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쿤에 간 반팔 상원의원의 배후는

[1단 기사로 본 세상] 1800만원 전기요금 고지서… 텍사스 정전을 만들어온 사람들

[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미국은 후진국이다. 연초에 치른 대통령 선거와 최악의 코로나19 대응, 자주 반복되는 캘리포니아 산불 등 시스템이 붕괴된 단면을 여러 번 보였다. 2005년 8월 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동부를 강타했을 때 연방정부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뉴올리언스를 거의 포기했다.

코로나19 대응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3000만 명이 확진됐고 52만 명 넘게 죽어 코로나 최강국이 됐다. 같은 기간 한국은 9만 명쯤 확진돼 1600명쯤 죽었다.

텍사스에 불어닥친 ‘이상 한파’에 미 연방정부는 중대재난을 선포하면서 또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텍사스는 멕시코 접경지역으로 플로리다 다음으로 따뜻한 곳인데, 영하 20도까지 떨어져 대규모 정전과 수도 공급이 중단됐다. 텍사스에서만 400만 명이 정전 피해를 입었다. 텍사스 인구의 절반이 넘는 1440만 명이 수도 공급도 못 받았다. 서민들은 얼음에 덮인 집을 버리고 히터를 튼 자동차에서 은박지로 몸을 칭칭 감고 잠을 지샜다.

이 와중에 텍사스 주 상원의원 테드 크루즈는 날씨가 따뜻한 멕시코 휴양도시 칸쿤으로 몰래 가족 여행을 떠났던 게 들통 나 공분을 샀다. 공항에서 반팔 차림에 캐리어를 끌고 가는 크루즈 의원이 외신 카메라에 딱 걸렸다.

반팔 사진이 SNS에 급속히 공유되면서 궁지에 몰린 크루즈는 “등교가 취소된 딸들을 위해 여행을 갔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크루즈 의원 부인이 “집이 너무 추워 얼어 죽을 것 같아 칸쿤 리츠칼런 리조트로 떠나려고 한다”며 측근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를 입수해 보도했다.

  2월 22일 조선일보 17면(왼쪽)과 동아일보 25면.

우리 의원들이 국가 위기 때 보여준 외유 관행과 너무도 닮아 웃펐다. 조선일보는 2월 22일 국제면에 캐리어를 끌고 가는 크루즈 의원 사진을 1단으로 자그맣게 싣고 ‘반팔 입고 공항 온 텍사스 지역구 상원의원’이란 제목을 달아 이 망신살을 소개했다.

이런 정신 나간 크루즈 의원은 공화당 소속인데, 조선일보는 사진 제목엔 ‘공화당’이 빠졌다. 반대로 불과 한 달 전 조선일보는 테드 크루즈 의원을 ‘공화당 거물’로 칭송했다.

크루즈는 상하원 합동 회의가 지난달 6일 조 바이든 당선 인증 투표에 반대하면서 트럼프의 대선 불복 행렬에 동참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1월 4일 16면에 “‘바이든 인정못해’ 美 공화당 상원 11명의 반란”이란 제목을 달아 크루즈의 철 지난 몽니에 손을 들어줬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특히 공화당 거물인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이 이를 주도하고 있다”고 주목했다. 또 조선일보는 “전례 없는 대선 불복 운동이 명망가 집단인 상원까지 침투한 것에 놀라고, 이를 테드 크루즈라는 공화당 거물이 이끈다는 것에도 술렁이는 분위기다”라고 보도했다. 비록 외신을 인용했지만 조선일보는 크루즈를 대권 후보 반열에 올렸다.

  조선일보 1월 4일 16면

재선 의원이자 이제 갓 50으로 젊은 축에 속하는 크루즈를 ‘거물’이라고 표현한 건 어색하다. 그는 트럼프 없는 트럼피즘을 자기 지지 표로 흡수하려는 얄팍한 표 계산으로 바이든 인준 투표를 반대했을 뿐인데, 그를 ‘거물’로 부르는 건 좀 많이 나갔다. 그는 태극기 부대를 지지 표로 흡수하려는 조원진 의원 류에 더 가깝다.

  조선일보 1월 8일 1면 톱

조선일보는 트럼피즘을 이용하려는 크루즈를 칭송한 기사를 쓴 직후 미 의사당 난입 사태가 벌어지자 ‘트럼피즘이 美민주주의를 짓밟았다’는 제목을 달아 1월 8일 1면 톱기사에 실었다. 조선일보는 미국 민주주의를 ‘트럼프 대통령이 부추기고, 극성 지지자가 공격했다’고 평가했다.

불과 며칠 전 그런 트럼피즘에 기댄 크루즈를 ‘거물’로 표현했던 신문 치고는 너무도 발 빠른 변화였다.

조선일보는 텍사스 정전 사태 때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2월 18일 6면 머리기사에 ‘재생에너지 23% 텍사스 정전사태… 반도체 공장도 스톱’이란 제목을 달아 마치 텍사스 대규모 정전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 재생에너지 때문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기록적 한파에도 원전은 멈추지 않고 정상 가동됐다며 친원전으로 의제를 살짝 틀었다.

  조선일보 2월18일 6면

텍사스 주가 대규모 정전 사태에도 속수무책이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제임스 딘의 유작 ‘자이언트’에서 보듯이 텍사스는 유전 왕국으로 전력이 풍부하다. 영화 속 제트 링크(제인스 딘)는 주인 집 딸이 죽으면서 유언으로 넘겨 준 불모의 작은 땅에서 석유가 쏟아지자 하루 아침에 돈방석에 앉는다. 텍사스는 그런 땅이다.

미국엔 특정 주의 전력에 문제가 생기면 이웃 주에서 전기를 끌어 온다. 서부와 동부에는 두 개의 전력망이 있다. 서부 캘리포니아 전력에 문제가 생기면 인근 네바다나 애리조나에서 끌어 오는 식이다. 동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텍사스는 양대 전력망에 끼지 않고 독자 전력망을 운영한다.

연방 전력망에 합류하면 연방정부의 규제도 받아야 하는데 평소 전기가 남아도는 텍사스는 규제를 피하려고 다른 주와 전력을 공유하지 않는 독자 망을 구축했다. 결국 한파로 전기가 끊겨도 다른 주에서 전기를 받을 수 없었다.

이번 한파로 한 달에 1800만 원 넘는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아든 텍사스 주민이 있어 화제가 됐다. 살인적 전기요금은 민영화 조치 때문이다. 대통령을 지낸 조지 W. 부시가 1999년 텍사스 주지사 때 도입한 전력 민영화 정책으로 전기요금이 폭등했다.

이런 비난을 피하려고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텍사스의 풍력과 태양광 발전이 작동하지 않아 대규모 정전이 일어났다고 발표했다. 당연히 그 주지사도 공화당 소속이다.

이런 것도 모르고 미국과 한국의 보수 언론이 합작으로 꾸며 낸 ‘재생에너지 때문에 텍사스 전력망이 붕괴했다’는 가짜뉴스는 SNS를 거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얼어서 멈춰선 풍력발전기 사진엔 ‘오늘 텍사스’라는 제목이 달렸다.

SNS엔 얼어서 멈춰선 풍력발전기 사진이 떠돌았다. 헬기로 발전기에 쌓인 눈을 털어내는 이 사진은 BBC가 보도한 스웨덴 풍력발전기였지만 SNS엔 ‘오늘 텍사스’에서 벌어진 광경이라는 설명이 달린 채 여러 곳으로 번졌다. 전형적인 가짜뉴스였다.

텍사스의 재생에너지 비율은 23%인데 텍사스보다 훨씬 추운 노스다코타의 풍력발전 비율은 45%가 넘는다. 텍사스 바로 위 오클라호마도 풍력발전 비중이 31.9%에 달하지만 이번에 정전이 일어나진 않았다. 물론 텍사스보다 훨씬 더 추운 북유럽도 풍력발전은 잘 돌아간다.

시간이 가면서 텍사스 정전은 한파로 풍력발전기가 얼어서가 아니라, 천연가스 발전이 멈춘 게 가장 큰 원인이라는 해석이 가장 유력해졌다.

민영화와 규제 완화가 만능이라는 신념에 사로잡힌 보수 정치인과 언론이 텍사스 정전의 최대 원흉이다.

그나저나 크루즈 의원이 도망간 멕시코 칸쿤은 재벌과 상원의원에겐 고급 휴양지겠지만 우리에겐 2003년 9월 11일 쌀개방 반대 투쟁에 나섰다가 WTO에 항의하며 할복 자결한 이경해 농민의 마지막 저항 거점이다.
  이경해 열사가 할복한 곳에 추모 촛불과 꽃다발이 놓였다. [출처: 침세상 자료사진]

최신기사
기획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온라인 뉴스구독

뉴스레터를 신청하시면 귀하의 이메일로 주요뉴스를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