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황후이자 고독한 여성 통치자 여태후

[혁명의 세계, 반란의 역사]


중국 역사에는 3대 악녀가 등장한다. 전한(前漢)의 고황후(高皇后) 여치(呂雉),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청나라의 서태후(西太后)가 바로 그녀들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으로 ‘3대 악녀’는 ‘3대 여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3인 중 여치를 새롭게 인식하고자 한다.

유방과 결혼한 여치는 황후가 되기 전까지 평범한 생활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진시황 사망 이후 누가 패권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문명의 주인공을 판가름하는 초-한전쟁 시기였기 때문이다. 초나라의 항우와 하나라의 유방 모두 각자 승리하면 혁명에 성공하는 것이고, 패배하면 역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치가 평탄한 생활을 할 여지는 불가능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유방이 망산과 탕산 지역에 도망쳐 숨어 있을 때는 몰래 그곳을 찾아갔고, 유방이 수배자가 됐을 때는 감옥살이를 했다. 유방이 거병을 해서 전투를 치를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시부모와 농사를 지으며 내조했다. 초-한 전쟁 중 유방이 팽성에서 항우의 군대에게 대패하였을 때는 시부모와 함께 초나라군에게 체포돼 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2년 5개월간 포로 생활을 했다. 그러다 기원전 202년 한 제국이 건립돼 유방이 황제가 되면서 그녀는 정식 황후, 여태후가 됐다. 한마디로 여치는 ‘내조의 여왕’이자 ‘혁명 동지’였던 것이다.

그런 여태후가 3대 악녀로 소문 난 것은 유방이 죽은 후의 행동 때문이다. 유방은 초-한 전쟁 중 척(戚) 씨 성의 여성을 만나 사랑을 했는데, 그 여성이 유방이 매우 총애했던 후궁인 척부인 혹은 척희(戚姬)다. 척부인은 유방이 자신의 아들인 여의(如意)를 아끼자 늘 태자로 세워달라고 애원했다. 유방은 당시 태자인 효혜제를 폐위시키고 여의를 태자로 세우려 했지만 대신들의 간청과 만류로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따라서 유방이 죽은 후 아들인 효혜제가 왕위에 오르자 평생 불안감에 시달렸던 여태후는 조치를 취했다. 척부인의 소생 여의를 독살하고 척부인을 “사람 돼지(人彘)”로 만든 것이다.

“태후는 마침내 척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인 후 돼지우리에 집어넣고 ‘人彘(사람 돼지)’라고 불렀다. 며칠 지난 후(居數日) 태후는 효혜제를 불러서(召) ‘人彘’를 보도록 하였다. 효혜제는 사람들에게 물어본 후 그것이 척부인이라는 것을 알고 대성통곡하였다. 효혜제는 사람을 보내어 태후에게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나는 태후의 아들로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효혜제는 종일토록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이 때문에 병이 생기게 되었다.”(『사기』 권9, <여태후본기>).

이 사건은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복수 중 하나로 꼽힌다. 사마천이 《사기》 <여태후본기>의 앞머리에 이 일화를 기록했는데, 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녀에 대한 잔혹한 인상을 심어주는데 일조했다. 여태후에 대한 평가는 당, 송, 명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부정적이다. 가장 지탄이 되는 것은 척부인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여태후에 대한 일면적 인식이며 사족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여태후의 만행보다 당시 군주인 혜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지도자로서 혜제의 반응이 과연 적합했느냐는 것이다. 당시 한나라의 상황에서 군주의 자리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혜제가 여의와 척부인을 보호하려는 따뜻한 마음은 왕권 안정 시기에는 인자한 임금으로서의 덕목이었겠지만, 권력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시기에는 부적절한 처사였다. 결국 혜제는 사건의 충격으로 국정을 운영하지 않고 주색에 빠져 지내다 7년 뒤 죽었다. 혜제는 나약함과 무능함을 드러냈고, 이로서 여태후는 직접 통치의 당위성을 확보했다.

그런 의미에서 ‘人彘사건’은 여태후의 잔혹함이 아닌, 혜제의 황제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마천의 치밀한 구성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여 씨 일족과 유 씨 일족과의 권력투쟁만을 다루고 있다. 심지어 여성혐오 관점에서 평가되거나 왜곡된 측면도 상당하다. 이는 단순히 ‘人彘사건’ 등의 잔혹한 행동 때문만은 아니다. ‘감히’ 여자가 황제를 대신해 남자 위에 군림했다는 점에서 그녀를 대표적인 악녀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여태후본기>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여태후를 천하를 다스리고 안정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제국의 통치자로 보고 있다. 당시 황제였던 혜제와 소제 대신 실질적인 집권자인 여태후의 시대로 명명하고 있다. 여태후는 강인한 의지를 갖고 한나라 황실을 안정시키고자 실천한 인물이다. 일찍이 고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했으며, 공신 한신과 팽월을 주살할 때도 여태후의 힘이 컸다. 혹자는 이를 두고 독한 여성 혹은 잔혹한 여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여태후 개인의 잔혹함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고조인 유방도 실행하기 어려운 일을 여태후가 과감성, 신중성, 판단력 등을 바탕으로 해결한 것이다.

여태후는 유방 사후 15년간 제국의 실질적 통치자로서 한나라 초기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여태후가 통치 기간 동안 실제로 죽인 사람은 5명이었다. 여태후 입장에서는 죽일 명분이 있던 이들이었다. 여태후는 한 고조의 여러 후궁과 자녀 중에서 자신과 혜제의 지위를 직접 위협한 척부인 모자 이외의 이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하게 대우했다. 그리고 그 시기 대부분의 백성은 오랜 전란 끝의 평화를 누리며 번성할 수 있었다. 모든 정치가 방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으며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일에 힘을 쓰니 먹고 사는데 나날이 풍족해졌다.

그녀는 걸핏하면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내전으로 몰아넣던 남성 권력자들과는 달리 백성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지 않았다. 북쪽의 최대 위협이던 흉노도 평화공존을 견지하는 그녀의 대외정책을 존중해 전쟁을 걸어오지 않았다. 여태후는 반전 평화주의자의 면모를 가졌던 것이다. 그녀야말로 ‘지친 백성을 쉬게 한다’는 한 고조의 정책을 올바로 계승해, 이후 한나라 왕조가 전성기에 이를 수 있도록 한 유능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도가의 무위지치를 다스림의 근본정책으로 추진하면서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고 경제 활성화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지배 질서에 반발하면서 독자적인 여성 권력의 밑그림을 그린 여성 통치자이다. 그녀에게는 고독한 여성 군주와 혁명적인 지도자의 면모가 모두 풍긴다.

<참고문헌>

김택중, “呂太后와人彘사건.” 『중앙사론』 16(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002).
양중석, “사마천이 서술한 여태후 이야기.” 『중국문학』 제76집(한국중국어문학회, 2013).
함규진, “초한지의 인물들(1): 영웅, 책사, 여인들의 불꽃 튀는 대결.” 『인물세계사』(네이버 지식백과, 2012).
허원기, “외로운 여성 권력자의 초상-고후전(高后傳) 연구-.” 『장서각』 제17집(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司馬遷 著, 정범진 외 역, 『사기열전』(서울: 까치,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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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가끔씩 보게되는 역사속에서 유리천장을 깨뜨리는 여성들을 보며 그 시대에도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