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워커스 사전]


왜 ‘일자리’일까? 왜 실업대책, 고용대책, 노동대책이 아니고 일자리 대책일까? ‘노동’은 노동자를 중심으로 바라보게 하지만 일자리는 ‘자리’를 중심으로 사태를 보게 만든다. ‘고용’은 고용주와 피고용의 ‘관계’를 드러내지만, 일자리는 자본과 노동 간의 권력 관계를 삭제한다. ‘실업’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지만 ‘일자리’는 그것을 긍정적인 해결 담론으로 전환한다. 고용정책이나 실업정책에는 임금, 해고, 노동조건, 노동권 등 여러 가지 노동정책에 대한 고려가 함께 수반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정치적 쟁점들이 부각되고 계급적 차이가 드러나며 사회적 논쟁이 따라오게 된다. 그러나 일자리 정책은 ‘노동’을 ‘자리’로 대체함으로써 ‘정치’를 ‘숫자’로 대체한다. 일자리 정책은 자리 정책이지 일(노동) 정책이 아니다.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설치는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핵심 공약이었고, 대통령으로서 첫 번째 업무 지시였다. 일자리위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고용률, 실업률, 취업자 수, 청년취업자 수 등 통계와 주요 지표를 일자리 상황판을 통해 매일 공개하고 있다. 홈페이지 상단에는 “대통령이 매일 일자리 상황을 점검합니다”라고 적혀있다. 한국형 뉴딜 정책에서도 일자리 만들기는 핵심 정책이다. 정부는 왜 이렇게 ‘일자리’에 집착하는 것일까? 물론 해고와 실업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일자리를 새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지금 사라지는 일자리를 지키거나 나쁜 일자리를 개선하는 데는 열정적이지 않은 것일까?

일자리위원회는 ‘일자리는 늘리고, 격차는 줄이고, 고용의 질은 높이고’라는 목표를 내걸고 있지만 실제로 주력하는 것은 일자리의 창출이다. 당장의 성과를 가시화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일자리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숫자는 많은 것을 은폐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창업이 폐업을 숨기듯이 창조된 일자리는 사라진 일자리를 은폐한다. 없어진 일자리(-)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는(+) 것은 수학적으로는 문제를 없어지게(0)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아니다. 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일까? 저런 셈법은 일자리를 ‘공간’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마치 빈자리에 남아도는 노동자를 얼마든지 꽂아 넣을 수 있다고 보는 배치의 관점이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일자리는 자신의 경험이 축적된 익숙한 ‘장소’이자 시간이며, 일자리를 잃는 것은 그곳에서 숙련된 노동과 관계를 잃게 되는 일이다. 장소, 숙련, 관계를 잃는다는 것은 노동자가 동원할 힘과 자원을 잃는 것과 같다. 기업의 입장에서 노동자 A와 노동자 B는 바꿔 쓰는 부품처럼 아무 차이도 없는 존재일지 모르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해고는 자원을 일시에 잃어버리는 일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자본은 노동자들이 시간을 통해 쌓는 그 힘을 무력화하기 위해서, 한 자리에서도 노동자들을 계속 갈아치우는 것일 터이다.

폐업과 해고에 맞선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책 《회사가 사라졌다》(1)에는 자신들을 쫓아내고 폐업해버린 회사를 ‘우리 회사’라고 부르고, 사장이 “당신들 노동은 천 원짜리”라고 모욕해도 자신의 노동에 자부심을 가진 노동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회사에 대한 애정과 노동에 대한 긍지는 노동 착취에 순응해 ‘노예화’됐기 때문에 생겨난 허위의식이 아니다. 노동자는 자신이 만들고 있는 물건(대상)과 감각적이고 직접적 관계를 갖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책임과 노동의 산물에 대한 생산자로서의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상품에 대한 노동자의 감각과 자본가의 감각이 다르듯이 ‘일자리’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자본가나 정부 관리자들이 생각하는 ‘일자리’는 노동자를 집어넣을 빈 공간 같은 것이지만 노동자에게 ‘일자리’는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는 겉옷 같은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일자리는 일터이고 삶터이며 인생의 자리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해고가 되더라도 어디든 찾아 들어갈 수 있게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있는 일자리를 지키고, 더 좋은 일자리로 개선해나가는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4월 ‘코로나19 위기 대응 고용안정 특별대책’을 통해 55만 개의 공공·청년 일자리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2009년 금융위기 당시 이명박 정부의 ‘55만 개 일자리 창출’ 목표와 겹치는 숫자다.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정세균 현 총리는 대부분 인턴이나 공공근로 등 졸속으로 만들어지는 일과성 땜질식 일자리라고 비판하며 필요한 것은 지속가능한 좋은 일자리라고 했다. 지금 55만 개의 일자리는 과연 ‘지속가능한 좋은 일자리’인가?


한국형 뉴딜을 통해 만들어지는 스마트 일자리와 녹색 일자리를 보자. 정부는 지난해 디지털 뉴딜 사업에 1조6천억 원의 예산을 투입했고, 81개의 사업에서 1만2천여 개 기업이 참가해 4만 9천여 명의 인력이 참여했다고 홍보했다.(2) 대체 어떤 일자리일까? 인공지능 학습용 데이터를 구축하는 ‘레이블링(labeling)’은 단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레이블링은 말 그대로 ‘라벨 붙이기’다. AI가 쉽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도록 사진이나 동영상에 나오는 신호등이나 횡단보도, 자동차 같은 사물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박스치고, 이름을 달고, 형태를 나눠주는 작업이다. ‘디지털’이니 ‘스마트’니 하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어도 실제로는 클릭만 반복하는 단순 잡무에 불과한 일이다. 이런 노동의 값은 얼마일까?

한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 플랫폼 업체의 ‘디지털 알바생’ 모집 광고는 클릭 한 번에 30원, 1시간당 예상 작업량 170건, 시간당 5,100원의 소득을 선전하고 있다. 그야말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형 눈 붙이기 작업’이다. IT 강국의 이면에는 ‘크라우드 소싱’ 같은 혁신적 노동 착취의 기술이 있다.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하청업체를 통해 외주화하는 대신, 대중(crowd)에게 외주화(outsourcing)한다는 크라우드 소싱은 ‘대중의 참여’를 기업 활동에 활용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근로계약이 없는 새로운 노동 착취, 시간 착취의 아웃소싱 방식이다. 레이블링이니 크라우드 소싱이니 그럴듯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실은 노동법도, 최저임금도 적용되지 않고 근로감독도 없는, 자신의 스마트 기기를 이용한 신종 가내 부업노동일 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인공지능 학습용 데이터 구축 사업에 참여한 인력 중 62%가 취업 준비 청년, 경력단절 여성, 실직자나 장애인 등 고용 취약계층이었다고 ‘성과’를 홍보한다. 수요와 공급이 맞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일자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어떤 일자리였을까?

수량화를 통한 일자리 속임수는 디지털 뉴딜만이 아니라 그린 뉴딜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린 뉴딜 도입 당시 〈한국에서 그린 뉴딜 에너지 정책이 전력공급 안정화와 비용, 일자리, 건강, 기후에 미칠 영향〉이라는 보고서가 각계에서 널리 인용됐다.(3) 이 보고서는 스탠포드와 UC버클리 대학 연구팀에서 만든 것이었는데, 미 에너지정보국의 자료를 토대로 한국을 포함한 143개국이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로 100% 전환할 경우의 예측치를 계량화한 것이다. 보고서는 한국에서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면 30년 동안 144만 개의 일자리가 순증하리라 예측한다. 전력 생산, 저장, 공급 산업과 건물 냉·난방 분야에서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클 것이며 건설 부문에서 약 74만 개, 운영 부문에서 약 88만여 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전문가들이 말해온 그린뉴딜로 백만 개 이상 만들어질 것이라는 ‘녹색 일자리’에 대한 근거는 이 보고서가 사실상 유일하다.

스탠포드 연구팀의 보고서는 한국에서 100% 재생에너지에 필요한 국토 면적이 6.5%에 ‘불과’하다고 예측했다. 6.5%에 ‘불과’한 그 면적은 사람들이 사는 거주지나 농지, 삼림 등에서 용도 변경해야 한다. 과거 수력발전 댐에 수몰된 땅처럼, ‘그린 에너지 댐’으로 수용될 이들에게도 그 땅은 전부이며 절대적이다. 농지를 잃은 농민에게 ‘농사’라는 일자리가 태양광발전단지나 풍력발전단지의 일자리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새로 생긴 일자리로 없어진 일자리를 상쇄하는 이런 일자리 셈법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교수들에게 당신들이 지금 하는 일이 쓸모없으니 다른 직업이나 직장을 찾으라고 한다면 순순히 받아들일까? 단순 비숙련직 노동자들이니 아무 일자리나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직이 쉽지 않은 건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 전환에 대한 노-사간 노-정간 협의가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겉으로는 노동자를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일자리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는 기업이다. 고용우수기업으로 인증받은 기업에는 일자리 창출과 유지에 기여한 대가로 고용지원금을 비롯해 세제 감면, 규제 완화, 지원사업 특혜 등 각종 혜택이 주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일자리는 노동 양극화도 동시에 만들어낸다. 그린뉴딜에서도 정부 기구나 지자체 단위의 기후에너지 센터나 중간관리 조직, 연구, 교육, 컨설팅, 건축설계, 법조 분야 등에는 전문가들을 위한 꽤 괜찮은 일자리가 할당되고 있다. 하지만 그린 리모델링 건축물을 짓는 건설노동자의 현장은 안전할(green) 것인가? 서울을 자전거 도시로 전환할 때 ‘따릉이’를 수거하고 관리하는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일자리 양극화는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 간에서도 나타난다. 센터장과 인턴직, 정책 전문가의 비싼 자문료와 현장을 뛰는 조사원의 값싼 노동, 취·창업 컨설팅 업체의 경영자와 피교육 구직자 사이의 격차를 ‘뉴딜 일자리’는 교묘하게 숨긴다.

그런 점에서 “죽은 지구 위에 일자리는 없다(No jobs on a dead planet)”는 말이 발휘하는 현실적 효과도 따져봐야겠다. 이 말은 원래 국제노총이 생태주의적 사회 전환에서 노동자들의 주체성과 주도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그런데 말이란 것은 누가 어떤 맥락에서 말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한다. 같은 말이라도 노동자 자신이 할 때와 노동자에 대해서 할 때는 그 의미가 달라진다. ‘주체가 되자’는 말과 ‘주체가 돼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말이다. “죽은 지구 위에 일자리는 없다”라는 말도 그렇다. 저 말을 자본가나 정책관리자들이 노동자를 향해서 할 때는 “기업이 망하면 일자리도 없다”라거나 “나라가 망하면 일자리도 없다”와 같은 말이 된다. 물론 지구를 살리는 것은 전 인류의 급선무의 과제다. 그러나 “지구를 살려라”가 자본의 요구가 될 때 노동자의 생계와 생존은 산업 전환의 후면으로 밀려난다. 경영난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지우고 구조조정과 해고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저 말은 기후 위기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일자리로 협박하는 ‘환경 구조조정’을 정당화한다.

지금 ‘일자리’라는 용어는 그 자리에 있는 노동자와 노동조건을 숫자를 통해 비가시화시킴으로써 노동과 노동자를 비인격화, 탈정치화, 탈노동화 한다. 뉴딜 일자리 사업은 넘쳐나지만 정작 어떤 일자리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협약(new deal)은 부재하다. 문제는 일자리 수가 아니라 그것이 정당한 임금과 인간다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충분한 소득, 안정적인 일자리, 평등한 계약관계, 안전한 노동과 노동권을 보장하는가에 있다. “죽은 행성에 일자리는 없다. 그러나 일자리 없이는 생태적 전환도 없다.” 함부르크 교원노조는 이렇게 말했다. 생태적 전환을 위한 사회 협약을 하려면 녹색 산업 분야의 일자리 공급이 아니라 생태적 노동 전환부터 논의해야 한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야간노동을 금지하며, 안전한 노동환경과 생태적 산업을 위한 노동자의 경영 참여 등 노동의 생태적 전환을 통해서만 우리는 사회의 생태적 전환과 체제변화에 도달할 수 있다.

(1)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 지음, 《회사가 사라졌다 –폐업·해고에 맞선 여성노동》, 파시클, 2020.
(2) https://www.yna.co.kr/view/AKR20210114098900017 “1조6천억 투입 디지털 뉴딜 사업에 1만2천여 개 기업 참여”, 연합뉴스, 2021.1.14.
(3)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928826.html 「미 연구팀, “그린뉴딜 도입하면 한국 정규직 144만개 순증”」 한겨레, 20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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