AI 기술을 팔아먹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세계 최대의 자산관리 기업인 블랙록(Blackrock)은 지난해 1월 석탄 부문 투자의 전액 회수를 선언하며, 유럽 그린딜에서 금융기관들을 관리·감독하기 위한 ESG(환경, 사회, 거버넌스) 원칙을 제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지난달, 블랙록이 여전히 850억 달러를 석탄 부문에 투자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회적 지탄이 이어지자, 블랙록은 석탄에 따른 이윤이 전체 이윤의 25% 이상인 기업에서는 투자비 회수를 완료했다며 마치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유럽 국가들은 겉으로나마 녹색 전환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지만, 한국은 이마저도 없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코로나19 위기에도 지난해 경제가 “OECD 국가 중 최고의 성장률”을 보이고 “G20 국가 중 가장 높은 주가 상승률을 기록”했다며 한국 경제의 밝은 전망을 부각했다. 한국판 뉴딜과 관련해서는 ‘기업과의 소통과 협력 강화’와 지역 균형을 말하면서도, ‘지역경제 혁신’을 위한 ‘규제자유특구’와 ‘대규모·초광역 프로젝트’를 정책으로 제시했다. 27분에 달하는 연설 중 2050 탄소 중립 추진계획을 언급한 것은 달랑 “정부는 수소 경제와 저탄소 산업 생태계 육성에 더욱 속도를 내고 세계시장을 선점해 나가겠습니다”라는 문장뿐이었다. 그린뉴딜이나 탄소 중립이 어느새 기업 지원과 같은 뜻의 용어가 돼버린 것이다.

기후 위기 주범들이 기후 위기 해결사로 옷을 갈아입고 정부와 결탁해 녹색 전환을 주도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엄격한 기준 없이 전환을 명분으로 정부 지원이 이뤄지니 이들은 기존 화석연료 사업 이익을 고스란히 챙기면서 새 사업까지 손대며 더 많은 돈을 챙기고 있다. 탄소세니, 배출권거래제니 하는 정책들도 ‘시장 인센티브’를 통해 이루어지다 보니 기업은 그레타 툰베리가 말한 ‘창조적 회계’를 통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한다. 마치 대단한 녹색 전환이 일어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실제로는 기업 이윤만 보장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자동차의 전기차·수소차 판매량이 증가한다지만, 내연 기관차의 판매량이 더 빠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탄소배출 감축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탄소 배출량이 가장 큰 포스코는 정부 시책에 따라 일단 ‘2050 탄소 중립’을 선언하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수소환원제철법을 통해 이를 달성하겠단다. 2040년까지 탄소 배출량 50% 감축과, 그 후 10년간 50%를 더 줄일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계획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은 재벌 기업들의 이런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다.

어쩌다 기후 위기 극복이 재벌을 살려 성장률 수치를 올리는 문제가 돼버렸을까? 일차적으로는 정책의 우선순위를 잘못 잡은 정부의 실패를 짚어야 한다. 이와 함께 기후 운동의 실패와 기층 대중운동의 무관심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류 기후 운동은 ‘모두를 위한 운동’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주체에 대한 고민을 뒤로 미룬 채 정부의 기후 행동 촉구에 초점을 맞추다가, 정부가 그린뉴딜과 탄소 중립을 선포한 이후 혼란을 겪고 있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중운동도 기후 위기가 가지는 파급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이슈를 기후 위기와 연결하는 일에 태만했다. 정부, 국회, 산업계, 그리고 일부 시민사회까지 가세해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친기업적 입장을 명확히 하는 동안 진보적 시민사회는 각개약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기후 운동이 누구의 이해에 복무할 것이며 누가 기후 위기 극복의 주체가 돼야 하는가를 둘러싼 활발한 논쟁과 실천이다. 이 과정에서 일자리를 걱정하는 노동자, 번번이 외면당하는 지역 주민과 농민, ‘사랑과 희생’ 담론 속에 끝없는 부담만 떠맡는 여성, 미래를 빼앗긴 청(소)년, 기후변화로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빈민과 장애인 등 지금껏 에너지 전환의 ‘피해자’ 또는 ‘시혜 대상’이라 여겼던 이들을 운동의 주체로 호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민생위기와 노동권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를 기후 위기를 하나로 묶어 아래로부터 독립적인 민중의 힘을 구축해나가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체제 변화 없이 기후 위기 극복은 없고, 체제변화는 새로운 민중적 주체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후정책이 친기업 성장정책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도 민중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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