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 스스로 권리 찾기를 선언하다

[기고] 교수연구자들의 ‘연구자 권리선언문’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어떤 노동자도 투쟁하지 않으면 권리를 찾을 수 없다. 그 권리는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역사는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권리를 찾는 투쟁의 역사다.

최근 연구/지식 노동자들이 권리선언을 시작했다. 대학 내부의 구조적-제도적 차별을 고려하면 때늦은 것 같지만 연구자들의 비겁함과 엘리트주의를 고려하면 이른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연구자 사회는 복잡다단하다.


대학은 말 그대로 큰 배움의 공간이지만 점점 배움이 소멸되면서 ‘오징어 게임’의 또 다른 공간이 되어 버렸다. 동료와 친구는 사라지고 무한 경쟁이 난무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첨단을 보여주고 있다. 연구자들은 생존을 위해 처절한 혈투를 벌이고 있다. 여전히 대학에는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로 무장한 지식인은 많다. 하지만 비판적 정신으로 무장하여 현실을 바꾸려고 실천적 교수연구자는 너무 적다. 과거 진보적 지식인 운동의 주체들은 다수가 기득권이 되어 버렸다. 이들에게 왜 ‘인민’, ‘민중’과 ‘노동자’로서의 주체의식을 발견하기 어렵냐고 질문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인민들은 역사적으로 전지전능한 집단적 존재이면서 무력한 개인이지만, 지식인들은 역량이 있다고 믿고 싶은 무력한 개인일 뿐이다. 그들을 달래고 위로해 주는 것은 직업과 신분으로서의 체면과 품위 유지에 불과하다. 자신들 스스로 기득권 세력임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자임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죽은 지식인의 사회’라고 규정했듯이(경향신문 특별취재팀,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후마니타스, 2008.), 이제 대학에서의 비판적 기능을 찾기가 어렵다. 비판적-실천적 연구자의 재생산은 기적에 가깝다. 대학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거나 진입을 거부하는 독립연구자가 등장한 지도 이미 오래전 일이다.

교수연구자의 위기와 몰락이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고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2021년 오늘도 ‘연구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학연에 의한 재생산이 횡행하는 대학가, 담론과 논쟁의 부재, 폴리페서, 기업논리에 지배당한 대학교육 등 지식사회는 병폐 투성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악화되면서 절망만 남아 버렸다.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 대안을 만들어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방법은 많지 않다. 연구자 스스로 주체를 천명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연구자 권리 찾기는 그 첫 단계에 불과하다. 소박하면서도 소극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단계가 거듭될수록 적극적-능동적 방식으로 전환할 것이다.

연구자 권리선언은 지난 1월부터 여러 연구자 단체가 연속적인 토론회를 통해 초안에 대한 논의와 검토를 진행했다. 이러한 공감대 형성과 의견 수렴 과정을 바탕으로 지난 9월 중순에는 <연구자 권리증진과 차별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구성하고 ‘연구자 권리선언문’을 완성했다.

현재 공대위에는 교수노조, 대학원생 노조, 만인만색 연구자네트워크, 민교협,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자의집, 인문학 협동조합, 지식공유연대, 포럼 대학의 미래, 학단협, 한교조 등 11개의 교수 학술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학문과 연구의 공공성 위기를 우려하고 불투명한 미래 전망 속에서 생계를 걱정하는 모든 교수연구자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간곡히 요청드린다.

연구자의 권리 찾기를 원하십니까.
참가를 원하시면 귀하의 이름과 소속을 입력해 주세요.
https://forms.gle/zaVakXgC13Zq42Va9

연구자 권리 선언

전문

모든 인간은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자유 의지에 따라 자신의 목표를 실현할 권리를 갖는다. 이러한 권리는 진리를 추구하고 연구, 교육을 수행하여 공동체에 기여하는 연구자들에게 활동의 기본 토대가 된다. 우리는 현재 이 토대의 붕괴를 목도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연구의 공공성은 매우 취약하며, 환경 위기나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미증유의 사태를 극복하는 데 절실한 성찰적이고 창발적인 연구는 단기적 성과주의가 지배하는 경쟁 체제에 의해 안정성을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삶의 모든 영역을 상품화하는 것이 마치 정언명령처럼 통용되면서 진리의 전당이어야 할 대학조차 사실상 기업으로 전락하였다. 무엇보다 대학 붕괴가 현실화하면서 많은 연구자들이 나락으로 내몰리고 있으며, 연구자로서의 삶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공포 속에서 절망하고 있다. 연구의 공공성 위기와 연구자의 생존 위기는 단순히 연구자라는 특정 직종의 위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편적이고 공공적 가치에 기반한 연구 활동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미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금의 상황에 절망하여 침묵하고 있기에는 이 문제가 너무나 절실하다. 우리는 현재의 위기를 교육과 연구에서 공공성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로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그간 학문 활동의 터전이었던 대학의 공동체성을 보듬어내는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 더 나아가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확대하는 일이다. 이러한 과제를 정당하고 당당하게 수행하기 위해 연구자로서의 권리를 선언하고 사회적 책무를 밝힌다.


제1조 연구자의 정의
연구자는 연구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체계적 지식을 연마하고 전수하며, 합리적 방법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일체의 행위를 연구 노동이라 한다. 호기심을 품은 모든 개인은 자유롭게 연구자가 될 수 있어야 하고, 연구자는 인류 공공의 지적 체계를 갱신함으로써 공동체의 진보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야 한다.


제2조 연구자의 책무
제1항 연구자는 연구의 전 과정을 윤리적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제2항 연구자는 서로를 학문 공동체의 동료로서 존중하여야 한다.
제3항 연구자는 인류 사회와 생태 환경을 위해 지식을 공유하고 활용하여야 한다.


제3조 연구자의 평등
제1항 모든 연구자는 각자가 속한 학문 공동체에서 동등한 의결권과 선거권·피선거권을 가진다.
제2항 모든 연구자는 젠더, 섹슈얼리티, 지위, 장애, 병력, 나이, 언어, 국가, 민족, 인종, 피부색, 지역, 학교, 신체조건, 혼인,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학력, 고용 형태,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제4조 연구 성과
연구의 모든 과정과 결과는 공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한다. 연구자는 연구 성과에 대해 보상받을 권리가 있으며, 연구 성과가 왜곡·남용되지 않도록 감시할 의무가 있다.


제5조 연구 환경
연구 환경은 연구를 수행하는 물리적 공간과 학문 공동체의 문화와 제도를 포괄하는 공공영역이다. 연구자는 연구의 지속과 연구 역량의 증진을 위해 연구 환경의 안전성·안정성·개방성·독립성을 보장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1항 (안전성) 연구자는 연구 수행상의 각종 사고와 성적‧정신적‧물리적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연구 환경을 보장받고,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2항 (안정성) 연구자는 연구 수행을 위한 기본적인 생활과 고용 안정을 보장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3항 (개방성) 연구자는 연구 생산물, 자료, 기관 및 공동체에 대한 접근을 제한받지 않고,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환경 속에 고립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제4항 (독립성) 연구자는 연구 활동 및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위해 타인에게 침탈 받지 않는 시공간을 보장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6조 정책 참여
연구자는 연구 및 교육과 관련된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제7조 조직 결성
연구자는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연구, 교육, 노동 관련 조직을 결성할 권리를 가진다.


제8조 사회 경제적 권리
연구자는 모든 노동자, 시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연구노동을 통하여 노동자로서의 생존, 시민으로서의 품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권리를 가진다.


제9조 국가의 책무
국가는 전체 사회를 대표하여 연구 활동을 촉진하고, 학문의 독립성, 자생성, 지속성을 뒷받침하고 연구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제1항 국가는 연구자의 안정적 연구 환경을 보장하기 위하여, 연구자에게 연구 공간, 자료 접근성, 강의와 교육의 기회 등을 제공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제2항 국가는 연구자들이 생산한 지식을 대중들에게 전수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물질적, 정책적 지원을 지속하고 확대할 의무를 지닌다.
제3항 국가는 학문 공동체에 대한 연구자의 평등한 의결권 및 선거권‧피선거권을 실현할 수 있도록 실효적인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제4항 국가는 연구자가 학문 및 교육 분야 정책 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할 의무를 지닌다.
제5항 국가는 연구자 관련 조직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과 제도를 마련할 의무를 지닌다.
제6항 국가는 연구자의 사회 경제적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정책과 제도를 마련할 의무를 지닌다. 여기에는 여러 사회 보험과 연구자 생애 주기에 맞는 재정 지원 등의 제공, 재생산 권리 보장, 연구자를 위한 사회 주택의 제공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
태그

평등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배성인(성공회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문경락

    삶의 모든 영역을 상품화하는 것이 마치 정언명령처럼 통용되면서 진리의 전당이어야 할 대학조차 사실상 기업으로 전락하였다. 무엇보다 대학 붕괴가 현실화하면서 많은 연구자들이 나락으로 내몰리고 있으며, 연구자로서의 삶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공포 속에서 절망하고 있다. 연구의 공공성 위기와 연구자의 생존 위기는 단순히 연구자라는 특정 직종의 위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편적이고 공공적 가치에 기반한 연구 활동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미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금의 상황에 절망하여 침묵하고 있기에는 이 문제가 너무나 절실하다. 우리는 현재의 위기를 교육과 연구에서 공공성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로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그간 학문 활동의 터전이었던 대학의 공동체성을 보듬어내는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 더 나아가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확대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