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한 일본인 노동자의 연대 투쟁

[1단 기사로 본 세상] 제국주의자로 왔다가 투쟁하는 노동자로 떠난 ‘이소가야 스에지’

[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이소가야 스에지(1907~1998)는 일본 시즈오카 현에서 열 명 넘는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해 소학교 졸업 뒤 목재소 등에서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이소가야는 21살 때인 1928년 징집돼 함경북도 청진에 주둔한 일본군 19사단에 병사로 배치됐지만, 폭력적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2년 만에 제대했다. 제대 후 그는 귀국하지 않고 일본 미쯔비시 재벌이 1930년 1월부터 운영한 조선질소비료회사 흥남공장에 노동자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화학물질을 뒤집어쓰며 주야 3교대로 일했다. 그는 공장에서 조선인 좌파 항일운동가를 만나 노동운동에 나선다.

일본 노동자 이소가야의 조선 노동운동

이소가야는 1930년대 초반 함흥을 중심으로 한반도 전역에 영향을 미치며 전국적 산별노조를 세우려고 ‘혁명적 노동운동’을 지향했던 태평양노조에 가입했다. 일제는 1930~1935년 4차례나 관련 노동운동가를 검거하면서 ‘태평양노조 사건’을 조작해냈다. 이소가야는 1932년 4월 ‘2차 태평양노조 사건’으로 동료 수백 명과 함께 구속돼 무려 9년간 옥살이를 한다.

그는 1941년 1월 석방 뒤에도 함흥과 장진에서 옛 동지들을 만나 노조 재건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조선인에게 해방이지만, 일본인인 그에겐 패전이었다. 그래도 그는 해방된 함흥에 1년 넘게 계속 살았다. 조선공산당 함흥시당 일본인 위원회 소속이었던 그는 재한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도와 달라는 일본 정부의 요청에 응해, 남은 일본인과 함께 1946년 12월 일본에 돌아갔다.

돌아간 그는 1998년 만 91세까지 장수하면서 ‘조선종전기’, ‘우리 청춘의 조선’, ‘일한병합 80년과 일본’ 등 수많은 회고록을 남겼다. 그는 북한에 남은 동지들이 노동자 민중을 위한 새 조국 건설에 매진하리라 믿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숙청을 지켜보면서 김일성 독재에 환멸을 느껴 이후 북한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심리를 분석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패전 후 본국에 돌아간 일본인들은 조선민족을 마치 ‘가해자’처럼 생각하며 미움을 가득 안고 조선을 떠났다”며 일본인의 비뚤어진 ‘피해자 코스프레’를 비판했다. 그는 “일본 식민통치가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민족 분단이란 불행을 짊어지지 않았다”라며 가해자 일본의 책임을 강조했다.

동아일보가 지난 8일 ‘日우익들 전쟁피해자 행세때 반성 촉구한 이소가야’라는 기사를 썼다. 전주대 변은진 교수가 최근 발표한 ‘이소가야 스에지의 저술을 통해 본 38도선 이북 지역 일본인의 식민지 귀환 경험과 기억’이란 논문을 참고한 기사였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이소가야는 제국주의 가해자인 일본 군인으로 한반도에 상륙했지만, 이 땅에서 스스로 가해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18년 동안 ‘만국의 노동자’로 뭉쳐 자본과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동아일보도, 변 교수도 이소가야를 온전하게 해석하지 못했다. 노동과 자본의 문제를 외면한 채, 한일 간 민족 문제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한반도 근현대사는 노동과 자본, 민족이 얽힌 복잡한 실타래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이주해온 수십만 명의 일본인 대부분은 노동자였다. 물론 자본주의가 막 태동하던 조선에서 그들은 노동시장 상층부를 차지했지만, 그들도 결국엔 노동자였다. 일제 때 성공한 파업엔 이들의 연대도 한몫했다. 제국주의에 적극 가담해 한몫 잡은 극소수 일본인의 패악질이 워낙 심해 평범한 노동자로 살다가 떠난 수많은 일본인은 지워졌다. 이소가야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동아일보 2021년 10월 8일 20면.

이소가야가 활약했던 30년대 초반은 한반도에서 자각한 노동자가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던 때다. 1930년 5월 1일 메이데이 행사는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다. 조선질소비료회사 흥남공장 노동자 200여명도 메이데이 기념 파업을 단행했다. 당연히 이소가야도 이 파업에 동참했으리라. 같은 날 함경남도 신흥군 장풍탄광 노동자도 메이데이 파업에 들어갔다.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던 메이데이 총파업

장풍탄광은 한반도에서 가장 큰 탄광으로 약 500~600여명의 노동자가 일했다. 노동조건은 열악했다. 동아일보엔 ‘탄부 2명 참사, 3월 5일과 6일 함남 신흥에서’(1930년 3월 12일자), ‘신흥탄광 일부 붕괴, 탄부 6명 매몰’(1930년 3월 22일자) 등의 기사가 실렸다. 장풍탄광 노동자는 하루 12시간 이상 지하노동을 해도 임금은 불과 60~80전을 받았다. 이중삼중의 착취제도인 벌금제, 강제저금제, 전표제 임금지불 등으로 이마저 다시 약탈해갔다. 동아일보에 실린 ‘신흥탄광 젊은 탄부의 수기’엔 “회사 내 경무계는 회사의 충견으로 노동자를 감시하고 구타했다. 탄광에서 일하는데도 씻을 물을 주지 않아 엄동설한에 강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몸을 씻었다”고 적혀있다.

탄광에는 공산주의자가 지도하는 선진 노동자가 있었다. 이들은 메이데이 다음날 노조를 결성하려다가, 경무계가 참가 예상자 한 명을 구타하는 바람에 결성을 미뤘다. 대신 노동자들은 파업위원회를 만들어 파업 깨기꾼(파괴자) 방지를 위한 선봉대를 조직하고 생산을 완전마비 시킬 파업을 준비했다. 인근 농촌에서 먹을거리도 원조 받았다. 5월 3일 아침 6시 교대시간에 200여 노동자가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요구는 1) 노조 조직에 불간섭 2) 구타 금지, 폭언 금지, 3) 임금 2할 이상 인상 4) 8시간 노동제 실시 5) 3명의 감독 축출 6) 무조건 해고 반대 등 12개 항이었다. 이들이 가장 앞세운 건 ‘노조 결성’이었다. 파업위원회는 식량을 구해 지구전을 준비했다. 회사는 해고로 맞섰다. 10여 명의 경찰과 경방단원을 파견해 노동자를 위협했다.

장풍탄광 파업 노동자들은 간도에서 일어난 5.30인민폭동에 연대하려고 6월 22일 새벽 1시에 봉기했다. 탄광의 전선과 전화선을 자르고 일본인 감독과 중간 관리자의 집을, 탄광 보일러, 발전소, 권양기를 습격해 파괴했다. 함남 경찰부는 백여 명의 무장경찰을 급파해 노동자를 포위했다.

1930년 6월 23일엔 조선질소회사 함흥공장 노동자들이 노조활동가 2명의 해고에 반대해 파업했다. 같은 날 원산에선 인쇄노동자도 파업했다. 안주에선 철도노동자가 파업했다. 7월 2일엔 함남 마에시마 잠종제조소에서 100여 노동자가 파업했다. 7월 22일 이원철산주식회사 노동자가 봉기했다. 9월에는 조선방직 부산공장에서 2천여 노동자가 파업에 들어가고, 11월엔 함경북도 부령 요네야마광업소에서 300여 광산 노동자가 봉기하는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업이 이어졌다.

중국‧일본‧프랑스 노동자와 연대한 원산총파업

1928년 말 조선공산당 해산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은 사회주의자들은 대중 속으로 들어가 노동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원산 총파업은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이런 노동자들의 혁명적 진출이었다.

원산 부두 노동자들은 1927년 6월 임금인상 파업을 벌여 승리하고, 원산 전체 운수업자와 ‘통일된 임금표’로 전면적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원산 자본가들과 일제는 전투적 노동운동에 결정타를 입힐 기회를 노렸다.

2년 뒤 벌어진 1929년 원산 총파업은 영국계 ‘라이징 썬’ 석유회사 문평유조소 노동자의 임금인상이라는 경제투쟁에서 출발했다. 1928년 9월 노동자 파업에 겁먹은 회사는 일본인 악질 현장감독을 해고하고 노동자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도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문평유조소 250여 노동자가 1929년 1월 14일 파업에 들어갔다. 영국인 관리자의 요리사도, 그의 승용차 운전수도, 조선인 정문 수위도, 일본인 개인 집 고용자들도 파업했다. 1월 16일엔 문평운송노조 50여 명이 연대 파업했다. 이 파업은 연대의 힘 때문에 원산총파업으로 확전했다.

자본은 해고로 맞섰지만 1월 19일엔 부두노조 450여 명 전체가 연대파업 했다.(동아일보 1929년 2월 8일자) 토목을 담당하는 일본인 노동자 약 40여 명도 2월 2일부터 연대파업 했다.(동아일보 1929년 2월 4일)

파업 지도부는 부산‧인천‧함흥‧청진 등 전국에 활동가를 파견해 그곳 노동단체와 연계해 자본가들의 파업 대체인력 모집을 거부하자고 독려했다.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체인력 모집에 응하지 않았다.

일본 노동계급도 연대했다. 고베의 ‘라이징 썬’ 석유회사 노동자와 오다루 운수노동자가 연대파업 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중국 노동자들의 지원도 받았다.(동아일보 1929년 1월 27일자) 프랑스 노총도 연대 성명과 지원금을 보내왔다.

1929년 2월 문평유조소와 별 상관없는 데도 연대 파업에 나섰던 토목직 일본인 노동자들은 오늘날 인국공이나 도로공사, 서울교통공사 내 일부 정규직 노동자와는 확연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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