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신 수급 문제, 강제실시로 풀어야”

강제실시 발동에 미국의 무역보복도 우려돼…협상의 무기인 ‘여론’ 만들어야

[출처: Moderna]

한국 정부가 코로나19 백신 수급 때문에 진땀을 빼고 있는 가운데, 특허 강제실시를 통해 백신 독점 시장을 돌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강제실시는 특허권자의 허가를 받지 않고도 특허 기술을 쓸 수 있게 한 제도로 의약품 특허권 독점에 대항하는 거의 유일한 제도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 제도’(TRIPs)가 보장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강제실시를 행하는 데 발목을 잡는 것도 사실이라, 사회운동을 통한 적절한 여론 형성도 필요한 상황이다.

지난 22일 참세상연구소가 줌을 통해 진행한 세미나에서 이덕희 박사(영국 킹스칼리지)가 ‘코로나19 백신, 정치·경제·사회적 의미와 한계’에 대한 발제를 맡아 강제실시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박사는 “생산 능력이 있는 한국도 특허권 침해 때문에 독점에 시달린다”라며 “한국 정부가 특허 강제실시와 병행수입/수출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더불어 “장기적으로 필수백신의 특허를 유예하고 지역생산 능력을 확대해야 한다”라며 “백신뿐 아니라 필수 의약품으로까지 공공 영역에서의 생산을 확장해야 한다. 한국의 공공제약공장과 회사를 추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밝혔다.

코로나19 백신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한국에서 강제실시권이 청구된 사례는 거의 없다. 국내에서 의약품과 관련해 강제실시가 청구된 사례는 4건이 있었는데, 이 중 1980년 ‘비스-티오 벤젠’의 제조방법에 대해서만 3%의 실시료율로 강제실시가 승인된 바 있다. 이외 ‘미페프리스톤(mifepristone)’의 제조방법, ‘글리벡(Gleevec, Glivec)’, ‘푸제온(Fuzeon)에 관한 강제실시 청구는 ‘공공의 이익’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기각됐다.(1)

반면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선 불공정거래를 시정한다며 강제실시를 종종 발동해왔다. 특히 미국에서는 100여 건이 넘는 불공정 거래 행위 사건에서 항생제, 합성 스테로이드, 생명공학 특허를 포함한 많은 특허에 대해 강제실시를 허용한 바 있다. 이밖에 제3국에선 HIV/AIDS 항바이러스 치료제에 관한 강제실시가 각국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1995년부터 2016년까지 강제실시가 세계적으로 허여된 22건 중 대다수가 에이즈 치료제다.

한국이 강제실시에 나서기 어려운 이유로는 다른 나라들처럼 무역 보복의 두려움 때문이다. 에이즈가 아닌 다른 치명적인 질병들에 대해 강제실시가 적극적으로 실행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가 크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태국이 2007년 강제실시를 승인한 것과 관련해 태국을 우선감시대상국으로 지정하고 낮은 관세로 미국으로 들어오는 보석류 제품에 대해 특권을 종료시키겠다는 위협을 가했다. 2016년엔 콜롬비아가 스위스 노바티스 사의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에 대해 강제실시를 시도하자 미국이 콜롬비아 내란 관련 평화자금의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밝혀 강제실시 시도가 철회됐다.

22일 세미나의 한 참가자는 “미국 상공회의소가 한 번씩 의견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각국에 입김을 넣고 있어 한국 정부가 그 결정(강제실시)을 내리긴 어려울 것 같다. 현재 유럽의 일부 국가들도 강제실시 카드를 만지작거리지만, 어떤 분위기가 형성될지는 아직 파악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한국의 정책 자체가 선도적 역할을 하기보다는 미국과 유럽의 정책에 따라 적당히 밸런스를 맞추고 부분적으로 기여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사회경제가 발전하면서 독자적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칠 것으로 예상한다. 선진국 위주로 짜였던 판을 독자적으로 움직이긴 어렵겠지만, 다른 중견국들과의 교류를 시작하며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구상할 수 있는 훈련을 작은 규모에서부터 해나가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강제실시를 발동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이 박사는 “실제 코로나 백신 연구·개발비용엔 세금을 비롯한 공공의 자금이 투여됐고, 정부와 공공연구소들 또한 백신개발에 공동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주장”이라고 했다. 코로나 백신이 빠르게 개발될 수 있었던 이유엔 각국 정부의 제도와 지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이를 환원하는 차원에서라도 강제실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학계에서도, 정계에서도 특허를 유예하고 생산을 늘려 특정 제약사가 백신 독점을 못 하도록 만들자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라며 “사회 운동 진영에서도 이 같은 주장들을 적극적으로 펼쳐 협상의 무기를 만들 수 있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코로나 백신 생산이 LMIC(중저소득국가)에서 가능해지면 현재 1개 분당 2.18달러에 달하는 가격은 0.98달러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이 교수는 “고정비용, 가변비용이 발생하지만 생산자 잉여와 잠재적 이윤이 양쪽 시장에 존재하고, 지속가능한 생산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선 계절 독감이 코로나19처럼 팬데믹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코로나19 저지를 위한 봉쇄 조치 이후 북미, 남미의 독감 감염이 극도로 줄었는데, 그만큼 백신 개발에 참고할 백신 변종이 줄어들어 효과적인 백신을 만들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출처: WHO]

계절 독감이 코로나19처럼 팬데믹으로 발전한다면 수급 문제에 또다시 직면하게 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브라질, 러시아, 중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백신 생산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만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의 절반은 생산 능력이 없거나,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신생산이 국가안전 문제와 결부되는 만큼 제조, 생산 능력이 모든 국가에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박사는 “계절독감 변종 바이러스가 줄어 다음 해 유행하는 독감 양상을 결정할 변종 선택이 어렵게 됐다. 일반적으로 3가 백신(바이러스 3종 예방), 4가 백신(바이러스 4종 예방)을 쓰는데 예방 범위가 훨씬 줄어들게 된 것이다”라며 “2017년, 2018년 백신이 잘못 생산돼 백신 면역 효과는 40%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미국에서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증가했던 적이 있다. 계절 독감 백신 문제는 곧 중요한 문제로 부상할 것이다”라고 예고했다.

(1) <쟁점연구 - 강제실시에서 특허권자 보상에 관한 연구: 제약특허를 중심으로>, 특허청,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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